Column

공생의 갑을관계는 일장춘몽인가 

 

진재욱 하나UBS자산운용 대표

연말 연초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다. 어이없는 화재에, 인질극까지. 새해란 느낌을 받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일까? 가뜩이나 나라 경제도 어려운데 사회 분위기도 어둡다. 개인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서울 압구정동 한 아파트 경비원이 입주민의 폭언을 견디다 못해 분신을 시도했다가 결국 숨진 사건이다. 또 갑을 문제가 회자됐다. 남양유업 사태부터, 대한항공 회항 사건까지 반복 또 반복이다. 대체 한국 사회는 왜 이런가? 강준만 교수는 자신의 책 <갑과 을의 나라>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인 다수에게 갑을관계는 이익 차원의 개념일 뿐만 아니라 ‘을 위에 군림하는 맛’이라고 하는 인정욕구를 충족하는 삶의 기본 문법이다. 한국인이 갑을관계에 중독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출발점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관존민비(官尊民卑)다. 오늘날의 갑을관계에서도 여전히 관은 민을,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지배하는 갑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관존민비의 역사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나라가 패망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얼마 전 한 아파트 경비원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일이 많아 힘든 게 아니에요. 그 일을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많을 뿐이지.” 경비원은 사회의 먹이사슬로 따져볼 때 을 중의 을이다. 아파트 주민에게도 을, 자신을 고용한 용역 업체에게도 을이어서다. 그럼에도 근로 환경은 열악하다. 보수 역시 많지 않다. 대부분이 모자란 노후 자금에 보탬이 될까 하고 은퇴 후 다시 생업에 뛰어든 이들이다. 몸은 하난데 주민들이 원하는 건 많다. 마치 집사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한다. 쓰레기 분리수거 부터, 층간 소음이나 주차 관련 소소한 분쟁까지 경비원의 몫이다. 누구의 편도 못 드는 게 그들의 입장인데 우리는 은연 중에 그들에게 결정을 강요한다. 주민 간의 수많은 갈등 사이에서 경비원은 늘 애꿎은 희생양이다.

한 경비원의 극단적인 선택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이런 사태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는지 곱씹어보자. 요즘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풍자하듯 우리는 누군가에게 때로는 갑이고, 때로는 을이다. 하지만 갑일 땐 을의 마음을 쉬 잊는다. 을이었을 때 받았던 고통과 불만을 떠올리지 못한다. 수시로 갑을을 오가면서 갑으로 군림하는 맛에 취해있다. 그리고 을이 아닐 때 안도감을 느낀다.

갑을 문제의 해결은 어쨌든 갑에게 달려 있다. 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지만 갑이 생각을 바꾸면 문제의 근본에 접근할 수 있다. 직업엔 갑을이 있을지 몰라도 인간에겐 갑을이 없다. 돈과 이해관계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관계도 배려가 없으면 사상누각이다. 너와 나의 입장을 공유하고, 각자의 일을 존중하는 것. 그 안에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해결의 출발점이다.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 전체에 온기가 돈다. 그게 곧 건강한 사회다.

뻔한 말을 왜 다시 하냐고 할 수 있다. 말은 쉬우나 행동은 늘 어렵다.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경비원 아저씨께 설 선물세트 하나라도 전해보자. 남아도는 식용유 말고 기왕이면 비싸고, 좋은 걸로 고르자. 그리고 딱 한 마디면 충분하다. ‘고생 많으시죠? 늘 감사합니다.’ 이 한 문장이 많은 걸 바꿀 수 있으리라 믿는다.

1270호 (201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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