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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의 덫에 걸린 한국 제조업] 외환위기·금융위기 때보다 불황 심각 

효자산업에서 미운 오리새끼로 … 고부가가치·신산업으로 빠르게 전환해야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조선·철강·석유화학·건설 등 이른바 중후장대산업의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호황에 취해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부실을 숨긴 기업, 부실이 쌓이는데도 애써 외면한 정부와 금융회사, 손 놓고 있던 정치권 사이에 허무한 책임공방만 치열하다. 한국이 주춤하는 사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고부가가치·신산업으로 말을 옮겨 탔고, 중국을 필두로 신흥국은 절치부심 경쟁력을 키웠다. 한국 제조업은 이대로 주저앉는 것인가. 아직 늦지 않았다. 핵심 경쟁력을 키울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매듭짓는 한편 투자를 더 늘리고 인재도 확보해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역발상 경영도 절실하다. 동남아를 비롯한 신시장에 안착하려는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어려운 회사 사정을 반영하듯 자욱한 안개에 싸인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조선·해운·철강·석유화학·건설 등 이른바 중후장대 산업의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정부·금융당국·KDB산업은행에 따르면 정부는 산업 구조조정의 우선대상 업종을 조선과 해운업으로 지정하고 강력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조선·해운·철강·건설·화학 업종의 상황을 재점검하고 구조조정 방향성을 정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제조업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기에 정부가 이처럼 호들갑일까.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현재 제조업 경기는 과거 가장 심각했다고 평가받는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때에 버금간다. 한국의 제조업 생산증가율은 6개 분기 연속 감소세다. 생산 증가율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3개 분기 이상 연속으로 감소세를 기록한 것은 외환위기가 있던 1998년 1∼4분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던 2008년 4분기∼2009년 2분기 이후 세 번째다. 특히 기간 면에서는 이전의 위기 때보다 더 심각하다. 1998년에는 4개 분기 연속으로, 2008년에는 3개 분기 연속으로 제조업 생산이 감소했다 반등했다. 하지만 현재 6개 분기 연속 불황 이전의 생산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수요가 결정타


시장 수급 측면에서 봐도 경고등이 들어왔다. 출하는 감소한 반면 재고는 계속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때는 출하가 급격히 감소했다가 바로 반등한 반면 현재는 제조업 출하 증가율이 평균 ―0.5%를 기록 중이다. 내수(―0.02%)·수출(―1.0%)이 동시에 감소세다. 더구나 재고증가율(2.7%)을 보면 공급 과잉까지 겹쳤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현재 우리나라 제조업의 문제점은 불황 강도가 아니라 시장 수요 침체의 장기화”라고 진단하며 “이로 인해 대부분의 주력 제조업이 한계상황을 맞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때 우리나라 성장동력이던 제조업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 경제 전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6개월째 수출 감소에 허덕이고 있는 제조업 때문에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KDI가 최근 발표한 ‘경제동향 5월호’는 ‘수출 감소에 따른 제조업과 설비투자의 부진으로 우리 경제 전반의 성장세는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3월 우리나라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2월(73.5%)보다 하락한 73.2%를 기록했다. 설비투자 역시 1년 전보다 7.8%나 줄었다. 우리나라 제조업이 ‘덫에 걸렸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상황이 이처럼 심각해진 건 속칭 ‘잘 나가던 시절’ 우리나라 제조업이 외형 성장에 취해 경고등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전문가들이 15년 이상 제조업 위기를 경고했지만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2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한국 주력 산업의 경쟁력 분석’ 보고서에서는 우리나라 주력 수출산업이 선진국과의 경쟁력 격차를 좁히지 못할 경우 중국을 비롯한 후발주자들의 추격에 직면해 제조업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14년 전의 일이다.

경고는 현실이 됐다. 조선소 도크가 비는 상황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대한민국 조선업은 2000년대 초반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했다. 1999년 세계 조선 수주량 부문에서 한국은 40.9%의 시장점유율로 2위 일본(30.0%)을 큰 격차로 제쳤다. 하지만 일각에선 고부가가치 선박 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중국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당장 일감이 넘쳐 행복한 비명을 지르던 조선 업계에는 들리지 않았다. 결국 우리나라 조선업은 본업인 선박보다 해양플랜트에 한눈 팔다가 대규모 손실을 기록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해운업도 마찬가지다. 2008년만 해도 해운사 운임의 기준이 되는 발틱건화물지수(BDI)가 수직 상승하기 시작해 1만1000을 기록했다. 해운사는 호황에 취해 비싼 값에 배를 빌렸다. 최근 화제가 되는 고가 용선료의 배경이다. 해운사는 벌어들인 돈으로 에코십 등을 발주해 경쟁력을 강화하기보다는 손쉽게 돈 주고 배를 빌리는 선택을 했다. 물론 정부도 이런 판단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삼성경제연구소, 2002년 제조업 불황 경고


철강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해운·조선 업계의 구조조정은 철강 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철강 판매 가격은 오르지 않는데, 비용만 계속 늘어나는 구조다. 철강 가격이 오르지 않거나 수요가 늘어나지 않으면 수익성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우리나라 철강 설비 가동률이 현재의 80% 선에서 2018년에는 78%로 더 떨어질 수 있다는 게 골드만삭스의 분석이다.

수요 감소 탓에 우리나라 철강사들은 일본·중국의 경쟁사들과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 최대 철강기업인 신일철주금은 일본 4위 철강사 닛신제강과 합병했다. 중국도 현재 12억t에 달하는 중국의 철강 생산 능력을 5년 안에 10%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가장 먼저 구조조정 수술대에 올랐던 건설업종은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됐다. 한국건설산업 연구원에 따르면 종합건설사는 2008년 1만2590개에서 2014년 1만972개로 1618개 감소했다. 매년 270개 가까이 문을 닫은 셈이다. 구조조정이 장기간 진행됐지만 실적은 나빠졌다. 실제로 이자보상비율은 2008년 387.4%에서 2014년 201.9%로 오히려 떨어졌다.

그나마 석유화학 업종은 다른 업종 대비 상황이 나은 편이다. 업계 1위인 LG화학은 올 1분기 4577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매출은 4조8741억원에 달한다. 업계 2위 롯데케미칼은 1분기에 4736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하지만 중국의 자급률 상승과 설비투자에 따른 과잉 공급으로 경쟁이 치열하다. 정부가 구조조정 업종으로 선정한 이유다. 이번 실적 호조도 우리나라 석화 업종 경쟁력이 강화됐다기 보다는 유가가 떨어진 덕이 컸다.

이들 구조조정 대상 업종은 공통적으로 시장 수요 침체가 장기화에 되면서 불황의 늪에 빠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제조업도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주력 제조업이 한계상황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더 큰 문제는 현재의 어려움에 대응하는 데에 급급해 성장잠재력을 확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건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부가가치·신산업으로의 신속하게 전환하는 것이다. 축소 일변도로 구조조정이 이뤄지면 부가가치 사슬망을 타고 다른 산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나라 제조업 전반의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석유화학 업종, 사정 낫지만 공급 과잉 마찬가지

투자 확대도 절실하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규제를 완화해 경제 성장력과 고용 창출력의 원천인 투자가 활성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업 투자의 무게중심이 기존 사업 부문에서 신기술·신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정부가 앞장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조기업도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하고 인재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한득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과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가격 경쟁력과 노동생산성이 동시에 약화되고 있다”며 핵심 경쟁력 제고를 위한 투자 확대를 강조했다. 실제로 글로벌 R&D 비용 지출 1000대 기업 중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도로 줄고 있다. 글로벌 톱 1000개 R&D 비용 지출 기업 중 우리나라 기업은 2004년 9개에서 2014년 24개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와 달리 같은 기간 중국 기업은 4개에서 46개로 10배 이상으로 늘었다. 일본 역시 2014년 기준 168개 기업이 1000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금융당국은 5월부터 대기업의 정기 신용위험평가에 착수해 6월까지 마치고, 7월 초 구조조정 대상 기업을 선정한다는 방침이다.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대기업 선별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7~10월 평가를 거쳐 11월 구조조정 대상을 가려낸다. 주원 실장은 “선제적인 추가경정예산 편성과 금리 인하로 경기 안정화에 노력하고, 신산업·고부가가치산업 분야로 신속한 산업구조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1337호 (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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