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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차마고도(茶馬古道) 그 험준했던 역사의 길 

 

서영수
차와 말 필두로 상품·문화·종교 교류했던 교역로... 송나라, 차 전매 수익금 잘못 사용해 자멸

▎염전이 펼쳐진 캄지역 고산지대를 지나는 소금장수 마방(말무리를 이끄는 사람들).
차마고도(茶馬古道)는 차와 말을 교역하던 중국의 험준한 옛길을 뜻한다. 하늘을 나는 새도 넘기 힘들 정도로 높고 쥐가 겨우 다닐 만큼 좁다고 하여 조로서도(鳥路鼠道)라는 별칭도 있다. 티베트 고원과 사천을 이어주는 교통요충지 창도(昌都)를 오가는 유목민이 가축을 몰고 다니던 위험하고 협소한 길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마방(馬幇)들의 이동통로가 돼 기원전 2세기부터 난장(亂場) 형태의 국제장터인 차마호시(茶馬互市)를 위한 교역로 역할을 하게 됐다. 실크로드보다 200여 년 앞서 개척돼 차와 말을 교환하기 위해 사용된 아시아에서 최고로 오래된 교역로를 그 당시에는 차마지도(茶馬之道)라 했다.

차마고도를 넘어온 마방은 티베트와 중국 변경지역에서 차마호시를 통해 차와 말을 필두로 다양한 물물교환을 하며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체험을 갖게 됐다. 수나라 문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남북조 시대부터 중국의 차는 차마고도를 통해 몽골과 터키에도 수출됐다. 시베리아를 중간기점으로 유럽에도 차를 공급하던 당나라는 차마고도와 실크로드를 연결해 위구르족 지역과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라비아까지도 차를 전파했다. 송나라는 민간이 주도하며 부정기적으로 열리던 차마호시를 관이 통제하는 차마교역으로 전환시켰다.

차마고도는 해발 4000m를 넘나드는 고산지대와 5000m가 넘는 만년설 지역을 통과해야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교역로였다. 여덟 개 노선으로 분류되는 차마고도는 티베트로 향하는 삼대 노선이 가장 유명하다. 중국 청해성과 사천성 그리고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노선이 일찍부터 시작되어 왕성한 교역활동이 이뤄졌다. 몽골과 요동에서도 차마무역이 있었지만 비중은 크지 않았다. 운남에서 티베트 국경까지 가는 3800㎞가 넘는 차마고도가 험난하면서도 풍광이 제일 아름답다. 사천에서 시작되는 노선도 중국 국경까지만 3100㎞가 넘고 해발 2000m가 제일 낮은 통행지역이었다. 길이 좁고 가파른 협로를 만나면 말 대신 사람이 차를 짊어지고 운반했다. 경험 많고 숙달된 마방도 떠날 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출발했다. 목숨을 담보로 떠나는 위험한 길이었기에 이들에게는 형제가 부인을 공유하는 풍습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험준한 교역로


▎1. 마방 출발 전 안전을 기원하는 축제장면. / 2. 사람이 등짐을 지고 차를 나르기도했다. / 3. 용병으로 활약하던 티베트군.
차마고도는 당나라 때부터 ‘남방 실크로드’라고도 불렸다는 사실을 학자들이 1980년대 중반 밝혀냈다. 90년 7월부터 서용도(徐湧濤)와 뜻을 함께 한 6인의 원정대가 100일에 걸친 도보탐방으로 차마지도의 옛길을 찾아냈다. 해발 4700m가 넘는 히말라야 산봉우리 수십 개를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낙석과 눈사태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급류로 악명 높은 금사강(金沙江)과 노강(怒江)을 밧줄 하나에 의지해 건너는 악전 고투 속에 고대 무역노선의 실체를 확인했다. 복잡하게 얽힌 차마지도의 작은 지선 주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전통 민요와 차마교역에 얽힌 이야기를 채록했다. 1000점이 넘는 교역과 문화교류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쾌거 끝에 옛 차마지도는 차마고도라는 이름으로 부활해 90년부터 학계와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차마고도의 출발노선은 저마다 달랐지만 종착지에서는 반드시 차마호시가 열렸다. 차와 말뿐 아니라 소금과 비단, 모피, 희귀약재 등이 거래됐다. 차마호시는 처음에는 민간이 주도하는 개인무역이었지만 송나라가 차를 전매품목으로 지정한 이후 사사로운 개인 거래는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됐다. 차에 대한 과세를 시작했던 당나라는 차에 대한 전매제도를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당나라가 발전시킨 차 문화와 산업을 승계한 송나라는 당나라가 실패한 전매제도를 건국 초기부터 꾸준히 보완해서 휘종(1082 ~1135년) 때 재상을 지낸 간신 중의 간신으로 악명을 떨친 채경(蔡京)이 정착시켰다. 한나라 무제 때부터 전매품목으로 지정된 소금, 술, 철에 이어 차가 중국의 전매품으로 등극하며 허가 없이 차를 거래하는 자와 이를 묵인하는 관리를 똑같이 사형에 처했다.

차마고도를 자유롭게 다니며 교역을 주도하던 마방의 대다수는 소수민족이었다. 차마교역을 위해 송나라는 차마사(茶馬司)를 변경지역에 설치해 특정한 토호세력과 한족에게 차 판매를 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해줬다. 목숨을 담보로 차마고도를 다니던 마방은 졸지에 하수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는 전략적으로 차의 수급조절을 하며 수출가격을 높이기 시작했다. 당나라 때부터 차가 생활 속에 들어와 하루도 차가 없으면 살 수 없게 된 티베트인은 당황했다. 차마교역은 대등한 무역관계에서 점차 조공형태로 변하면서 티베트는 말을 헐값에 넘기게 됐다.

차마고도를 장악한 송나라는 전매제도를 통해 생긴 막대한 이익으로 송나라 재정의 25%를 충당했다. 차로 걷어 들인 세금의 대부분은 국방비로 사용했다. 무신정권이 창출한 당나라가 무신들의 반란으로 멸망하는 것을 지켜본 송나라는 군사반란을 차단하기 위해 철저하게 문치주의로 나라를 이끌었다. 국경수비를 위해서 자국군대를 양성하는 대신 티베트를 비롯한 주변국가에서 용병을 사오는데 국방비의 대부분을 소모했다.

교역로 아닌 관광자원으로 명맥

차마고도를 통해 마방과 티베트가 유지해온 공존공영 정신이 쇠락하고 풍족한 국방비를 적재적소에 투입하지 못한 송나라도 국력이 기울면서 원나라에 중원을 내어준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차 문화를 꽃피운 송나라는 농민봉기와 군사반란은 없었지만 건국 초기부터 티베트를 제외한 다른 북방 유목민족에게 끊임없이 국경을 유린당했다. 송나라의 멸망 원인은 역설적이지만 차를 전매품으로 지정해서 막대한 재정수입을 올리면서 이미 시작됐다. 관이 통제하는 차마교역은 청나라 옹정제(雍正帝)가 집권하던 1735년까지 계속됐다. 민간에게 돌아온 차마고도는 다시 활기를 찾았지만 말은 더 이상 중요한 전략자원이 아니었다. 오늘의 차마고도는 교역로가 아닌 관광자원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1384호 (201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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