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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 관계학(37) 끝 | 정조와 정약용] 뛰어난 재능에도 때를 잘못 만나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정치적 비주류, 서학 전력의 정약용 ... 정조의 극진한 관심에도 꽃 피우지 못해

▎다산 정약용(왼쪽)과 그가 18년 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의 다산 초당.
다산 정약용(1762~1836). 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선의 제22대 군왕 정조다. 정조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그는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정조를 보좌했다. 정조의 핵심 사업인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제작했으며, 정조의 능행을 위해 주교(舟橋, 배를 엮어 만든 다리)를 가설하는 등 테크노크라트로서도 활약했다.

그런데 막상 [정조실록]을 보면 정약용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검색되는 횟수는 불과 16건으로 평범한 신하들보다도 훨씬 적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약용이 남인(南人)인데다가 서학(西學, 천주교) 교도로 몰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실록 편찬자들이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이다. 따라서 [실록]만으로 정약용과 정조의 관계를 살펴보기란 불가능하다. 다행히 정약용이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다산시문집] 16권)에 정조와의 일화가 상세히 서술돼 있으므로 이번 회에서는 이 기록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우선 정약용이 처음 정조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785년(정조 9년), 그가 성균관 유생이었을 때다. [중용(中庸)]에 관한 정조의 70개 질문에 답변하는 글을 올리며 극찬을 받았다. 이후 치르는 시험마다 높은 성적을 받아 “서적과 말, 표범 가죽,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을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로 하사받았고” “품고 있는 생각을 이야기하면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었다”고 한다.

'정조실록'에는 정약용 등장 횟수 극히 적어

이러한 정조의 관심과 격려 속에서 정약용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조정에 출사해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했고, 동부승지, 좌부승지가 되어 임금의 측근을 지켰다. 정조의 밀명을 받아 경기 암행어사로 활약했으며 병조참의와 형조참의를 맡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정조의 총애는 “점점 더 성대해졌는데” “학문을 온축함이 참으로 넓고도 깊다”라며 공개적으로 칭찬하는가 하면 (당시 대다수의 신하들은 학문이 부족하다며 정조의 꾸중과 면박을 받았다), 야대(夜對, 밤에 열리는 경연)에 자주 불러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는 정약용의 학문과 능력이 정조의 눈에 들었을 뿐 아니라, 채제공의 뒤를 이을 남인계 재상감을 키우겠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보스의 관심과 후원이 유독 한 사람에게 쏟아진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질시와 견제를 받게 된다. 더구나 그가 비주류에 속하고 정치적인 힘도 약하다면, 사람들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진다. 정약용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조정 내 ‘극소수파’인 남인에다가 나라에서 이단으로 배척하는 서학 전력까지 있었으니, 트집을 잡아 더 크기 전에 꺾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정약용은 갖은 공격과 모함을 받아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한번은 그가 과거시험의 부책임자가 되었는데, 남인계 합격자가 50여 명이 나왔다고 해서 정약용이 일부러 자기 당파를 뽑은 것이라는 탄핵이 있었다. 정조는 몹시 진노하며 그를 하옥시켰고, 다시는 관직에 추천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그런데 사건의 진상은 달랐다. 정약용은 일소(一所, 제1고사장)의 시험관이었고 남인 합격자는 모두 이소(二所, 제2고사장)에서 배출된 것이다. 정조는 허위사실을 가지고 그를 탄핵한 사람들을 징계했지만 이런 식의 모함은 계속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조는 정약용의 능력을 공인받게 하려고 했다. 정약용을 높게 평가하고 중용하는 것은 정치적인 목적이나 개인적인 선호 때문이 아니라,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어서라는 것이다. 정약용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자질을 과시한다면, 그를 향한 공격 역시 자연히 무뎌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한밤중에 갑자기 숙직하고 있던 정약용에게 칠언배율의 시 백 운(韻)을 짓게 하고, 대신들에게 이를 비평하도록 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의 품계를 강등해 지방관으로 내려 보낸 것도 마찬가지다. 문책성 처벌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반대파의 예봉을 피하게 하고,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어 다시 한양으로 불러올 명분을 삼으려 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는지를 시험해보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정조는 정3품 승지였던 정약용을 종6품 금정 찰방으로 강등한 적이 있다. 당시 금정 지역은 서학이 급속도로 퍼졌던 곳으로, 정약용이 이를 막아낸다면 그에게 가해지는 서학 교도라는 비난은 힘을 잃을 터였다. 정조는 정약용을 금정으로 내려 보내며 “살아서 한강을 넘어올 방도를 도모하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아무 말 하지 못하도록 능력을 발휘하고, 더 강해져서 돌아오라는 당부였다. 곡산 도호부사로 폄체(貶遞, 품계를 떨어뜨려 교체하는 것)한 것도 같은 이유다. 정약용은 빈곤하기로 유명한 고을인 곡산을 풍요롭게 일신하는 공을 세워 조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희망과는 달리 정약용을 향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정조는 “그대를 중용하려고 하나 의논이 매우 분분하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한두 해 늦더라도 손상될 것이 없다. 장차 부를 것이니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리고 1800년(정조 24년) 6월 12일, 정조는 관직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 있던 정약용에게 사람을 보냈다. “서로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구나. 그대를 불러 서적을 편찬하려고 하는데, 주자소(鑄字所)를 새로 개수하여 벽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믐께면 들어와 과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전한 관리는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전하께서 말씀하실 때 몹시 그리워하는 안색이셨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정조가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6월 28일, 끝내 정약용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승하한다. 정조가 위급하다는 급보를 들은 그가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정약용은 창경궁 홍화문 앞에서 “가슴을 치며 목 놓아 통곡하였다.”

이렇게 정조라는 거대한 보호막이 사라지자 그에게는 이내 위기가 닥쳤다. 남인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서학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그리하여 1801년 2월 8일, 그는 멘토인 이가환,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종, 매부인 이승훈 등과 함께 체포된다. 그리고 장기현(포항)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진현으로 이배되었다. 기나긴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이상 정약용의 사례는 참모가 좋은 보스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정국 상황 등 외부적인 요인 탓에 꽃을 피우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찌할까. 회재불우(懷才不遇), 운명일 밖에.

※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 들] 등이 있다.

1420호 (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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