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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세계 무역전쟁사 7장면] 만연한 자국이기주의… 뺏고 뺏기는 혈투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적 이유도 원인… 청 왕조 몰락, 일본 잃어버린 20년 등 후폭풍

▎‘주식투자로 망해 이 고급차를 단돈 100달러에 팝니다’ 1929년 대공황 직후 뉴욕의 한 신사가 이런 문구를 써붙이고 거리에서 자신의 승용차를 팔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각국은 여러 번의 위기 속에서도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약 4반 세기 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하면서 자유무역의 기조는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세계 각지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같은 ‘자유무역협정(FTA)’과 더불어 유럽연합(EU)과 같은 경제·통화 통합체도 생기면서 이런 추세에 제동이 걸리는 모습도 동시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배타적이나 대내적으로는 자유무역을 보장했으며,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한 나라가 여러 조약에 걸치면서 결국 세계 경제는 궁극적으로 ‘자유무역의 완성’을 향해 더 나아갈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서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가 집권한 후 중국 등과 첨예한 무역마찰을 빚는 등 자유무역의 기조는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하는 듯하다. 이에 근세 이후 주요 무역전쟁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도 미중 무역전쟁 등의 향방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1. 영국의 프랑스 와인 관세 부과: 1688년 명예혁명으로 영국의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는 당시 루이 14세 치하에서 유럽의 최 강국이던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 등으로 프랑스산 와인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사실상 수입을 막은 것이었다. 그 결과 영국인들은 와인의 대체품으로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주니에르’라는 술을 개조한 ‘드라이진’으로 눈을 돌렸다. 원래 ‘주니에르’는 생산 공정도 복잡하고 향도 강한 술이었지만 영국인들은 이를 값싼 곡물을 원료로 제조 공정을 단순화하는 등 대량 생산에 적합하도록 바꾸어 ‘매우 싼’ 술로 만들었다. “1페니면 만취, 2펜스면 죽을 만큼 마실 수 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이후 50년간 영국인들은 이 술에 빠져 살다시피 했다. 그 결과 술 관련 범죄와 사망 사건이 급증했고, 특히 여자들까지 이 술에 중독돼 자기가 낳은 아이도 방치하는 등 큰 사회 문제가 야기됐다. 오늘날 영국에서 여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와인 소비가 저조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한다.

#2.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후폭풍: 설탕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소금과 함께 없어서는 안 될 감미료다. 우리가 매일 먹는 식품의 대부분에는 이 재료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전통 한식마저 이제는 ‘너무’ 달아졌고 TV에 출연하는 전문 요리사들도 ‘설탕 넣기’를 부추긴다고 개탄하는 ‘맛 평론가’도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주위의 보이는 설탕은 대부분 ‘사탕수수’에서 추출한다. 그런데 설탕의 원료에는 다른 식물도 있다. 바로 ‘사탕무우’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설탕 전체의 약 20%는 이 ‘사탕무우’에서 나온다. 이 식물이 설탕의 재료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럽 각국은 신대륙인 남미의 식민지에서 재배한 ‘사탕수수’를 들여다가 설탕을 추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 전역을 정복한 나폴레옹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에 큰 패배를 당했다. 이 패전의 이듬해인 1806년 나폴레옹은 그 보복의 일환으로 ‘대륙봉쇄령’을 내려, 영국의 상선이 유럽대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영국은 바로 ‘역봉쇄’에 들어가,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이용해 프랑스나 여타 유럽 국가들이 그들의 식민지로부터 들여오는 모든 물자를 해상에서 차단했다. 신대륙에 대량으로 재배한 사탕수수를 통해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가격으로 설탕의 맛을 알게 된 백성들은 아우성쳤다. 이를 의식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과학자들에게 사탕수수가 아닌 다른 식물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방법을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옆 나라인 프러시아에서는 이미 유럽의 찬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사탕무우’에서 설탕을 뽑아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곧 이 식물을 당장 2만8000헥타르에 달하는 면적에 심도록 했다. 이 조치로 사탕무우 재배가 확산되기 시작해 1880년에는 세계의 총 설탕 생산량에서 사탕무우에서 생산되는 설탕의 비중이 50%를 넘어서기도 했다. 현재 매년 3억t 이상이 생산되는 이 사탕무우의 최대 재배국은 러시아이며 대량생산을 시작했던 프랑스와 미국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제1차 아편전쟁(1839~42)이 한창이던 1841년 1월 7일, 동인도회사가 만든 철제 증기선 네메시스호(그림의 오른쪽)가 청나라 범선 15척을 궤멸시키고 있다. / 사진 : 글항아리
#3. 청나라·영국의 아편전쟁: 청 왕조 몰락의 계기가 된 아편전쟁은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에서 발생한 막대한 무역적자를 아편 수출로 메우려고 한 데서 비롯됐다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부유해진 자국 국민들의 차 수요가 폭증하자 중국으로부터 차 수입을 늘렸다. 그 결과 막대한 양의 은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빨려 들어갔다. 1781년부터 1810년까지 중국에 유입된 은의 양은 4200만냥이 넘었다. 1763년 인도의 지배권을 쟁취한 영국은 처음에는 인도산 면으로 무역적자를 메우려고 했지만 역부족을 실감하고 인도에서 재배된 아편으로 품목을 대체했다. 공급은 수요를 낳는다는 말처럼 중국에서 아편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773년에 처음 아편이 들어올 무렵에는 판매량이 1000상자였던 것이 1839년에는 4만 상자로 늘어나 있었다. 아편 중독이 사회 문제가 되자 청 조정은 수입을 엄금했다. 이에 반발한 영국이 최신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몰고 와 청나라의 구식 군대를 손쉽게 제압했다. 1840년 6월 육해군 약 4000여 명의 원정군이 광동 앞바다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1842년 남경조약으로 끝났다. 결과는 홍콩을 영국에 내어주는 등 청의 참패였다.

#4. 대공황 부른 보호무역: 1930년 대공황의 초입에 들어서던 미국의 상원은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크게 인상하는 스무트-홀리법을 통과시켰다. 1000명이 넘는 경제학자들이 연명으로 이 법을 거부해줄 것을 후버 대통령에게 청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문제는 캐나다를 비롯한 다른 나라도 미국의 조치에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상으로 맞섰다는 점이다. 이 결과 1933년 한 해만 해도 수출액이 60%가량 줄어드는 등 미국 경제는 이 조치 탓에 더욱 깊게 대 공황의 늪에 빠졌다. 무지한 상원의원 둘이 제안한 이 법의 위력은 미국을 넘어 세계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5. 미국산 닭의 유럽 점령: 1960년대였다. 미국 양계업에도 산업화 바람이 불어 이제 ‘닭공장’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저가·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유럽의 소비자들도 저렴한 이 닭을 좋아했다. 미국의 수출액이 대폭 증가했고, 미국산 닭은 유럽 전체 수입 물량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자국 양계업에 타격을 입은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산 닭(고기)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미국은 이에 당시 미국 내 인기 품목이었던 폴크스바겐 미니버스 등 수입 ‘경트럭’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프랑스산 브랜디 등에도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유럽 자동차 업계는 미국에 간단한 조립공장을 세우고 부품 형태로 들여와 미국산으로 판매해 이 조치를 피해갔다.


▎1985년 플라자합의를 마치고 카메라 앞에 선 G5 재무장관들. 왼쪽부터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자크 드 라로 지에르 IMF 총재, 영국의 나이절 로슨,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6. 엔고 부추긴 플라자 합의: 1981년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일본산 자동차의 대미 수출을 매년 168만대로 제한하는 ‘자율수출규제(Voluntary Export Restraint)’를 시행하도록 만들었다. 1970년대 수차례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미국 소비자들은 연비가 좋은 자동차를 찾았고, 이에 따라 일본차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차는 차체가 크지 않은 데다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전륜구동 방식까지 채택해 연비가 매우 좋았다. 그때까지 연비효율 같은 것은 신경 쓰지도 않았던 미국 자동차업계도 전륜구동 방식을 채택하는 등 뒤늦게 대응에 나섰지만 불량률만 크게 높아졌다. 결국 소비자의 외면 속에 일본차의 수입이 매년 폭증하면서 미국 정부가 이런 ‘무리한’ 조치에 나선 것이다. 이는 사실상의 수입 쿼터제로, 물량을 조금씩 늘려주기는 했지만 1994년에야 해제했다. 물론 일본 자동차 업계는 미국 현지공장을 지어 이를 회피해나갔다.

1980년대 내내 미국은 일본 상품의 가격·품질 경쟁력 때문에 쿼터제와 관세 ‘남용’에도 무역적자가 좀처럼 완화되지 않자 1985년에 드디어 일본 엔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조치에 나섰다. 1985년 9월 22일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프랑스·독일·일본·미국·영국으로 구성된 G5의 재무장관들이 달러화 강세를 ‘시정’하기로 결의했다. 바로 ‘플라자 합의’다. 이후 2년 동안 달러 가치는 30% 이상 급락했다. 일본이 통화공급을 크게 늘려 엔고의 속도를 늦추려고 했던 과정에서 대규모의 자산 버블이 생겼다. 1990년대 초 이것이 붕괴하면서 이 나라는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1993년에 시작된 미국과 유럽의 바나나 관세전쟁은 2012년에야 끝났다. 미국 측에서 협상을 주도했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내 인생에서 바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빼앗길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7. 미국과 유럽의 바나나 전쟁: 1993년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남미에서 생산되는 바나나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이 조치는 사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가 예전 식민지였던 캐리비언해 주변의 여러 바나나 생산국을 도와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매년 25억t 이상의 바나나를 소비하는 유럽시장에서 캐리비언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7% 정도였고, 전체 시장의 4분의 3 정도는 남미산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미의 바나나 농장은 대부분 미국 회사의 소유였다. 미국은 영국산 린넨, 덴마크산 햄, 프랑스산 핸드백 등에 보복관세를 물렸다. 이 무역마찰은 미국이 WTO에 여러 차례 제소해 1997년 승소했고, 이후 출범한 EU는 결국 2009년 관세를 점차 내리기로 합의했다. 이 ‘바나나 전쟁’은 2012년에야 완전히 끝났다. 20년 전쟁의 끝이 난 것이다. 당시 미국 측에서 협상을 주도했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내 인생에서 바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빼앗길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위의 사례들을 보면 무역전쟁에는 국내외 정치·외교적 이유도 상당히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힘있는’ 자가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얼마 전 G20 회의에서 미·중 두 나라 정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아들’ 부시가 집권하던 2000년대 초 중국을 “가장 큰 위협”으로 규정한 미국이 이번 협상을 중국의 경제·정치·군사적 위치에 구조적으로 제약을 가할 계기를 삼으려 하고, ‘대국굴기’를 꿈꾸는 중국이 이를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을 것이어서 이번에도 협상 타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미국은 ‘플라자 합의’로 자국의 경제적 리더십을 위협하던 일본을 주저앉힌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위안화 절상과 자국의 지적재산권 보호를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냉전체제가 지속되고 있어 소련의 안보위협을 의식한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거의 수용했지만 지금은 중국이 그럴 이유가 없어 미국의 의도가 잘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런데 금융 불안, 공장 폐쇄, 해외 기업의 철수 등 중국의 최근 경제상황이 심상치 않다. 길게 끌수록 중국이 더욱 불리해지는 형국인 데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일본처럼 구조적 쇠퇴의 길로 들어 설 수밖에 없다. 등샤오펑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유훈을 어기고 세계 패권에 대한 욕심을 너무 일찍 드러낸 결과가 아닌가 싶다. 최근 한국도 일본과 무역전쟁에 돌입했다. 이도 정치·외교적 이유가 주된 배경이다. ‘호란’을 막을 수 있었던 광해군의 외교정책과 명분만을 좇다 ‘호란’으로 온 백성을 고통에 빠뜨린 인조의 고집이 자꾸 대비되는 시점이다.

-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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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호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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