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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멀리 하는 긴축은 독약” 

박용만 회장이 말하는 위기 관리 노하우 

사진 중앙포토
2008년 11월 26일 열린 ‘제1회 포브스코리아 CEO 포럼’에서 유독 뜨거운 호응을 받은 섹션이 있었다. 두산인프라코어의 박용만 회장이 발표한 ‘경영환경 변화에 대한 대처방안’이었다. 강연 내용을 임원 회의 때 소개한 CEO가 있는가 하면, 행사가 끝난 후 발표 자료를 요청한 CEO도 여럿 있었다. 박 회장을 다시 만나 강연 내용을 보충해 소개한다.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회사가 괜찮느냐’고 물어봐요. 평소처럼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이보다 혹독한 시련도 겪었습니다. 그리고 위기를 극복한 후 더 성장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살린다면 이번 위기는 오히려 우리에게 큰 기회가 될 것입니다.”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경험한 혹독한 시련은 1996년에 찾아왔다. 당시 두산그룹이 창사 10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하지만 회사 분위기는 잔치는커녕 초상집 같았다. 현금 흐름상 9060억 원가량의 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주력 기업인 OB맥주의 실적 부진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때부터 박 회장은 구조조정에 팔을 걷어붙였다. 박 회장은 “위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용을 줄이고 유동성을 극대화시켜 경기 회복에 대비하는 것”이라며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으로는 모자란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선 회사의 비용 구조를 살펴본 후 ‘지속적으로 줄일 수 있는 비용’과 복잡한 제품군으로 생기는 ‘복잡성 비용(Com- plexity Cost)’을 제거 1순위에 올렸다.

발전·기계 설비 생산에 있어선 설계부터 조립까지 린(lean) 생산 방식을 적용해 비효율적인 부문을 제거했다. 린 생산이란 원자재부터 직원 생산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정의 세부 사항을 점검해 효율화된 공정을 구현하는 것이다. 구매 부문의 경쟁력을 진단해 부품과 원자재 소싱을 해외로 확대했고, 계열사마다 중복되는 거래처를 통합했다.

그러자 제품 원가율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복잡성 비용을 줄이기 위해선 핵심 제품 위주로 제품 수를 축소했다. 제품마다 옵션도 줄였다. 박 회장은 “회사가 커질수록 상품과 서비스가 다양해지지만 이를 통해 야기되는 비용도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복잡성 비용은 현재 글로벌 기업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경기가 호황일 때 멀티 브랜드 전략은 빛을 발하지만 불황일 때는 이로 인해 생기는 비용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글로벌 제조기업의 경우 복잡성에 따른 비용은 원가의 10~25%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회장은 “두산은 중후장대한 회사로 탈바꿈한 뒤 핵심 제품군 5종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을 21%에서 현재는 90%로 끌어올렸다”며 “이를 통해 물류비를 대폭 줄였고 경영 전략의 일관성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산의 구조조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90년대 중반부터 벌인 과감한 사업부문 매각이다. 두산은 90년대 중반 ‘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란 원칙으로 수익이 나는 사업체를 매각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다른 회사들이 외환위기에 휘청거릴 때 두산은 현금 흐름상 6000여 억 원의 흑자를 낼 수 있었다.

2000년 이후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등을 인수해 중후장대한 기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토대도 이때 마련했다. 박 회장이 사업 부문을 매각할 때 세운 원칙은 다음과 같다. ‘비영업용 자산’, ‘저수익 자산’, ‘비주력 사업’을 우선 매각한다는 것이다. 비영업용 자산은 유휴 부동산과 과잉 설비가 대표적이다. 박 회장은 2002년 단기차입금 비중을 낮추기 위해 마산·기흥 공장, 당산동 사옥 등을 매각했다.

이를 통해 현금을 확보하고 나아가 영업이익률도 개선할 수 있었다. 그는 “기업이 가진 자산은 가치일 수도 있지만 짐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향후 아무리 ‘금싸라기’가 될 부동산이라도 당장 현금이 필요한 기업에는 독약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산은 시기와 여건에 따라 기업에 주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라 가격을 산정했다가는 낭패를 보게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박 회장에 따르면 ‘저수익 자산’은 투하자산수익률(ROIC)이 평균자본비용(WACC)보다 높은 영업용 자산을 말한다. 90년대 두산이 가졌던 저수익 사업의 대표 사례가 자판기겴?“?사업 등이었다. 자판기 사업은 90년대 초반 두산음료 상무로 있던 박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한 사업이다.

당시 대형마트가 우후죽순 생기며 소규모 점포들은 문을 닫고 있는 상황으로 자판기 수요가 예상되던 시기였다. 두산은 코카콜라 같은 음료부터 OB맥주를 판매하고 있어 자체 수요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24시간 편의점들이 속속 들어서고, 롯데와 만도가 자판기 사업에 뛰어들면서 자판기 시장은 순식간에 공급 초과로 바뀌었다.

박 회장은 이때 자판기 사업을 과감히 처분했다. 박 회장은 “위기 땐 경쟁력 없는 사업을 과감하고 빠르게 처분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것을 중단시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판기 사업 매각은 두산이 재계 최초로 외환위기가 오기 전인 90년대 중반에 구조조정을 벌이는 단초가 됐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90년대 중반 두산이 벌인 비주력 사업 매각은 지금도 구조조정의 모범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두산은 당시 효자 사업군이었던 코카콜라, 코닥, 3M, 네슬레 등 합작회사의 지분을 팔았다. 두산의 모태라 할 수 있는 OB맥주의 지분도 50% 매각했다. 박 회장은 “위기 때 의사 결정 과정에선 이익보다 현금 흐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희망사항을 토대로 짠 사업 계획과 성급한 투자는 지양해야 한다”며 “다음 투자에 대한 민첩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구조조정에 있어 누구보다 냉정한 박 회장이지만 핵심 인력 유치와 지속적인 기술 개발엔 항상 적극적이다. 박 회장은 “인재 확보나 기술 개발을 등한시 하는 긴축은 독”이라고 경계했다.

유동성을 확보한 후엔 경기 반등에 대비해야 한다. 재계에서 인수·합병(M&A) 전도사로 알려진 박 회장은 지난해에도 기업 인수를 멈추지 않았다. 미국 HTC의 지분을 인수해 원천기술을 확보했고, 노르웨이 목시(Moxy)를 사들여 대형 덤프트럭의 생산 라인을 추가했다. 내수와 해외 시장 포트폴리오를 점검한 후 신흥 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두산은 최근 두산테크팩과 두산주류를 매각하며 2조 원에 가까운 현금을 보유하게 됐다. 박 회장은 “차입금을 갚기보다는 투자에 대비해 현금을 보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불황은 기업으로 볼 때 경쟁력 확보와 성장 엔진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며 “위기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용만 회장의 위기 관리 노하우
■비용은 줄이고 유동성을 극대화하라
■비영업용 자산, 저수익 자산을 매각하라
■금싸라기 부동산도 위기 땐 독이 될 수 있다
■이익보다 현금 흐름에 초점을 맞춰라


200902호 (200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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