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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와인 

안데스 산의 청정 자연이 빚어낸 신의 선물 

최성순 와인21닷컴 대표
아르헨티나의 대표 와인산지인 멘도사 트라피체 와이너리를 둘러봤다. 해발 900~1200미터 안데스 산자락의 깨끗한 자연이 만들어낸 말벡 와인은 풍부한 맛과 향을 자랑한다.

▎와인 오브 아르헨티나(WINES OF ARGENTINA) 제공
남미로 와인 여행을 떠나게 되면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함께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구촌 정 반대편에 위치한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전체 여정이 약 35시간 정도 소요된다. 왕복으로 계산하면 3일을 꼬박 이동하는 데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큰 맘먹고 가게 되는 게 남미 여행이라 인접국인 두 나라의 와인 산지을 돌아봐야만 본전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두 나라는 모두 16세기경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포도밭을 형성했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칠레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와인 양조 산업화를 시작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와인 시장에 알리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1990년대 후반에 첫 선을 보였고, 2000년대 초반부터 급성장을 이루었다. 아르헨티나 와인은 그보다 훨씬 늦은 2000년대 중반부터 국내 와인 애호가들에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를 가려면 안데스 산을 넘어야 하며 비행기로 50분 정도 걸린다. 아르헨티나는 안데스 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칠레는 서쪽 태평양 해안 쪽으로 길쭉하게 위치하고 있다. 이들의 와인 스타일과 문화를 살펴보면 얼핏 비슷한 듯 하면서도 사뭇 다르다.

일상 속에 와인이 녹아 있는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에는 총 22만6000헥타르의 포도밭과 약 3만 개의 포도 재배지, 그리고 1000여 개의 와인 양조장이 산재해 있다.
이 두 나라의 와인산업을 비교해보면 상당히 대립적인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칠레는 전체 와인 생산량의 90% 이상을 해외에 수출하고 있는 반면 아르헨티나는 90% 이상이 자국에서 소비된다. 칠레의 와인산지와 양조장을 둘러보면 매우 체계적이고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방문객을 위한 시설과 프로그램, 자료도 풍부하고 그 내용도 훌륭하다. 일하는 사람들도 시간을 따지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매사가 진지하다. 반면 일상 속에 와인이 녹아 있는 아르헨티나의 경우에는 “와인이 맛있어요”가 전부다. 행동이 느릿느릿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아르헨티나인들은 “와인이 맛있다”는 말 이외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묵직하고도 진한 맛의 칠레산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에 한창 매료되어 있었던 2000년대 중반 당시, 비슷한 가격대의 ‘더욱 묵직하고 힘센 와인 스타일’을 잘 표현한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말벡(Malbec) 품종을 사용한 레드 와인들이 국내에 대거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당시 반응은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칠레 와인 덕분에 아르헨티나 와인은 특별한 마케팅이나 전략도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소개된 셈이다. 단순히 맛으로만 승부를 건 이들의 전략 아닌 전략이 먹혔는지도 모르겠다.


▎멘도사 와이너리에서 만난 농부. 아르헨티나인들은 행동이 느릿느릿하고 낙천적이다.
아르헨티나의 대표 와인산지인 멘도사의 몇몇 와이너리들을 돌아보면서 필자는 아르헨티나 와인에 대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1990년대 이후부터 초고속 성장을 해왔던 칠레에 비해 아르헨티나의 와인산업은 꽤 느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와인 생산규모를 자랑한다.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총 22만6000헥타르의 포도밭과 약 3만 개의 포도 재배지, 그리고 1000여 개의 와인 양조장이 산재해 있다.

흔히 아르헨티나 와인이라 하면 ‘풍부한 타닌과 조밀한 구조감을 지니고 있는 묵직한 스타일의 말벡’이 연상된다. 사실 말벡 이외의 와인들은 잘 생각이 나지도 않을 정도로 아르헨티나는 말벡으로 만든 레드 와인이 유명하다. 그 외에도 까베르네 소비뇽, 시라(Syrah), 템프라니오(Tempranillo)와 같은 레드 품종들이 생산되지만 말벡의 인기에 가려진 듯한 느낌이다. 또 토론테스(Torrontes), 샤도네(Chardonnay),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등 매우 다양한 종류의 화이트 품종들이 생산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멘도사를 방문하게 되면 자연스레 와인투어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볼거리가 많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달리 산악지대인 멘도사는 도심을 제외하고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와인투어가 좋은 관광수단이 된다. 8월이 한겨울인 아르헨티나의 건조한 기후와 함께 바람이 불면 가벼운 모래바람이 심하게 날리는 메마른 토양은 관광객들에게 황량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이 포도나무에는 꽤 좋은 환경이 되는 것이다. 해발 900~1200미터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강수량도 적기 때문에 포도나무는 땅속 깊숙이 물을 찾아 뿌리를 내린다. 청정지역인 안데스 산의 깨끗한 물을 흡수하면서 포도알이 무르익게 되는 것이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는 데도 차를 타고 한 시간씩 가야 할 정도로 광대하다. 창밖에는 안데스 산자락의 광활한 자연 속에서 가끔씩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말이나 소들이 반복적으로 보일 뿐이다. 눈으로 만나는 사람 수보다 소들이 훨씬 많게 느껴질 정도다. 3일간 체류하면서 접한 주 메뉴는 점심이든 저녁이든 소고기 스테이크가 대부분이었다. 매 끼니마다 “또 스테이크야?”라고 한숨 섞인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러면서도 일단 한입 먹기 시작하면 접시를 거의 다 비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나라의 스테이크 요리들은 생각보다는 쉽게 질리지 않았다.

말벡과 스테이크의 환상적인 마리아주


▎스테이크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트라피체 와인.
방목하면서 풀을 먹고 자란 행복한 소의 맛이 바로 이런 것인가. 이곳의 쇠고기는 마블링이 거의 없다. 살살 녹는 듯한 기름지고 유연한 우리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고기 스타일과는 전혀 다르다. 특별한 양념도 없이 그냥 고기 자체를 즐길 뿐이다. 탱글탱글한 고기는 질감과 탄력성이 뛰어났고, 기름지지 않은 육즙은 살아있는 듯 신선했으며 비리거나 느끼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자연적이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말벡 한 모금으로 개운하게 입안을 마무리하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말벡 특유의 구수한 향기와 묵직하면서도 입안을 꽉 채우는 듯한 부드러움이 스테이크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말벡 또한 이들의 자연적이면서도 심플한 음식 스타일과 꽤 닮았다는 느낌이다.

보랏빛이 감도는 짙은 적색의 말벡은 원래 프랑스에서 보르도 와인을 블렌딩할 때 사용된 품종이다. 보르도의 주연급 품종인 까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와 함께 블렌딩되는데 매우 적은 양이거나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조연급 품종이다. 타닌이 강렬해 단일 품종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인기 없는 품종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로 건너가면서 말벡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주연급 와인을 만드는 품종으로 둔갑했다. 100% 말벡만을 이용한 최고의 와인을 탄생시킨 것이다. 프랑스와 달리 아르헨티나에서 생산되는 말벡은 훌륭한 보디감과 더불어 부드러운 질감을 선사한다. 오크 숙성을 함으로써 구수한 향미가 일품이며 신맛이 강하지 않아 남성들이 특히 좋아한다. 장기간 숙성이 가능한 잠재력까지 보여주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멘도사 와인투어의 대표적인 관광코스로는 트라피체(Trapiche) 와이너리 방문을 손꼽는다. 1883년에 설립된 이 와이너리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와이너리에서는 다양한 스타일의 70여 가지 와인들이 생산된다. 총 2000헥타르의 면적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는데 절반은 자체 소유이고 나머지는 협력체제 하에 있는 포도밭으로부터 포도를 구매하게 된다. 그 수만 해도 약 100개 정도가 된다. 미국의 투자로 성장해왔던 트라피체는 4~5년 전부터 가족 소유의 회사로 돌아서면서 좀 더 섬세하고 유연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와인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가장 처음으로 선보인 것도 바로 트라피체의 말벡이었다. 지금도 전체 아르헨티나 와인 수입량의 절반에 가까운 양이 트라피체의 와인일 정도로 규모가 가장 크다. 필자는 이 와인에 놀라울 정도의 다양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아르헨티나의 와인은 가격에 있어서 여전히 경쟁력이 높다. 판매 목적보다는 본인들이 마시고자 와인을 만들기에 와인 자체가 갖는 가격 대비 품질의 우수성과 맛은 충분히 증명된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어느 와인 상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 와인은 설명이 필요 없어요. 그냥 한번 맛보세요!”

- 최성순 와인21닷컴 대표

201512호 (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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