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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3) 헨리 포드 

혁신으로 거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경영학의 교과서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헨리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를 활용한 연속 조립 생산방식을 도입한 ‘포드 시스템’을 개발해 인류에게 마이카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물론 인류의 소비 형태를 송두리째 바꾼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중산층이 자신의 자동차로 여행하는 ‘마이카 시대’, ‘대량생산의 시대’라는 두 시대의 문을 연 주인공이 바로 헨리 포드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1863~1947)는 혁신으로 거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다. 포드는 자동차의 발명가도 아니고, 조립라인의 창안자도 아니다. 다만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를 비즈니스에 적용해 사업을 일궜다.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안을 비즈니스에 과감하게 적용해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이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미리 꿰뚫어 보는 수준을 넘어 아예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중산층이 자신의 자동차로 여행하는 ‘마이카 시대’, ‘대량생산의 시대’라는 두 시대의 문을 연 주인공이 바로 포드다.

포드는 꿈꾸는 비즈니스맨으로 통한다.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인류가 라이프 스타일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꿈이다. 구체적으로는 정원 딸린 집에서 마이카를 굴리며 사는 중산층의 인간적인 욕구다. 그는 이런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새로운 자동차를 개발하고 이를 중산층이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에 대량 공급할 수 있도록 생산방식을 혁신했다. 그 결과 자동차라는 신기술 산업은 엄청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바꿔놓았다. 이를 통해 자동차 산업과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고 키웠다. 이는 20세기 산업과 경제·생활의 지형도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역할을 했다.

그가 도입한 대량생산 기술은 이 꿈을 가능하게 해준 도구였다. 이 도구 덕분에 자동차는 부자들이나 고위층이나 타고 다니는 초고가의 상품에서 중산층 정도면 장만해 생활의 이기로 활용할 수 있는 ‘접근 가능한 실용 상품’이 됐다. 아울러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대량생산이라는 혁신적인 방식은 인류에게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시대를 열게 됐다. 20세기 이후의 삶은 포드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포드는 부자다. <리치스트>라는 잡지에서 그는 인류 역사상 9위의 부자에 올랐다. 그의 재산은 지금 시가로 따져 1990억 달러에 이른다. 지난 3월 포브스의 세계 부자 순위에서 총재산 750억 달러로 1위에 오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의 2배를 넘는 액수다. 그는 혁신을 통해 이런 재산을 모았다. 자신의 성을 단 포드 자동차를 창업하고 혁신을 이룬 덕분에 그는 미국 최고의 부자 중 한명이 됐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됐으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자동차 왕’도 첫 창업은 실패


▎T1모델은 19년 동안 1500만7034대를 생산하고 1927년 생산을 종료했다. 이 기록은 이후 45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포드는 1863년 미국 미시간주 그린필드 타운십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 1세였으며 어머니는 벨기에 이민 2세였다. 3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포드는 10대 때 부모를 잃고 이웃에 입양돼 자랐다. 어려서부터 호기심과 기계적인 재능, 그리고 집념을 보였고, 15세가 되었을 때는 동네 사람의 시계를 고쳐주는 수리공으로 이름을 얻었다.

1879년 포드는 자신이 태어난 농가를 떠나 디트로이트에서 기계 견습공으로, 웨스팅하우스에 증기기관 엔진 수리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계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그는 나중에 디트로이트에 있는 실업학교를 다녔다. 경력을 쌓은 포드는 1891년 에디슨 일루미네이팅사의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1893년 수석엔지니어로 승진한 뒤부터는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중산층 엔지니어의 안락한 삶을 사는 대신에 남는 시간과 돈을 공학 실험에 투자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개발이 한창이던 가솔린 엔진을 개인적으로 시험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실험 데이터를 꾸준히 축적했으며 그 결과 1896년 이를 바탕으로 포드 쿼더리사이클이라는 이름의 자동차를 개발할 수 있었다. 포드는 이 자동차의 주행시험을 꾸준히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는 브레인 스토밍 방식으로 성능 개량 작업을 진행했다. 포드는 젊어서부터 남의 말을 경청했으며 이는 평생의 습관이 됐다.

1896년 포드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을 만나 자신이 개발한 자동차에 대한 칭찬을 들었다. 이에 고무된 포드는 새로운 자동차를 디자인했고, 1899년에는 창업에 나섰다. 그해 8월 5일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차리고 생산에 나섰지만 낮은 품질에 비싼 가격의 자동차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 왕’ 포드가 난생 처음 창업한 이 자동차 회사는 1901년 1월 파산했다. 포드의 첫 창업은 실패였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창업을 모색한 포드는 해럴드 윌리스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아 1901년 10월 29마력 엔진을 장착한 새 자동차 모델을 제작했다. 다행히 이 자동차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창업에서 실패가 허물이 아닌 경력이 되는 ‘재기 시스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서 번 돈을 바탕으로 머피를 비롯한 다른 주주들은 1901년 11월30일 ‘헨리 포드 자동차’를 새롭게 창업했다. 자신의 이름을 단 포드자동차에서 포드는 수석 엔지지어를 맡았다. 엔지니어 중심의 기술 경영의 시동을 건 셈이다. 1902년 머피는 헨리 를랜드를 컨설턴트로 고용했으며 이에 반발한 포드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회사를 떠났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속설을 입증한 셈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포드가 떠나자 머피는 회사 이름을 캐딜락 자동차로 바꿨다.

레이싱 자전거 선수였던 탐 쿠퍼와 팀을 이룬 포드는 80마력 이상의 출력을 자랑하는 ‘999’ 모델을 개발했고, 이 차는 1902년 10월 자동차 경주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이에 용기를 얻은 포드는 디트로이트 지역의 석탄 딜러인 알렉산더 말콤슨의 지원을 얻어 ‘포드&말콤슨’사를 창업했다. 포드의 3차 창업이다. 포드는 자신의 꿈대로 비싸지 않아 중산층도 장만할 수 있는 대중적인 자동차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공장도 임대하고 기계공인 닷지 형제에게 부품도 주문했다. 말콤슨은 투자자를 투자로 모집했으며 닷지 형제에게 자동차 회사의 지분을 받고 부품을 공급해줄 것을 설득했다. 포드&말콤슨사는 1903년 ‘포드 자동차’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회사의 첫 자본금은 2만8000달러였다. 초기 투자가는 포드 자신과 말콤슨, 그리고 부품 공급자인 닷지 형제, 그리고 말콤슨의 삼촌, 비서, 자신의 변호사 2명이 포함됐다. 그야말로 주변의 자본을 그러모아 만든 기업이었다.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를 기술로 승부를 겨뤘다. 기술의 포드임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속도였다.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를 세인트 클레어 호수의 얼음 위에서 시속 146.9㎞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속도로 달리게 해 회사를 널리 홍보했다. 그 뒤 자동차 경주 드라이버를 미국 전역에 보내 자신의 자동차를 홍보하게 했다.

이런 포드에게 전기가 찾아온 게 1908년 10월1일이었다. 지금은 전설이 된 T1 모델을 공개한 날이다. 지금은 일반화된, 핸들이 왼쪽에 달리고,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모두 내장형으로 장착해 외부에선 보이지 않게 한 모델이었다. 포드는 이 자동차에 혁신을 입혔다. 조작이 아주 간단했을 뿐 아니라 고장 수리도 쉽고 비용이 별로 들지 않도록 설계했다. 포드가 엔지니어였으므로 이 자동차의 공학적 설계는 곧 그의 경영 철학을 반영했다. 포드는 이 자동차를 825달러에 시장에 내놨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2만1000~2만2000 달러 정도다. 게다가 그는 매년 값을 떨어뜨렸다. 그가 대량생산을 통해 적절한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은 ‘포드 모델T’는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수송수단 분야에서 혁명을 이뤘을 뿐 아니라 미국의 산업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미국이 세계최고의 산업 생산력을 지니고 세계의 공장으로서 위력을 발휘하는 데도 한몫했다. 포드는 독자 판매망을 구축하는 대신 지역 딜러를 활용했다. 그는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국 전역에 T1이 없는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독립 딜러로서 포드의 프랜차이저 가맹주들도 엄청난 돈을 벌었으며 이를 통해 포드는 물론 자동차 드라이브를 하나의 레저로 정착시켰다. 포드는 T1을 농가에도 공급해 이 차들이 시골길을 질주하게 했다. 농부도 자동차를 몰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는 ‘기계의 시대’를 연 것이다.

대량생산한 T1으로 자동차 역사 새로 쓰다


▎포드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모은 재산의 대부분을 ‘포드 재단’에 기부했다. 사진은 포드 재단 건물.
효율 증대와 비용 감축이 경영의 요체임을 간파한 포드는 1913년 그 유명한 이동 조립벨트를 이용한 생산 라인을 도입했다. 이는 생산량을 급속히 증가시키는 효과를 냈다. 지금까지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조립라인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 콘셉트와 개발은 클래런스 애버리, 피터 마틴, 찰스 소렌슨, 해럴드 윌스로 이뤄진 직원들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포드는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생산과 경영 현장에서 활용했을 뿐이다.

이 혁신적인 조립라인에 힘입어 포드 자동차의 생산은 1914년 25만 대에 이르렀으며 생산 대수가 늘수록 가격은 더욱 떨어졌다. 1918년에는 미국을 달리는 모든 자동차의 절반이 모델 T로 채워졌다. 포드는 T1 모델을 검은색으로만 출시했다. 검은 색으로 출시하면 차주가 차 색깔을 다른 색으로 바꿔 칠할 때 편이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검은색 페인트는 다른 색깔보다 일찍 말라 출시까지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점도 그가 검은색만 고집한 이유였다. 포드는 이후 빨간색 라인을 추가했다. T1모델은 19년 동안 1500만7034대를 생산하고 1927년 생산을 종료했다. 이 기록은 이후 45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포드는 1918년 포드자동차의 회장직을 아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회사의 경영적인 주요 결정의 최종적인 결정자로 남았다. 1927년 포드사는 새로운 모델 A를 출시했는데 이 역시 대성공을 거뒀다. 이 모델은 1931년까지 400만 대를 생산하고 퇴역했다. 그 다음부터 포드사는 현재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가 하고 있듯이 매년 모델을 바꾸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방식은 경쟁사인 GM이 도입한 것을 포드가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1930년대에는 소비자에게 자동차 구입비를 대출해주는 유니버설 신용사를 설립해 주요 자동차 금융사로 떠올랐다. 포드가 하는 모든 경영 활동은 현대 자동차 산업의 기본이 됐다.

포드는 사업이 순탄 가도를 달리는 중에도 경영혁신으로 생산 단가를 체계적으로 낮추기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했다. 비용을 절감해야 기술과 비즈니스 혁신을 계속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는 것이 신념이었다. 그는 딜러를 활용한 프랜차이즈 영업망이라는 판매 방식도 개발했다. 별도의 비용을 들여 독자적인 영업망을 구축하는 대신에 그 비용을 딜러에게 지급해 자발적으로 영업에 충실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이런 딜러 시스템을 북미 대륙은 물론 전 세계 판매망에 도입했다. 이 역시 지금까지 글로벌 스탠더드다.

사회와 후손 모두를 위한 재단 설립

포드는 ‘복지 자본주의’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다. 비용을 절감해서 얻은 돈을 직원들에게 충분한 급여를 지불하는 재원으로 삼았다.

포드는 1914년 일당 5달러(현재 가치 120달러)라는 놀라운 고임금제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직원들이 받던 일당을 2.34달러에서 두 배 이상으로 올렸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하루 60달러 수준인 임금을 240달러로 올린 셈이다. 포드는 임금을 높이면 직원들이 안정적인 환경 속에 장기 근무를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채용 비용을 절감하고 직원들은 복지를 누리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당시 일부 매체에서 고임금이 산업계에 먹구름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임금을 높이면서 오히려 이익이 늘어난 것이다. 포드의 역발상이 근로자와 사용주 모두에게 윈윈을 가져온 셈이다. 이런 활동에서 보여준 포드의 경영사상은 기업을 하나의 사회 봉사기관으로 보는 피터 드러커의 경영 철학에 바탕을 제공했다.

최고의 직원을 뽑아 충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장기 근속하게 하면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직원채용이 절감된다. 게다가 대우가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나면 인근 지역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엔지니어들이 몰려들게 된다. 인재와 전문가를 충분히 확보한 있는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분 아니라 교육훈련 비용도 아낄 수 있다.

디트로이트는 이미 고임금 도시였는데 포드의 조치로 임금을 따라서 올리든지 숙련공을 잃든지 양자 택일을 하게 됐다. 고임금을 받게 된 포드 자동차 직원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자동차를 구입해 타고다닐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누리게 했다. 회사로서는 더 이익이 됐다. 이를 통해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됐다. 일종의 이익 공유라는 입장에서 임금을 높여주면 근로자들은 최고의 생산성과 훌륭한 직장 문화로 화답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아이디어 역시 포드가 스스로 낸 것이 아니었다. 말콤슨의 비서인 커즌이 제안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최고의 경영자이자 혁신가인 포드의 가장 큰 미덕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었다. 포드를 경영학의 교과서라고 하는 이유다.

그가 기업 경영 분야에서 남긴 족적은 ‘포드주의’로 불리는 산업 혁신, 경영 혁신의 기법으로 경영학 교과서에 올라 있다. 포드주의는 대량생산을 통해 제품 가격을 낮춰 시장을 확대하면서 직원들에게는 임금 단가를 높여주는 것으로 요약된다. 포드주의의 경영원리는 크게 4가지다. 미래에 대한 공포와 과거에 대한 존경을 버리고, 경쟁을 위주로 일하지 말며, 봉사가 이윤에 선행해야 하고, 값싸게 제조해 저렴하게 팔 것 등이다. 이와 함게 경영 합리화를 위해 제품의 표준화, 부품의 단순화, 작업의 전문화라는 3S운동을 펼쳤다. 이는 지금도 경영의 기본 원리다.

포드는 이른 혁신적인 기업 활동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세상을 변화시킨 대가를 생전에 받은 것이다. 그는 그 재산을 후손과 사회 모두를 위해 사용했다.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모은 재산의 대부분을 ‘포드 재단’에 기부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후손들이 포드 자동차를 영원히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포드는 기업인으로선 독특하게 제1차 세계대전 중 반전평화주의를 부르짖었다. 전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추가로 축적하는 대신 인류의 평화를 앞세웠다. 그는 전쟁 대신 전세계가 글로벌 기업의 상품을 공유함으로써 전쟁을 할 이유를 원천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소비자주의가 글로벌 평화를 위한 핵심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돈을 버는 방법도,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데도, 돈을 물려주는 데도 선각자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채인택 - 채인택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606호 (201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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