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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한 미국의 여성 부호’ 57위 | 토니 코 인터뷰 

“내가 잘 아는 일을 해야 성공합니다” 

임채연 기자
대구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198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99년 25세에 1인 창업가로 색조 화장품 회사 ‘닉스 코스메틱스(NYX Cosmetics)’를 세웠다. 직원 250명 규모의 회사로 성장시킨 뒤 2014년 세계 최대 화장품 회사인 로레알에 5억 달러에 매각하며 부자 대열에 입성했다.

▎닉스의 큰 성공으로 2억6000만 달러의 부를 일궜지만 토니는 또 다시 창업에 나섰다. 일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
토니 코(고미영·43)의 이야기는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이다. 성공 비결을 직접 듣고싶어 로스엔젤레스(LA)에 사는 토니와 전화로 만나기로 했다. 약속시간은 한국 시간 6월 10일 오전 9시. (시차를 잘못 계산한 기자는 11일 오전 9시인줄 알았다.) 휴대폰 시계가 9시 10분으로 바뀌자 전화가 울렸다. 토니였다. 이동 중이던 기자가 일정을 조정해줄 수 있냐고 묻자 3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Okay, cool.” 목소리는 무척 쾌활했다. 이후 몇 차례 시간을 변경한 뒤 12일 전화 통화에 성공했다. 몇 마디를 영어로 나눈 뒤 그는 한국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프리틴(preteen·10~12세)이라고 하죠? 제가 미국에 갔을 때가 딱 그 정도 나이에요. 국민학교 마치고 바로 갔으니까. 아, 지금은 국민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라고 하죠? 저 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어요.” 한국 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토니는 자신이 미국에 갔을 때만 해도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고 털어놨다. “물론 하이, 헬로우, 예스, 노우 같은 기본적인 영어는 가능했죠. 아주 어릴 때는 스펀지처럼 언어와 문화를 흡수해요. 성인이 됐을 때는 언어를 내가 아는 단어나 문장으로 기술적으로 통역(translation)하면 되니까 차라리 더 수월하죠. 저같은 경우는 프리틴에 미국에 갔는데 이중고(double whammy)를 겪은 셈이죠.”

어머니 몰래 학교에서 화장하던 소녀

자연히 어린 시절 얘기로 옮겨갔다. 그는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대 시절 토니는 어머니 몰래 학교에서 화장을 하며, 백화점에서 파는 값비싼 화장품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주말과 방학마다 그는 LA다운타운에서 향수·화장품 도매업을 하는 어머니 고상미 씨를 도우며 ‘내 사업’ 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학창 시절 어머니께서 화장을 못 하게 하셔서, 책가방에 비누와 화장품을 늘 챙겨가곤 했어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립스틱을 바르고 아이라이너로 눈꼬리를 그렸지요. 집에 돌아가기 전 비누로 얼굴을 씻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점심 사 먹을 돈을 아껴서 립스틱 하나를 겨우 장만했죠.”

샤넬·랑콤 같은 화려한 화장품을 살 형편이 안돼 늘 드러그스토어(대형 상점)에서 저렴한 화장품을 샀지만 만족도는 크게 떨어졌다. “빨간색 립스틱은 밝고 생기있는 톤이 아니었고, 파란색 아이섀도는 발랐을 때 원하는 색이 나오질 않고, 애매한 초록빛이 났어요.” 이런 경험은 ‘샤넬 수준의 품질을 가진 드러그스토어 제품을 직접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후 다양한 시장 분석 끝에 고품질 화장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파는 틈새시장을 발견했지만, 다시 언어가 큰 장벽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사업을 하면서는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어에 한계도 느꼈죠. 언어는 문화에요. 미국에 갔지만 한국 드라마 보고, 한국 책을 보고, 한국 음식을 먹었어요. 몸은 미국에 있지만 한국 문화에 젖어 있었죠. 그런데 비즈니스를 하려면 일단 미국 사람이랑 친해져야 하거든요. 저는 그 선을 못넘었던 거죠. 몇 마디 하다보면 할 얘기가 없는거에요. 그래서 완전히 제 사는 방식을 바꿨어요.”

그 뒤로 한국 드라마 시청을 중단하고 밤마다 어릴 때 읽던 영어 동화책을 사서 큰 소리로 읽으며 발음 교정에 나섰다. 미국인들과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특유의 딱딱하고 뻣뻣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며 ‘긴장하지 않는(relax)’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웃는 표정”도 긴장을 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토니 코는 글린데일 커뮤니티 칼리지를 중퇴하고 1999년 25세의 나이에 부모에게 빌린 25만 달러로 본격적인 사업에 나섰다. LA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가 바로 닉스 코스메틱스(닉스)다. 닉스가 처음 판매한 상품은 아이라이너와 립 펜슬로 개당 가격은 1.99달러였다. 당시 인기를 끌던 미국 색조화장품 브랜드 어반디케이(Urban Decay) 제품의 5분의 1 가격이었지만, 품질이 좋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출시 첫해 4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TV 광고 없어도 소비자끼리 제품 홍보해

2000년대 초반 닉스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색조화장품 브랜드 가운데 한 곳으로 자리잡았다. TV 광고 외에는 소비자에게 제품을 알릴 방법이 전무했던 과거와 다르게, 다양한 홍보 채널이 생긴 덕분이다. 닉스는 막강한 소셜 미디어 영향력을 자랑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등 다양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제품을 노출해 광고 혹은 마케팅에 쓸 돈을 제품의 퀄리티에 투자했다. 값싸고 질 좋은 닉스 제품은 많은 뷰티 블로거, 유튜버 등이 소개하며 소비자의 눈길을 끌게 됐다. 미국의 대표적인 뷰티전문 매장인 ‘세포라’와 ‘얼타 뷰티’ 매장 수백 곳에도 입점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백화점 고객들이 드러그스토어의 화장품 제품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닉스 역시 매출이 크게 늘었다. 대기업 로레알에 인수된 2014년 당시 닉스의 매출은 1억2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닉스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는 160만 명. 로레알보다 300배 많은 수치였다.

회사를 로레알에 넘길 때만 해도 그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해변에서 칵테일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팔기까지의 과정이 재밌었지 막상 팔고나니 허무하고 슬픈 기분이 더 강하더라고요. 나를 더 열심히 살게하고 삶에 가치를 더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그는 다음 사업 아이템을 고민했고, 곧 선글라스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서 선택했습니다. 먹는 걸 하자니 제가 하던 업종과는 많이 달랐고, 신발이나 옷을 팔자니 사이즈가 너무 많았죠. 한 가지 사이즈로 판매할 수 있는 걸 찾아보니 선글라스가 남더라구요. 제가 원래 선글라스 마니아였거든요.” 토니는 선글라스 100여 개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모두 소수의 유명 브랜드의 제품으로 개당 가격은 300달러가 넘었다. 100여 개의 제품은 모두 검은색 계열의 색상이었고 디자인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는 닉스 코스메틱스처럼 고품질의 선글라스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기로 하고, 올 3월 LA에서 선글라스 회사 ‘퍼버스’(Perverse Sunglasses)를 창업했다. 다양한 색깔의 선글라스를 40~60달러에 출시했다. 토니 코는 퍼버스 제품에 대해 “품질은 150달러짜리 선글라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한다.

닉스의 큰 성공으로 2억6000만 달러의 부를 일궜지만 토니는 또 다시 창업에 나섰다. 일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 “잘 아는 일을 해야 성공합니다. 100% 아는 걸로는 모자라고 1000% 알아야 합니다. 전 여자이고 화장품 소비자이며 화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한테 왜 이렇게 화장을 진하게 하냐고 물어요. 저는 되묻죠. ‘내가 화장품을 파는 사람인데, 내가 안하면 누가 화장을 하겠느냐?’라고요. 돈을 벌기 위해 비즈니스에 뛰어들려는 사람은 말리고 싶어요. 즐겨야 성공합니다.”

- 임채연 기자




201607호 (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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