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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홀릭’ 재계 3세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보다 벤처 생태계 만드는 게 중요”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이른바 ‘금수저’로 태어난 재계 3세들 가운데 그룹의 요직을 마다하고 벤처기업 육성과 사회적 기업 후원에 나선 이들이 있다. 이들은 왜 벤처에 빠졌을까. 재벌이라는 꼬리표에 대한 속내와 그간의 성과, 벤처업계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알아봤다.

지난 5월 초,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기업이 영국의 고급 스피커업체 바우워스 앤드 윌킨스(B&W)를 인수해 화제가 됐다. B&W는 뱅앤올룹슨(B&O)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최고급 사양의 오디오 브랜드다. 이 회사의 노틸러스 시리즈는 7000만원에 달한다. 직원 수는 1100여 명, 기업가치는 3억 달러 정도로 알려졌다. 50년 전통의 명품기업을 인수한 벤처기업은 기디언 유(유기돈) 회장이 2014년에 설립한 음성인식 시스템 개발업체 에바오토메이션이다. 직원 50명의 작은 회사다. 유 회장은 유튜브·페이스북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으로 20년 가까이 실리콘밸리벤처업계에 몸담았다. 이번 인수자금을 대부분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사 포메이션그룹이 부담할 것으로 알려져 또 한번 눈길을 끌었다. 포메이션 그룹은 에바오토메이션의 투자사다.

포메이션그룹은 구본웅 씨가 2011년 실리콘밸리 팔로알토에 설립한 회사다. 그는 구자홍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한 구 대표는 팰런티어 테크놀로지의 창업자 조 론스데일, GE 출신의 벤처기업가 짐 김 등과 함께 포메이션8(현 포메이션그룹)을 세웠다. 이 회사는 1250만 달러(약 147억 원)를 투자한 가상현실(VR) 기기 업체 오큘러스VR이 2014년 페이스북에 매각되면서 투자금의 10배를 벌어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11월 중국 정치가 쑨원의 증손자인 조엘 선을 투자 파트너로 영입해 포메이션 그룹으로 회사명을 바꾸며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후 한국의 벤처기업 옐로모바일에 1억5000만 달러를 투자하는 등 아시아의 유망 스타트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구 대표는 창업한 이듬해 단일 펀드로는 꽤 큰 규모인 4억4800만 달러(약 4500억원)의 자금을 유치하는 등 일찌감치 실리콘밸리 투자업계에 이름을 알렸다.

실리콘밸리 투자업계 평정한 ‘LS가’장손


구 대표 외에도 벤처업계에서 활약하는 재계 3세들이 있어 눈에 띈다. 이들은 직접 창업하기보다 주로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소셜 벤처(사회적 기업)계에서 유명한 루트임팩트는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혁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체인지 메이커’들을 발굴·육성하고 이들 사이의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2012년 정경선 대표가 설립했다. 정 대표는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장남이다. 정 대표는 2014년 11월 서울 성수동 서울숲 주변에 루트임팩트 본사를 내고 ‘서울숲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공장 지대였던 곳에 비영리 단체와 소상공인들을 모아 지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작업이다. 루트임팩트는 무인 도서관 ‘이노베이터스 라이브러리’와 커뮤니티 공간 ‘디웰 살롱’, 창업가들을 위한 쉐어하우스 ‘디웰하우스’등을 운영한다. 1년 반 만에 20여 개의 소셜 벤처가 이곳을 메워 ‘성수동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정 대표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2014년 사회적 부동산, 커뮤니티 회사인 HGI를 설립해 본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정 대표와 사촌 지간인 정남이 마루180 팀장은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녀다. 정 팀장은 미국에서 남가주대학교 음악대학,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에서 근무하다 2013년 아산나눔 재단에 입사했다. 정 팀장은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창업지원공간 마루180의 개관 업무에 참여해 현재 이곳의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 2014년 서울 역삼동에 문을 연 마루180은 지난 4월 2년 동안 입주 스타트업 86개사에 1920억원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플리토(번역 플랫폼)·드라마앤컴퍼니(명함관리 앱)· 피스컬노트(법률 분석 플랫폼) 등 마루180에 입주한 스타트업들은 같은 기간 740여 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하고 213명의 고용효과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마루180에서는 스타트업 관련 세미나와 네트워킹 행사도 자주 열린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차남인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 역시 벤처업계 유명인사다. 김 상무는 2014년 한화그룹 디지털팀장으로 입사해 그룹 내 스타트업 투자·육성업체인 ‘드림플러스’ 운영에 참여했다. 드림플러스는 한화그룹의 정보기술(IT)서비스 계열사인 한화S&C가 2013년 사업을 시작했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와 연합을 맺어 스타트업들의 해외 진출을 돕고 있다. 올해 6월 기준 국내외 25개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김 상무가 지난해 한화생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현재 드림 플러스에 정식 직책은 없지만 수시로 사업 내용을 묻는 등 애착을 보인다고 한다. 한화생명 관계자는 “김 상무는 한화생명이 진출한 동남아·중국·베트남 등지의 정부·기업·투자자들 사이에서 중간 다리 역할을 하려고 한다”며 “최근에는 핀테크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액셀러레이터 데모데이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의 동생 이재환씨는 문화콘텐트 벤처투자사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J오너 일가가 100% 지분을 보유한 이 회사는 영화 지난해 ‘명량’과 ‘국제시장’에 투자해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1세대 창업주와 외국 생활에서 영향 받아


이들이 벤처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구 대표는 과거 포브스코리아와 인터뷰에서 “스탠퍼드대 첫 학기에 토론수업에서 창의성을 우선시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충격을 받은 뒤로 앞으로 엔지니어가 리더가 되는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고 벤처 투자자로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직접 벤처를 창업하면 최고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투자사를 설립하기로 한 것. 미국 세인트폴 고등학교와 예일대 동아시학과를 졸업한 김 상무 역시 외국에서 생활하며 벤처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한화그룹의 고위관계자는 “미국·유럽의 체계적인 벤처 투자 시스템을 보고 한국이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한 것 같다”며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했을 때도 미국·유럽의 액셀러레이터를 많이 만났다”고 전했다.

정 대표와 정 팀장은 할아버지인 정주영 고 현대그룹 창업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정 대표는 미국 석유 재벌 록펠러가문에서 운영하는 록펠러재단의 이사도 맡고 있다. 록펠러 가문은 내부에 ‘플란트로피(자선·Philanthropy) 고문(Advisor)’을 따로 두고 자손들에게 사회공헌의 중요성과 방법을 철저히 교육한다.

정 팀장은 “할아버지는 기업가이자 1970년대에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한 사회혁신가이기도 하다”며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역경을 뚫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창업가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마루180 출신 스타트업 대표들이 ‘훗날 성공해서 제2, 제3의 마루180을 설립해 후배들을 돕고 싶다는 말을 할 때 가장 뿌듯하다”는 말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재계 3세라는 타이틀을 부담스러워했다. 유일하게 정 팀장이 간단한 서면 질의에 응했을 뿐 다른 이들은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로 주목 받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했다.

“‘평범하지 않은 배경’은 선물이자 숙제”


구 대표는 과거 인터뷰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 ‘집안에서 다 도와준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무척 씁쓸했다”며 “내 ‘평범하지 않은 배경’은 선물이자 숙제”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성수동 클러스터를 조성할 당시 이 지역에 자리잡는 소셜 벤처들에게 보증금이나 인테리어 비용을 지원했다. 루트임팩트가 벌이는 사업은 주로 현대해상이나 현대 계열사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현대해상화재보험 주식의 0.2%를 소유하고 있다. 시세로 따지면 59억원 정도다. 하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회적 기업 지원은 취미로 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늘 강조한다고.

성수동에서 정 대표와 함께 소셜 벤처 사업을 하는 도현명 임팩트스퀘어 대표는 “5년 전 학생이던 정 대표가 사회적 기업 분야 일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며 “졸업 후 공익 분야에 와서 함께 일하며 이 분야에 정말 비전을 두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도 대표는 “재계 2·3세들이 직접 벤처기업을 창업해서 경쟁하는 건 부당하다고 볼 수 있지만 사업을 지원하거나 인프라를 형성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대기업 자손들이 직접 벤처 생태계에 뛰어들어 일을 하는 것은 기업이 자금만 후원하는 것보다 훨씬 영속성이 있는 형태”라며 “한 단계 높아진 사회공헌활동(CSR)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벤처업계 생태계에 따르지 않고 대기업 스타일로 사업을 하려다 자금만 쓰고 성과를 못 내는 경우를 종종 봤다”며 보여주기 식 사업을 경계했다.

-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201608호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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