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석우의 와인 이야기(7) 

부르고뉴 와인을 만드는 철학은? 

이석우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
18세기 말부터 와인을 만들어온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 부르고뉴 최고의 도멘인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Domaine de la Romanee Conti)에서 와인메이커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나 끝내 거절한 남자. 그를 만나기 위해 떼제베를 탔다.

▎필립이 대형 스포이드를 이용해서 배럴 와인을 따라주었다. / 이석우 제공
넉 달 전에 발생한 파리 테러의 공포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일까? 3월 말의 파리는 뱀눈처럼 싸늘했다. 정오 무렵 파리 리옹역(Gare de Lyon)에서 고속열차 떼제베를 타고 동쪽으로 한시간 반을 달리자, 부르고뉴 지역의 최북단인 디종(Dijon)에 도착했다. 디종역 건물을 나서니, 파리의 긴장된 도회적 분위기는 오간데 없고, 대신 두 박자 정도 느린 템포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행인들의 느린 발걸음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역 앞 택시 승차장으로 짐을 끌고 걸어갔다. “본(Beaune)까지 데려다 주시겠어요?” 5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점퍼 차림의 기사가 담뱃불을 끄면서 자기 차로 안내했다. “와인 좋아해요?” “물론이죠.” 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택시 기사가 “그럼 제가 포도밭들을 잘 볼 수 있는 길로 안내할께요. 고속도로를 타면 포도밭이 잘 안 보여요.”

자기 철학이 확고하면서도 유쾌한 남자


▎올 6월경 필자가 어느 저녁식사 자리에서 마신 파칼레 와인. 2011년산 Philippe Pacalet의 지브리 샹베르땡 (Gevrey Chambertin) 마을의 프리미에 크뤼인 라보 생 쟈크(Lavaux St. Jacques)다.
신이 나서 와인에 대한 지식을 쏟아내는 택시 기사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다시 만나게 될 필립 파칼레(Philippe Pacalet)에 대해 생각했다. 재작년 여름, 그를 처음 서울에서 만났다. 그의 와인을 수입하는 회사가 자리를 마련한 와인 메이커 디너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는 18세기 말부터 와인을 만들어온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도멘 프리에르 로크(Domaine Prieure Roch)에서 10년간 양조책임자를 지낸 후, 부르고뉴 최고의 도멘인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Domaine de la Romanee Conti)에서 와인메이커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한 사람이라고 했다. 프리에르 로크의 열성팬이기도 하거니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로마네 콩티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을까?

막상 만난 그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가시덤불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갈색 꼽슬머리를 한 그를 보고서는, 192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끈 <바보 삼총사(The Three Stooges)>의 래리 생각이 나서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러나 첫 인상은 역시 믿을 것이 못 되었다. 필립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내가 만난 와인메이커들은 대략 세 가지 부류에 속했다. 거만하거나,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아니면 거만하면서 진지했다. 그러나 필립은 달랐다. 그는 자기 철학이 확고하면서도 유쾌했다. 아마도 히피(hippie)가 와인을 만든다면 그게 필립일거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필립은 한국이 다른 아시아의 시장들과는 달리, 와인에 대한 진지함과 식별력을 갖고 있어서 잠재력이 높은 시장이라고 평가했다. 매운 김치와 고추장으로 고기쌈을 맛있게 싸먹는 그를 보고서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필립은 프랑스 본에 있는 자기 와이너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고, 나 역시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화답했다. 이제 2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오후 5시쯤 그의 와이너리에 들어서자, 그는 밭일을 하고 들어온 차림으로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곧바로 지하 셀러로 안내했다. 오래된 18세기 저택의 내부를 개조해서, 1층에는 사무실과 작업공간을 만들었고, 지하는 와인저장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2014년산 와인들은 몇 주 전에 병입했고, 2015년산은 오크 배럴에서 발효중입니다.” 필립이 레이블이 붙어 있지 않은 2014년산 와인들을 몇 병 가져와 코르크를 열었다. 2014년산들은 신선하고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었다. 병 시음이 끝나자, 필립은 기다란 대형 유리 스포이드를 가져왔다. “이제 2015년산들을 배럴 시음합시다.” 필립이 배럴 윗면의 마개를 들어내고, 조심스레 스포이드를 통 속에 담궜다가, 스포이드 반대편 끝을 엄지 손가락으로 막은 후에 꺼내자, 발효 중인 2015년산 와인이 스포이드에 담겨져나왔다. 그는 스포이드에 담긴 와인을 일행의 잔에 조심스럽게 따랐다. 그렇게 마을단위 와인들부터 프리미에 크뤼를 거쳐 그랑 크뤼 와인들까지 2015년산 파칼레 와인들을 차례로 시음했다.

배럴 속에서 발효 중인 2015년산 와인들은 아직 완성된 와인들이 아니다. 효모가 당분을 알코올로 변화시키는 과정(1차 발효)과, 시큼한 사과산이 부드러운 젖산으로 바뀌는 과정(2차 발효)을 거쳐서 이듬해 병입되는 절차가 남아 있다. 미완의 와인을 시음하는 배럴 테이스팅(barrel tasting)의 목적은, 미완성 와인을 통해 완성됐을 때의 품질을 미리 예상해서 평가하기 위해서다. 확실히 2015년 파칼레의 와인들은 2014년에 비해 묵직하고 농밀했다. 2014년 와인을 시음할 때부터 와인을 뱉지 못하고 모두 삼켜버린 나는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필립은 집에 들려서 와인을 한가득 안고 와서는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인 우리 일행들 앞에 풀어 놓았다.

“파칼레의 와인에서는 프리에르 로크와 심지어 도멘 르루아(Domaine Leroy)에서 느낄 수 있는 신선한 미네랄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요?” 취기와 시차로 인해 반쯤 감겨져가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필립에게 물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야 와인을 만드는 철학이 같기 때문이죠. 떼루아가 알아서 다 하도록 내버려 두니까요.” 수능 만점을 맞은 학생이 “저는 학원에 다니지 않고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했어요”라는 투였다.

“떼루아가 다 알아서 하지요”

더 궁금해서 또 물었다. “그럼 당신은 뭘 하는가요?” 필립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저는 그저 떼루아가 와인에 드러날 수 있도록 도울 뿐입니다. 와인나무에 포도가 잘 영글도록 밭일을 하고, 포도를 수확한 다음에는 가급적 간섭하지 않고 와인이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여건을 조성하지요. 우리 도멘에서는 지금도 수확한 포도를 발로 밟아서 압착을 하는걸요.” 발로 밟아서? 압착기를 쓰지 않고? 잠시 내 귀를 의심해서 다시 물었다. “네, 저와 저의 식구들, 직원들이 발로 밟아요.”

자정 무렵까지 이어진 저녁 식사 내내 필립은 계속해서 와인을 내놓았다. 필립은 서울에서 온 일행 중 한 분이 가져온 라면까지 끓여서, 김치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매력 있는 와인은 역시 매력 있는 사람이 만드는구나. 와인에 취해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부르고뉴 밤공기가 그리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 『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201611호 (20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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