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석우의 와인 이야기(8) 

암포라에서 숙성된 와인의 매력 

이석우 중앙일보 조인스 공동대표 겸 디지털제작 전략담당
암포라(amphora)는 고대 유럽인들이 와인을 발효시키고 보관했던 토기다. 인위적인 맛과 향을 철저히 배제하고 과일 자체의 풍미나 떼루아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고수들이 암포라를 통해 새로운 양조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도멘 푸스도르의 지하셀러에 있는 암포라. 우리 일행은 암포라에서 발효된 와인이 신선하고 과일 풍미가 강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 이석우 제공
지난 3월 말, 프랑스 부르고뉴의 볼네이(Volnay) 마을에 자리한 도멘 드 라 푸스도르(Domaine de la Pousse d’Or)의 지하셀러. 몇 명의 한국인들이 잔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이제 2015년 배럴 테이스팅을 마치셨으면, 색다른 시음을 해보시죠.” 푸스도르의 마케팅 담당자는 일행을 지하셀러의 다른 편으로 안내했다. “저희 푸스도르에서는 암포라(amphora)를 사용해서 실험적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와인 배럴들이 가득한 셀러에 커다란 토기 암포라 여러 개가 눈에 들어 왔다. 고고학 서적에서 유물 사진으로만 봤던 암포라가 최신시설을 갖춘 부르고뉴의 와이너리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크 배럴의 영향 배제하려 사용


▎프레데릭 마니엥의 지하셀러에 있는 암포라. 왼쪽의 푸스도르의 것보다는 작고 둥글둥글하다.
암포라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와인 등 액체 형태의 상품을 보관하고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토기다. 몸통은 기다란 역삼각형 모양으로 아래쪽이 뽀족하며, 운반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양 옆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서기 1세기에 들어서 나무로 만든 배럴로 대체되기 전까지 고대 유럽인들은 암포라에 와인을 발효시키고 보관하였다. 고대인들이 사용한 암포라는 보통 25~30리터의 와인을 담을 수 있는 크기인데, 푸스도르에 있는 암포라는 300리터는 족히 들어갈 정도로 커보였다. 마케팅 담당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크 배럴의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 암포라를 사용해서 와인을 만들어 봤습니다. 이제 세 가지 와인을 드릴텐데요. 첫 번째는 암포라에서 발효를 시킨 와인, 두 번째는 암포라에서 발효시킨 와인과 오크 배럴에서 발효시킨 와인을 반반씩 섞은 와인,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오크 배럴에서 발효시킨 와인입니다. 세 가지를 비교시음 하시면서 차이를 느껴보시죠.”

일행들은 확실히 암포라에서 발효된 와인이 신선하고 과일 풍미가 강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미각과 후각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나는 솔직히 세 가지 와인의 차이를 잘 구분할 수 없었다. 아마도 앞서 시음한 와인들을 뱉어내지 않고 마셔버린 탓에 취기가 올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푸스도르를 나서면서, 정말로 특이한 실험을 하는 곳이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부르고뉴의 셀러에서 암포라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틀 뒤 모레이 생 드니(Morey-Saint-Denis) 마을의 프레데릭 마니엥(Frederic Magnien)을 방문했을 때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도시적인 이미지를 가진 마니엥은 2015년 빈티지의 배럴 테이스팅을 마친 후, 자신도 암포라를 사용하여 양조 실험을 하고 있다면서 셀러에 있는 암포라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마니엥의 암포라들은 앞서 봤던 푸스도르의 것보다 작고 둥글둥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암포라에 담긴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특전을 누리지는 못했다. (아마 시음을 했더라도 그 차이를 잘 느끼지 못 했을테니,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했다.) 암포라를 이용한 양조실험을 하는 곳이 내가 목격한 곳만 부르고뉴에서 두 곳이니, 부르고뉴에서만 찾아봐도 여러 군데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암포라를 이탈리아에서 수입해서 쓰고 있다고 하니, 이탈리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이 같은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헤비 메탈 아닌 현악 사중주 같은 맛

와인메이커가 암포라를 사용하여 와인을 발효하면 오크의 영향을 철저히 배제할 수 있다. 오크를 사용하면 오크 등 나무의 풍미는 물론, 바닐라, 코코넛, 초콜렛, 토스트 등 다양한 향과 맛을 와인에 주입할 수 있다. 보통은 오크를 사용하여 이처럼 다양한 풍미를 내야만이 와인이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높은 가격에 자기 와인을 판매하려는 와인메이커들은 오크의 사용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처럼 인위적인 맛과 향을 철저히 배제하고 과일 자체의 풍미나 떼루아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고수들은 암포라를 통해 새로운 양조기법을 선보일 수 있다. 오크를 배제하려면 오크 배럴 대신 스테인레스 발효조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과일의 풍미를 한껏 살려야 하는 보졸레누보나 마을단위 샤블리 와인 등은 대개 오크 배럴을 사용하지 않고 스테인레스발효조를 사용하여 만들어진다. 스테인레스 발효조 대신에 암포라를 사용하는 이유는 암포라가 갖고 있는 통기성 때문이다. 스테인레스 발효조가 발효 중인 와인이 산소와 접촉을 최소화 하도록 해주는 반면 토기로 만든 암포라는 발효 중인 와인이 공기와 접촉하는 양 자체가 상대적으로 많게 되고, 그만큼 숙성의 속도가 빨라진다. 이것이 완성된 와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순전히 와인메이커의 재량에 달렸다.

암포라의 사용은 극히 일부의 와인메이커들 사이에서 추구하고 있는 자연 친화적인 양조기법들이 서서히 중심부로 전파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와인을 만들 때 오크의 영향 등 인위적인 공정을 줄이려는 움직임의 일환이다. 일체의 화학적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와인은 이런 움직임의 시작에 불과했다. 음력과 행성들의 움직임에 따라 양조를 하는 비오디나미(biodynamie)를 거쳐, 일체의 인위적 공정을 거부하는 내추럴 와인에 이르게 되면, 고대의 양조기법인 암포라의 사용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로버트파커의 영향과 상업주의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추세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와인을 마시면 마실수록 우아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와인에 끌리게 된다. 처음 와인이란 음료에 빠져들 때만 해도, 혀를 누르는 묵직한 무게감과 진한 오크 바닐라의 느낌에 매료되었다. 마치 화려한 뮤지컬 공연이나 진한 화장을 한 이성에 끌리듯 말이다. 이제는 ACDC의 헤비 메탈이 아니라 잔잔한 브람스의 현악 사중주 같은 와인을 찾게 된다. 강하고 진한 와인이 대세인 요즘, 암포라에서 만들어진 와인이라면 잔잔한 아름다움을 선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암포라에서 숙성된 와인을 언제 한국의 와인샵에서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와인의 또 다른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 『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201612호 (2016.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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