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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생명체의 싸이클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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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병 한 병마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갖는다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거나 과거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은 1만여 가지가 넘는다. 당연히 다른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각기 다른 향과 맛을 낸다. 같은 품종이라도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서로 다르다. 일조량과 강우량 등 기후 조건이 해마다 다르고, 토양의 성분에 따라 와인 맛이 다르다. 특히 20세기 후반 양조기술의 발전 덕분에 와인 메이커가 구사할 수 있는 양조 방법도 다양화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와인을 만들더라도, 와인 메이커에 따라서 성격이 확연히 다른 와인들이 생산된다.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한 와인메이커가 만든 같은 와인이라고 하더라도, 병의 크기나 보관상태, 그리고 언제 와인을 개봉하느냐에 따라 그 향과 맛이 다르다. 병의 크기가 클수록 와인은 더디게 진화하며, 와인병을 안정적인 온도와 습도에서 보관하면 천천히 숙성이 이루어진다. 특히 와인은 진화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오늘 마신 와인은 내년, 혹은 5년 뒤, 혹은 10년 뒤에 마실 같은 와인과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소중한 존재이듯이, 와인 역시 한 병 한 병 서로 다른 개성과 소중함을 담은 존재다.
척박한 환경이 좋은 와인을 만든다혹독한 환경이 사람을 단련시키듯이,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훌륭한 와인이 생산된다. 자양분이 풍부한 토양에 포도나무를 심게 되면, 포도나무가 게을러져서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는다. 그런 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은 맛이 단순하다. 반면, 자갈밭이나 석회암 지반 등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는 자양분을 공급받기 위해 뿌리를 토양 깊숙이 내려보내야 한다. 나무 뿌리가 땅 속 깊이 박힐수록 다양한 영양분을 포도송이에 공급할 수 있고, 이것이 결국 와인의 다양한 맛과 연결된다. 기후 또한 마찬가지다. 온화한 기후에서 충분한 수분을 공급 받고 자란 포도나무는 퍼진 느낌의 평범한 와인을 만든다. 반면, 포도가 자랄 수 있는 북방 또는 남방 한계선 부근, 또는 높은 고도에서 추위와 갈증을 이겨내며 생존한 나무가 뛰어난 맛과 향을 자랑하는 와인을 생산한다. 사람도 와인도 고통스러운 환경을 이겨내야만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밸런스가 최고 덕목이다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은 환영 받지 못한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건방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반대로 자신감이 빈약한 사람은 소신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유머 감각이 무딘 사람은 센스가 없는 사람이고, 반대로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던지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이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용’의 미덕이 중시되는 이유다. 와인 또한 그렇다. 산도, 당도, 타닌, 무게감 등 와인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가 어느 하나 너무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서로 간에 균형이 잡힌 와인이 훌륭한 와인이다. 혼란스러운 정국에 조화와 균형감을 갖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요즘, 뛰어난 밸런스를 갖춘 와인이라도 대신 찾아 마셔야겠다.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 『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