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석우의 와인 이야기(9) 

사람의 인생을 닮았다 

이석우 중앙일보 조인스 공동대표 겸 디지털제작 전략담당
와인은 단순한 알코올 음료가 아니다. 와인의 일생은 사람의 한 평생과 신기하게도 많이 닮았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영화 <사이드웨이즈>의 여주인공 마야(버지니아 매드슨 분)가 와인의 매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구글 제공
“와인의 일생에 대해 생각하는 걸 좋아해요. 와인은 생명체거든요… 와인이 계속 진화한다는 게 정말 좋아요. 오늘 열어서 마신 와인을 만일 다른 날에 따서 마셨더라면 맛이 다를 거잖아요. 그건 와인이 살아 있기 때문이예요. 그리고 계속해서 진화하고 다양한 모습을 더해가다가, 당신의 1961년산 슈발 블랑처럼 정점에 이르게 되요. 그 후로는 피할 수 없는 내리막 길을 따라 서서히 시들어가죠.” 영화 <사이드웨이즈(Sideways)>중에서 여주인공 마야의 대사다.

와인의 일생은 사람의 한 평생과 신기하게도 많이 닮았다. 단순한 알코올 음료를 놓고서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이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수많은 와인들이 제각각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그 가운데 정말 훌륭한 와인이 갖는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름다운 사람들만의 특징이 있듯이.

와인은 생명체의 싸이클을 지녔다


▎필자가 10년 전에 미국 나파의 도미누스 이스테이트(Dominus Estate)의 1984, 1986, 1989, 1992년 빈티지의 버티컬 시음을 했을 때의 와인과 코르크. 특히 세 번째 사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984, 1986, 1989, 1992년 빈티지 와인을 순서대로 잔에 따라놓은 것이다. / 이석우 제공
와인은 앞서 마야의 설명대로, 변화하고 진화하며 절정에 이르다가 서서히 죽음에 이른다. 소주나 맥주 등 다른 알코올 음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는 같은 와인의 서로 다른 빈티지를 시음하는 버티컬 시음(vertical tasting)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밭에서 영근 포도송이를 따다가 즙을 내서 발효를 시키면, 와인은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마치는 잉태기를 거친 셈이다. 병에 갓 담겨서 출시되는 순간부터 와인의 유년기가 시작된다. 병 속의 알코올과 산, 당분 뿐만 아니라 효모나 포도 찌꺼기, 각종 미생물과 화학물 등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와인은 유년기에서 청년기로 변모한다. 유년기나 청년기의 와인은 마시기에는 적합하지만, 아직 그 와인의 잠재력이 충분히 발현되지 않은 상태다. 사람의 유년기나 청년기처럼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아직 균형 잡힌 모습을 찾기 어렵다. 산도가 너무 강하거나, 타닌이 너무 세거나, 아니면 무게감이 지나치게 느껴지는 시기다. 청년기의 와인이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모든 구성요소들이 차츰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장년기에 접어든다. 이때의 와인은 마시는 이에게 부드러움과 우아함을 선사해 준다. 보통 이 즈음을 와인의 ‘절정기’ 또는 ‘시음 적기’라고 표현한다. 이후에 세월이 더해지면 와인도 인간처럼 노년기에 접어든다. 색은 바래지고 힘은 약해지지만, 말린 과일과 흙의 기운이 주름처럼 잡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음료가 되면, 와인은 그 생명을 다하게 된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와인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인생의 각 단계마다 그 나름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지녔다.

한 병 한 병마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갖는다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거나 과거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은 1만여 가지가 넘는다. 당연히 다른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각기 다른 향과 맛을 낸다. 같은 품종이라도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서로 다르다. 일조량과 강우량 등 기후 조건이 해마다 다르고, 토양의 성분에 따라 와인 맛이 다르다. 특히 20세기 후반 양조기술의 발전 덕분에 와인 메이커가 구사할 수 있는 양조 방법도 다양화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와인을 만들더라도, 와인 메이커에 따라서 성격이 확연히 다른 와인들이 생산된다.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한 와인메이커가 만든 같은 와인이라고 하더라도, 병의 크기나 보관상태, 그리고 언제 와인을 개봉하느냐에 따라 그 향과 맛이 다르다. 병의 크기가 클수록 와인은 더디게 진화하며, 와인병을 안정적인 온도와 습도에서 보관하면 천천히 숙성이 이루어진다. 특히 와인은 진화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오늘 마신 와인은 내년, 혹은 5년 뒤, 혹은 10년 뒤에 마실 같은 와인과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소중한 존재이듯이, 와인 역시 한 병 한 병 서로 다른 개성과 소중함을 담은 존재다.

척박한 환경이 좋은 와인을 만든다

혹독한 환경이 사람을 단련시키듯이,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훌륭한 와인이 생산된다. 자양분이 풍부한 토양에 포도나무를 심게 되면, 포도나무가 게을러져서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는다. 그런 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은 맛이 단순하다. 반면, 자갈밭이나 석회암 지반 등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는 자양분을 공급받기 위해 뿌리를 토양 깊숙이 내려보내야 한다. 나무 뿌리가 땅 속 깊이 박힐수록 다양한 영양분을 포도송이에 공급할 수 있고, 이것이 결국 와인의 다양한 맛과 연결된다. 기후 또한 마찬가지다. 온화한 기후에서 충분한 수분을 공급 받고 자란 포도나무는 퍼진 느낌의 평범한 와인을 만든다. 반면, 포도가 자랄 수 있는 북방 또는 남방 한계선 부근, 또는 높은 고도에서 추위와 갈증을 이겨내며 생존한 나무가 뛰어난 맛과 향을 자랑하는 와인을 생산한다. 사람도 와인도 고통스러운 환경을 이겨내야만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밸런스가 최고 덕목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은 환영 받지 못한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건방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반대로 자신감이 빈약한 사람은 소신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유머 감각이 무딘 사람은 센스가 없는 사람이고, 반대로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던지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이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용’의 미덕이 중시되는 이유다. 와인 또한 그렇다. 산도, 당도, 타닌, 무게감 등 와인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가 어느 하나 너무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서로 간에 균형이 잡힌 와인이 훌륭한 와인이다. 혼란스러운 정국에 조화와 균형감을 갖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요즘, 뛰어난 밸런스를 갖춘 와인이라도 대신 찾아 마셔야겠다.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 『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201701호 (2016.12.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