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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와인 산지 까딸루냐 

천사들의 축복이 만든 와인 

글·사진 정수지 와인21닷컴 기자
바르셀로나를 조금만 벗어나면, 한국에서 인기 많은 카바(Cava)의 고향부터 세계 최고 레드 와인 산지 중 하나인 프리오랏(Priorat)에 닿을 수 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꼭 가보길 바라는 곳, 까딸루냐 와인 순례길을 돌아봤다.

▎포볼레다 마을이 보이는 포도원 전경.
까딸루냐 지방은 바르셀로나 남서쪽 해안을 따라 형성된 와인 산지다. 까딸루냐에서 와인은 3번째로 중요한 산업이며, 규모는 10억 유로(한화 1조 3천억원)에 달한다. 까딸루냐 와인 중 스파클링 와인인 카바와 고품질 레드 와인은 스페인 와인의 위상을 높일 정도로 국제적 평판이 좋다. 유명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리스트엔 까딸루냐 와인이 660종이 올랐고, 이중 16종은 96점 이상을 받았다. 까딸루냐 와인 중 절반은 해외에서 소비되며, 35%의 수출증가세를 보일 정도로 인기가 많다.

작업복 회장님의 명품 카바, 레카레도


▎레카레도 조셉회장이 회색 작업복을 입고 데고쥬망을 보여주고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차로 한 시간을 달리면, 산트 사두르니 다노이아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카바의 고향으로 스페인 카바의 85%를 생산한다. 카바는 샴페인 방식으로 만들지만, 부담 없는 가격에 살 수 있고,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려 인기가 많다. 한국 와인애호가들도 이제는 닭튀김에 맥주대신 카바를 즐긴다. 가성비가 좋은 카바엔 대개 ‘샴페인의 대체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만만치 않은 가격에 숭배자들까지 거느린 ‘명품 카바’ 생산자들이 있다. 바로 ‘컬트 카바’로도 불리는 레카레도(Recaredo), 그라모나(Gramona), 아구스티 토렐로 크립타(Agusti Torello Kripta)가 그들이다.

카바의 심장부에 위치한 레카레도에 도착하자 조셉 마타 카사노바스(Josep Mata Casanovas) 회장이 상기된 얼굴로 일행을 반긴다. 까딸루냐 방송국에서 제작한 <한국에서 사는 까딸루냐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회장은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반했다며 무척 반가워 했다. 그는 일행을 지하 셀러로 안내하며, 레카레도는 스페인에선 최초로 드라이한 카바를 시장에 내놨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에 따르면, 드라이한 카바는 포도가 자란 땅과 그 해 농사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다고 한다. 포도 품질에 정말 자신 있는 와인 생산자만이 드라이한 카바로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조셉 회장은 세심한 수작업만이 명품 카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회색 작업복을 입고 직접 데고쥬망(병목에 모인 죽은 효모 찌꺼기를 제거하는 과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과정은 와인 병을 기울여 마개를 열어 효모 찌꺼기를 제거한 뒤 재빨리 병 입구를 막아야 해서 어렵다. 와인을 덜 흘릴수록 솜씨가 좋은 건데, 수십 년 경력의 회장은 죽은 효모 찌꺼기만 빼내며 진정한 마스터의 모습을 보여줬다. 대부분은 이 작업을 쉽게 하려고 병목을 얼리지만, 레카레도는 병목을 얼리지 않고 지하 셀러 온도에서 작업한다. 조셉 회장은 병목을 얼리는 과정에서 와인이 받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프리오랏의 아버지, 르네 바르비에


▎레카레도 지하셀러- 긴 숙성을 통해 더 고운 기포와 복합성을 얻는다.
그의 와인을 맛보았다. 섬세하게 입안을 간질이는 기포, 복합적인 향과 풍미에 우아함이 느껴졌다. 레카레도 최상급 카바인 투로덴모타(Turo D’en Mota) 2003년 산이다. 2003년에 수확된 포도로 양조한 뒤 12년간 숙성됐다. 조셉 회장은 셀러에서 긴 시간 숙성될수록 카바는 더 고운 기포와 복합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샴페인에서도 이렇게 긴 숙성은 드문 일로 명품 카바의 자격을 얻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레카레도를 떠나 남서쪽으로 2시간을 달리면, 스페인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 생산되는 프리오랏이 나온다. 가파른 경사 탓에 눈이 닿는 모든 곳은 가다랭이 논을 닮은 테라스 포도원이다. 포도는 오로지 사람의 손과 훈련된 노새의 도움으로 자란다. 나이든 포도 나무로 와인을 만들다 보니 생산량은 지극히 적지만, 워낙 맛이 좋아 국제적인 요구는 나날이 늘고 있다. 때문에 저렴한 프리오랏 와인을 찾아보긴 힘들다. 최상급 프리오랏 와인은 병당 가격이 수백 유로를 훌쩍 넘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리오랏의 영광은 최근의 일이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프리오랏은 완전히 쇠퇴한 와인 산지였다. 프리오랏의 운명을 바꾼 건 바로 끌로 모가도르(Clos Mogador) 와이너리의 르네 바르비에(Renè Barbier)다. 1978년 그는 이 지역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버려진 원형 극장 모양의 테라스 포도원을 발견했다. 프랑스 와인 가문 출신인 그는 덤불과 잔해들 사이로 매우 독특한 토양에서 수령이 오래된 포도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이때 발견한 포도를 시험 삼아 와인으로 만들어 본 후, 이 지역의 잠재력에 확신을 얻게 됐다. 이후 그는 마음 맞는 친구들을 모아 그라타욥스 마을에 공동 양조장을 세우고 고품질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와 일본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일본인 친구에 의해 그의 와인이 처음 일본에 소개됐고, 이를 계기로 끌로 모가도르와 프리오랏 와인의 우수성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3년 로버트 파커가 끌로 모가도르에 높은 점수를 주자 와인세계 사람들의 이목이 프리오랏 와인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프리오랏의 아버지’라 부르지만, 그는 수줍은 듯 스스로를 ‘히피와인메이커’라 소개했다. 과거를 회상하며 “모든 일이 한 순간 너무 커져버렸어요”라고 말하며 미소 짓던 그의 겸손함은 와인과 더불어 큰 감동을 주었다.

모든 건 포도원에서 결정된다고 믿는 그는 대대로 물려진 장비를 가지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와인을 만든다. 때문에 그의 양조장은 달걀 모양의 큰 발효통을 제외하곤 모두 과거로 시간을 거스른 듯 예스럽다.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시음 공간은 그의 아내가 와인으로 그린 그림들로 꾸며져 있다. 르네 바르비에는 그의 집 근처 포도원에서 자란 포도로 프리오랏에선 보기 힘든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 넬린(Nelin)이라는 이름의 와인은 모과향이 무척 좋으며, 견고한 구조와 부드러운 질감을 지녔다. 끌로 모가도르 2013년 산은 80년 수령의 오랜 포도 나무 열매로 만들어 다양한 야생 허브향과 붉은 과실 풍미를 지니고 있다. 간간히 스치는 구운 잣과 바닐라 풍미가 와인을 보다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최상위권 프리오랏 생산지, 마스 도이쉬


▎마스 도이쉬 와인들.
그라타욥스 마을을 떠나 세 고개쯤 넘으면, 프리오랏에서 가장 높고 서늘한 포볼레다 마을이 나온다. 이곳의 대표 와이너리인 마스 도이쉬(Mas Doix)는 스페인 최고 와인 생산자들의 연합회인 그란데스 데 파고스 데 에스파냐 회원이며, 정기적으로 열리는 프리오랏 와인 품평회에서 최상위권에 드는 유명 생산자다. 마스 도이쉬의 주인장인 발렌티 야고스테라는 세계적인 경영대학원 에사데(ESADE)의 교수이자 와인메이커로 형과 함께 5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일행은 ‘코스터스(Costers)’라 불리는 가파른 언덕 테라스 포도원으로 향했다. 한걸음씩 오를수록 테라스 경사가 심해지고, 얼굴에 닿는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 이윽고 아래로 내려다보기 무서워졌을 즈음, 발끝을 주시하던 눈을 들어 풍광을 보니 탄성이 터져나왔다. 하늘을 떠받치듯 보이는 기암절벽, 고풍스런 포볼레다 마을과 포도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포도원은 오래된 서적이 차곡차곡 쌓인 듯 보이는 리코레야 토양으로 돼있다. 포도나무 옆 야생 허브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와인에 향을 더해준다. 바람 소리만 빼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고요함이 주위를 감싸며, 시끄러웠던 마음마저 정적으로 가득 차 올랐다. ‘수도원’이라는 의미의 프리오랏엔 예로부터 산꼭대기 소나무 위로 마치 하늘을 오르는 듯한 계단이 나타나, 그곳을 통해 천사가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름 사이로 포도원을 비추는 햇빛을 보고 있으면, 하늘에 오르는 바로 그 계단인가 하는 착각 마저 들었다. 구름이 밀려갈 때 일렁이는 햇빛은 마치 천사들이 포도원을 보살피며 축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천사들의 축복을 받은 마스 도이쉬 와인 중 ‘잔에 든 전설’이라 불리는 ‘1902’ 와인이 있다. 이는 필록세라 재앙 후 프리오랏에서 최초로 포도나무를 다시 심은 년도를 기념하는 와인이다. 1902년 심겨져 100년이 넘은 포도나무는 그 양은 적지만 여전히 포도를 생산한다. 이 와인 한 병엔 포도나무 세 그루의 열매가 오롯이 들어간다. 때문에 이 와인의 병당 가격은 현지에서도 200유로를 훌쩍 넘는다. 긴 세월 깊이 내린 뿌리 덕에 와인은 두드러지는 미네랄, 크랜베리 등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다. 와인은 산에서 자라는 야생 허브 향이 스쳐 지극히 향기롭다. 정말 우아하고 품위 있는 와인으로 시음 후 쉽게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발렌티 대표는어떻게 이런 와인을 빚을 수 있냐는 질문에 “프리오랏의 정신을 받들어 리코레야 토양과 환경이 준 걸 그대로 병에 담았을 뿐”이라고 답한다. 덧붙여 그는 “언제나 최고의 와인은 빈 병이며, 빈 병은 곧 행복”이라며, 자신의 와인을 좋아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마스 도이쉬는 방문객들을 위해 3가지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시음 코스를 20유로에, 포도원을 둘러보고 6종의 와인을 시음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65유로에 제공하고 있다.

벨기에 셰프가 포플라나무 숲에 틔운 새싹


▎브로츠 레스토랑 음식.
포볼레다 마을로 이동하면, 까딸루냐어로 ‘새싹’이라는 브로츠(Brots) 레스토랑이 있다. 대부분 프리오랏 레스토랑이 점심 장사만 하는데 반해, 브로츠는 저녁 식사도 제공한다. 피에터 트루이츠는 벨기에 출신 셰프로 이곳 출신의 와인메이커인 아내를 만나 정착했다고 한다. 그는 유럽 각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 덕분에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고 국제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25인석의 작은 레스토랑은 오픈 키친이며, 강렬한 붉은 벽으로 장식됐다. 그는 퓨전 음식을 제공하는데, 카레, 고추, 고추냉이 등의 익숙한 아시아 풍미를 세련되게 녹여낸다. 요리마다 연출되는 그의 기발하고 독창적인 프리젠테이션은 먹는 이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셰프는 해산물 요리에 특히 강하며, 까딸루냐 지방 전통 소시지인 보티파라를 직접 만든다. 보티파라는 흰 것과 검은 것 두 종류가 있는데, 맛이 우리 백암순대와 비슷하다. 메뉴 선택이 어렵다면, 인당 29유로의 테이스팅 메뉴를 즐기면 된다. 와인 리스트는 프리오랏 마을 별로 구분됐고, 가격 또한 합리적이다. 당연히 예약은 필수다.

- 글·사진 정수지 와인21닷컴 기자

201612호 (2016.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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