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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1) 바뤼흐 스피노자 

훌륭한 삶, 행복한 삶의 길을 제시한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의 사도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최고경영자(CEO)는 파괴자이자 건설자이어야 한다. CEO들은, 기존의 신(神) 관념을 부정하고 대안을 제시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에게서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17세기를 살다 간 스피노자는 18세기 계몽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서구 최초의 근대적인 철학자다. / 김환영
아인슈타인(1879~1955)에게 “신을 믿느냐?”고 허버트 골드스타인이라는 뉴욕 랍비가 물었다. 아인스타인은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 스피노자의 신은 세계의 법칙적인 조화 속에 자신을 드러내며 인류의 운명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라고 답했다. 아인슈타인이 믿는 신은 3대 일신교인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신과는 사뭇 달랐다. 아인슈타인이 바라는 신은 과학이나 이성과 충돌하지 않는 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에 대한 오마주로 시를 쓰기까지 했다.

서구 최초의 근대적인 철학자

지능지수(IQ)가 175정도로 추산되는 스피노자는 포르투갈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히브리어·네덜란드어·프랑스어·라틴어를 구사했다. 그는 ‘이단의 아버지’, ‘신에 취한 사람’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독일 철학자 헤겔(1770~1831)은 “당신은 스피노자주의자이거나 철학자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일갈했다. 괴테(1749~1832)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은 덕분에 절망을 딛고 분발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17세기를 살다 간 스피노자는 18세기 계몽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서구 최초의 근대적인 철학자다. 스피노자의 주적(主敵)은 칼뱅주의 신학이었지만, 그가 지은 『신학정치론』(1670)과 『에티카』(1677)는 1670년대 말에 가톨릭교회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 당대인들에게 그는 ‘사탄의 화신’이었다. 그는 기존의 정치와 종교 간의 유착 혹은 균형을 위협했다.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오늘날에는 주류다. 영국 정치사상가 존 로크(1632~1704)에 영향을 주었고, 로크는 미국 헌법에 영향을 줬다. 우리 또한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의 사도’인 스피노자의 영향권에서 빠져나가기 힘들다.

스피노자가 급진주의적(radical) 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네덜란드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수학자·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20여년간 체류한 네덜란드가 배경이었다.

네덜란드는 사상의 자유를 원칙으로 삼는 나라였다. 국제 무역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로테르담에 ‘이단’을 포함해 다양한 신앙·사상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과 돈이 몰려들었다. 44세 나이에 폐질환으로 사망한 스피노자는 그리스도교 묘지에 묻혔다. 장례 행렬에 화려하게 꾸민 6대의 의식용 마차가 등장했다. 수많은 사회 고위층 인사들과 시민이 참석했다. 네덜란드는 유럽 최고의 사상 선진국이었지만 아직 사상의 봄이 완전히 온 것은 아니었다.

스피노자는 마라노(Marrano) 출신이었다. 원래는 돼지나 돼지처럼 더러운 사람을 뜻하는 이 말은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강제로 개종당한 유대인들을 지칭했다. 스피노자 집안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마라노 사람들은 유대교에 대해 잘 몰랐다. 새로 믿는 것과 같았다. 신심이 대단했다. 스피노자는 탈무드 학교에서 유대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는데, 암스테르담 유대인 공동체에서 신동으로 소문났다. 훌륭한 랍비의 탄생을 모두 기대했다. 그러던 그가 23세에 “극악무도한 행위”, “끔찍한 이단”을 이유로 ‘헤렘(파문)’당했다. 가족·친족마저 그를 보는 게 금지됐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에서 파문당한 유명 인물로 러시아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1879~1940)가 있다. 마르크스·프로이트처럼 최고봉에 오른 유대인 사상가들은 상당수가 유대교에서 이탈했다. 스피노자가 최초의 사례다.

스피노자를 방치하면 정부 당국이 유대인 공동체 전체를 탄압할 수도 있다는 집단 차원 우려가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파문당한 후 급진 자유파 개신교인들과 어울렸다.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는 ‘칼리지안즈(Collegians)’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매월 첫 일요일 모임에서 자유롭게 성경에 대해 토론하고 기도했다.

스피노자는 사망할 때까지 21년 동안 연구와 집필에 매진했다. 안경·현미경·망원경에 쓰이는 렌즈를 세공해 팔아 생계를 이었다. 고급 장인 기술이었다. 얼마간 독지가 친구들의 후원을 받았지만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귀리죽으로 저녁을 때웠다.

“신은 철학적으로만 존재한다”고 주장

‘무신론자’로 매도됐지만, 스피노자도 신을 믿었다. 범신론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범신론은 무신론과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성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성경을 살펴봄으로써 ‘진정한 종교’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성경이 과연 신의 말씀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으며, 성경에 나와 있다고 무조건 맹신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스피노자는 “신을 알고 신을 사랑하며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성경에서 건진 가장 중요한 구절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레위기 19:18)였다. 그리스도교와도 100프로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 밖에 있는 초자연적, 초월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에게 신이 곧 자연이었다. 신은 ‘자연 밖’에 있는 것도 ‘자연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연 그 자체였다.

“신은 철학적으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스피노자의 신은 추상적·비인격적 신이었다. 스피노자의 신은 인류에게 계시를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계시를 이성으로 대체했다. 인간이 이성만으로도 우주 속 자신의 좌표를 알아낼 수 있다고 봤다. 스피노자는 또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했다. 자연이 할 수 없는 일은 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우주 속 정체성을 상대화했다. 반인간 중심주의(anti-anthropocentrism)을 표방한 것이다. 최초로 ‘유대교를 부인한 유명 유대인’이었던 그에게 인류가 특별하다는 생각이나 유대인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사상은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였다.

모든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인간을 꿈꾸다


▎스피노자는 마라노(Marrano) 출신이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강제로 개종당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모셰 마이몬 (1860~1924)이 그린 마라노. / 김환영
인간의 자유의지, 사후세계, 영원불멸의 영혼도 부정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전개시킨 몸과 마음의 이원론에 반대했다. 데카르트 이원론은 ‘영원한 영혼’과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몸’이라는 사도 바울의 생각과 일치했다. 스피노자의 지지자 입장에서는, 스피노자가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스피노자는 그른 미신을 공격했다. 스피노자에게 제도화된 종교는 ‘제도화된 미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철학자처럼 ‘신을 지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일반 대중들에게 올바른 종교가 좋은 대안이라고 인정했다.

스피노자는 토머스 홉스(1588~1679), 리샤르 시몽(1638~1712)과 더불어 성서비평학(Biblical Criticism)의 창시자다. 19~20세기에 발달한 성서비평학은 성경 텍스트의 역사적 맥락, 문학적 구조, 연대, 저자를 면밀히 따진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세5경』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니다. 모세가 3인칭으로 나오는 대목이 있고 모세의 죽음과 모세의 사후에 벌어진 일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예수를 유대교의 마지막 선지자로 인정했다. 예수를 ‘보통 유대인’으로 보는 유대교보다는 일면 훨씬 우호적이지만, 스피노자는 선지자·예언자들이 상상력이 뛰어나고 신심이 두텁고, 도덕적으로도 우월할지는 모르지만 지적으로는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라는 평가를 내렸다. 선지자들의 ‘신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신의 본질을 알아내는 데 선지자들은 별 보탬이 안된다는 인식이다.

스피노자에게 종교는 곧 철학이었다. 자신이 신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입증했다고 확신했다. 그의 종교 철학은 정치 철학과 연결됐다. 노림수가 있었다. 그는 종교의 ‘미신적’ 실상을 드러내 힘을 약화시켜, 종교로부터 한결 자유롭게 된 국가가 관용적이고 세속적인 민주 국가로 도약하기를 바랐다. 국가와 종교의 건강한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국가가 ‘갑’, 종교가 ‘을’인 주종관계가 확실해야 했다. 그에게 양심적·지적·종교적 자유는 정치의 핵심이었다. 스피노자는 주요 철학자들 중에서는 최초로 표현·사상·언론·종교의 자유가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라고 설파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훌륭한 삶, 행복한 삶의 길을 제시였다. 그런 삶을 위해서는 우선 인간이 물질이나 열정, 미신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모든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인간은 이성이 인도하는 삶 속에서 지식의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후세계를 부정한 스피노자에게 인생이란 사후를 위한 준비과정이 아니다. 그는 누구나 자신이 속한 종교와 무관하게 진정한 신심을 통해 ‘복 받은 상태(blessedness)’에 도달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바꿀 수 없다. 이미 결정돼 있다. 미래를 불확실한 것으로 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선과 악의 문제로 고심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신의 입장에서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초상화를 보면 눈이 참 맑다. 모범적으로 철학적 삶을 살았기 때문이리라.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무신론자들이 개차반이라고 생각했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도 성인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의 적들마저도 이를 인정했다. 그는 거미가 파리를 추격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고 전한다. 그가 버리지 못한 거의 유일한 악습이었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는 그의 『서양철학사』(1945)에서 스피노자가 “위대한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신학정치론』으로 국제적인 명사가 된 스피노자에게 167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이 교수 자리를 제안했다. 정중히 거절했다. 프랑스 국왕이 연금을 주겠다고 했지만 역시 거부했다.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철학을 하기 위해서 였다.

사후 100년 뒤 낭만주의 운동으로 재조명

유교의 기준으로 봐도 굉장한 효자였다. 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아버지 사망 전까지 신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가 6세, 아버지는 22세때 사망했다.) 자식 없는 친구가 유산을 물려주겠다고 해도 거절했다. 그 친구의 형제에게 불공평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쉴 때에는 이웃들과 어울렸다. 그 시대 최대 화제는 목사의 최근 설교였다. 이웃들과 보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집주인의 아내가 “교회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하자 스피노자는 “조용히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면 된다. 구원받으려고 다른 교회 알아볼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스피노자는 평생 독신이었다. 그는 로맨틱한 사랑은 항상 끝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후 약 100년간은 중시되지 않았다. 낭만주의 운동이 그를 다시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불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스피노자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의 주장은 현대 과학과 분석 철학 입장에서 난센스다. 환경주의 운동가들은 그에 대해 관심이 많다.

신과 자연이 하나라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서구에 충격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전통 사회의 ‘급진성’을 잊고 있다. 유교와 천도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표방했다.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사람이 천(天)과 하나라는 관념은 천(天)이 자연과 하나라는 관념보다 과감하지 않은가.

[박스기사] 스피노자의 말·말·말···

● 공포 없는 희망 없고, 희망 없는 공포 없다.
● 나는 인간의 행동을 보고 웃지 않고 울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 가장 비참하고 미천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보통 가장 야심 있고 시기심이 많다.
● 과거와 다른 현재를 바란다면 과거를 공부하라.
● 모든 행복과 불행은 오로지 우리가 사랑에 의해 집착하는 대상의 질(質)에 달렸다.
● 일등이고 싶지만 일등이 아닌 오만한 사람들이 아첨에 가장 잘 속는다.
● 오로지 이성에 이끌리는 사람을 나는 자유롭다고 부른다.
●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 하는 말은 베드로보다 바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 의지와 지력(智力)은 하나요 같은 것이다.
● 정치의 진정한 목표는 자유다.
● 신의 섭리는 자연의 질서에 불과하다.

[박스기사]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는 스피노자 관련 용어

이원론(二元論)

(1) 대상을 고찰함에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원리나 원인으로써 사물을 설명하려는 태도. 또는 그런 사고방식. 두 개의 원리에는 주관과 객관, 오성(悟性)과 감성, 천지, 음양 따위가 있다.

(2) 정신과 물질의 두 실재를 우주의 근본 원리로 삼는 이론. 17세기에 데카르트가 정신은 의식을 그 속성으로 하고, 물질은 연장을 속성으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근세 철학의 이원론이 성립하였다.

(3) 선과 악, 창조자와 피조물, 영혼과 몸 따위의 대립되는 원리로써 사물을 설명하려는 입장.

일원론(一元論)

(1) 하나의 원리로써 전체를 설명하려는 태도. 또는 그런 사고방식.

(2) 우주의 근본 원리는 오직 하나라는 이론.

범신론(汎神論)

자연과 신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고, 일체의 자연은 곧 신이며 신은 곧 일체의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종교관. 또는 그런 철학관. 인도의 우파니샤드 사상, 불교 철학, 그리스 철학, 근대의 스피노자·괴테·셸링 등의 사상이 이에 속한다.

낭만주의(浪漫主義, 로맨티시즘, Romanticism)

꿈이나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고 감상적인 정서를 중시하는 창작 태도.

바뤼흐 스피노자 Profile: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생 / 1654년 아버지 미겔 사망. / 1656년 암스테르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함. / 1663년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들』 출간 / 1670년 익명으로 『신학정치론』 출간 / 1674년 『신학정치론』 금서 조치 / 1675년 『에티카』 집필 완료. / 1677년 네덜란드 헤이스에서 폐병으로 사망, 『에티카』 출간

201702호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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