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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의 R&D 공식이 바뀐다 

C&D·L&D·D&D 부상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글로벌 기업들의 R&D 공식이 바뀌고 있다. 투자 규모를 늘리거나 완성도를 높이기보다는 속도에 더 중점을 두는 추세다. 이에 따라 과거처럼 완성도를 높여 많은 물량을 확보하는 데 공을 들였던 한국 대기업의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IBM은 지식재산권으로 매년 20억 달러 이상 벌어들이는 특허공룡이지만 갈수록 스마트폰 제조업체인 애플에 비해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사진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IBM의 왓슨.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기술 경쟁이 속도 전쟁으로 바뀌고 있다. 이들 글로벌 기업들은 연구개발(R&D) 투자규모를 늘리는 대신 속도에 주목한다. 페이스북은 2004년 서비스를 시작해서 전 세계 1억 명의 이용자를 모으는 데 4년 6개월이 걸렸다. 2010년 설립된 인스타그램은 이 기간을 2년 4개월로 줄었고, 킹닷컴에서 2012년 내놓은 모바일게임 캔디크러쉬 시리즈는 1년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4차 산업 혁명을 대표하는 로봇·빅데이터·인공지능(AI) 등 첨단정보기술(IT)이 발전하면서 속도 경쟁이 사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커졌다.

최경운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과거처럼 완성도에 집착해 제품 출시가 늦어질 경우 시장 유행이 달라져 소비자에게 외면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도 “과거처럼 기술개발 투자 규모를 늘린다고 성공을 보장할 수 없으며 만약 성공을 했어도 과실을 향유하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 연구원은 대표적인 사례로 컴퓨터 제조업체인 IBM을 꼽았다. IBM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지식재산권으로 매년 20억 달러(약 2조2000억원) 이상 벌어들이는 특허공룡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마트폰 제조업체인 애플에 비해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한국, R&D규모 크나 효율성 낮아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2015년 국내 전체 연구개발비는 65조9594억원으로 세계 6위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4.2%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2.7%)·독일(2.9%) 등 선진국도 3%를 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연구개발비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였을까. 평균 R&D 투자대비 무형자산 비율은 11.8배(2014년 기준)로 중국(29.7배)과 일본(22.1배)에 비해 한참 낮았다. 무형자산은 특허권·산업재산권·저작권처럼 형태는 없지만 경제적 가치를 지닌 자산을 의미한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기업의 R&D 투자 효율성은 2010년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 데 비해 중국과 일본은 각각 1.5배, 2.5배 증가했다는 점이다. R&D 투자 효율성이 한·중·일 3국 중에서도 가장 미흡한 수준이다.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혁신 방안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 글로벌 기업들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연구개발의 효율성과 속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대표적인 전략으로 연계 개발(C&D), 런칭 후 개발(L&D), 데이터 주도형 개발(D&D) 등이 꼽힌다. 일반적으로 연구개발(R&D)에서 연구(Research)는 기초가 되는 원천 기술을 찾는 것이고, 개발(Development)은 이렇게 찾은 기술을 제품화하는 과정이다. 글로벌 기업은 가장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연구(R)를 대체하기 위해 연계(Connect)·런칭(Lunching)·데이터(Data-driven)를 주목하고 있다.

C&D: 전문업체를 렌트하라

C&D는 외부 기술과 아이디어를 내부의 R&D 역량과 연결해 신제품을 개발하는 방식이다. 최근 글로벌 제약사는 신약개발에 꼭 필요한 임상시험을 대행기업(CRO)에 맡기고 있다. 임상시험은 의약품의 안전성은 기본이고 약 효과가 있는지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연구과정이다.

시험 대상자인 사람을 모집하는 것부터 컨설팅, 데이터 관리, 임상시험 수행 등 임상 단계를 통과하기까지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신약이나 바이오의약품 개발이 활발한 미국 등 선진국은 CRO 의존도가 갈수 록 커지고 있다.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는 글로벌 CRO 시장 규모가 2014년 288억 달러(약 32조원)에서 연평균 11.9% 성장해 2019년엔 504억 달러(56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임상 단계별로는 대규모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3상 임상시험(20.4%)이, 질환별로는 종양(20%) 관련 신약을 개발하는 데 CRO 비중이 가장 높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CRO는 1982년 설립한 미국의 퀸타일즈다. 현재 100여 개국에서 제약사들의 임상시험을 대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임상시험 승인건수 31건(2014년 기준)으로 가장 많은 임상시험 대행 계획을 승인받았다.

대학이나 타 기업, 외부 연구소 등의 기술과 지식을 활용하는 것도 C&D 전략이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글로벌 생활용품 업체인 P&G가 2004년 선보인 ‘프링글스 프린트’다. 인기 상품인 감자칩 위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머나 만화 주인공을 새긴 것이다. 독특한 아이디어로 이 제품은 선보인 지 6개월 만에 1000만 달러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개발 초기엔 습기가 많은 고온의 감자칩 반죽 위에 정교한 그림이나 글자를 새길 방법을 찾지 못했다. P&G는 기술을 직접 개발하는 대신 개발 과제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한 제과점이 이미 해당 기술을 응용해 케이크와 쿠키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P&G는 곧바로 이 제과점과 제휴를 맺고 글자가 적힌 감자칩을 개발할 수 있었다. 최경운 연구원은 “최근 글로벌 기업은 더 빨리 외부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월트디즈니도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방법으로 예비 창업가를 지원하는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L&D: 먼저 만든 후 수정하라

기획부터 설계-개발-테스트-실행 순서인 전통적 R&D 단계를 뒤집은 게 L&D다. 우선 시제품을 만든 뒤 고객 피드백으로 제품을 수정하며 완성하는 방법이다. 시장 변화에 빠르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전략으로 애자일 기법이라고도 부른다. 박용삼 수석연구원은 “애자일 기법은 빠르게 바뀌는 시장 상황을 즉각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에 고객 요구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상당수 중국 IT 기업이 단기간에 성장한 비결 중 하나다.

2010년 짝퉁 아이폰으로 사업을 시작한 샤오미 역시 R&D센터를 운영하는 대신 홈페이지와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을 들였다. 애플과 유사한 제품으로 눈길을 끈 뒤 고객의 의견은 물론 불만까지 꼼꼼하게 반영해 제품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매주 목요일마다 고객 피드백을 스마트폰 운영체제와 앱 기능에 추가했다. 중국의 인터넷 기업 텐센트도 애자일 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온라인 메신저인 큐큐(QQ)에 일정 기능을 탑재할 때 기본적인 시장 조사나 시험 테스트를 거치지 않았다. 곧바로 약속·생일·기념일 등을 알려 주는 일정 앱을 내놨다. 이후 이용자들은 스포츠 경기 일정 등을 추가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텐센트 개발자들은 몇 주만에 이런 기능을 더한 새로운 버전을 선보였다. 최경운 연구원은 “텐센트는 출시-테스트-개선 과정을 통해 일반적으로 6개월 이상 걸리는 개발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했을 뿐 아니라 고객의 만족도도 높였다”고 분석했다.

IT기업뿐 아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의료기기 제조사인 민드레이는 반 년에 한 번씩 신제품을 내놓고 있다. 의료기기 업계의 평균적인 제품 출시 주기가 2년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짧다. 민드레이 역시 텐센트처럼 기본 기능만 갖춰 제품을 내놓고 사용해 본 소비자의 의견을 토대로 기능을 추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처음엔 심장 박동을 측정하는 기계로 출시된 제품이 중환자실 모니터링 기기로 바뀌기도 한다. 기기를 사용해 본 의사들이 뇌파 측정, 산소 포화도 등 다양한 기능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반영하면서 아예 새로운 제품을 개발한 것이다. 민드레이는 이런 발 빠른 혁신 전략으로 32개국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D&D: 빅데이터로 분석하라


▎롯데가 2천200억 원을 들여 마곡산업단지에 완공한 ‘롯데 R&D 센터’. 한국의 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4.2%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 사진 : 연합뉴스
IT기술 발전으로 연구개발에도 디지털·자동화 바람이 불고 있다. 먼저 개발 과제를 선정하는 방식부터 달라졌다. 예컨대 자동차 제조사가 운전자 만족도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설문, 전화 상담 등을 통해 일일이 답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반면 인터넷, 모바일 서비스 등이 가능한 커넥티드 카는 실시간으로 운전자 행동에 대한 빅데이터를 전송해 준다. 자동차 제조사는 빅데이터를 분석해 사용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기능, 사용상의 문제점 등을 얻을 수 있다. 고객의 피드백을 받지 않고도 빠르고 정확하게 의사결정을 진행할 수 있다.

또 로봇을 이용하면 연구기간을 줄일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조합을 반복적으로 실험하는 화학·제약업체에 유리하다. 한 화학기업은 로봇 기반의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희석·합성 등 실험시간을 60% 줄였다. 일본은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화학물질 안전 심사 방법을 2019년부터 도입할 계획이다. 그동안 화학물질 안전 심사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물고기에 화학물질을 먹여 물질의 축적도를 조사하는 작업만 평균 1년이 걸렸다. 심사 세부 절차를 차례로 거치고 제품화하기까지 최대 3년 정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빅데이터로 가상실험을 대체하면 시간과 비용 모두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디지털화는 기업과 외부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연결해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 3월 온라인 빅데이터 플랫폼으로 유명한 캐글이 데이터분 석 공모전을 열었다. 이 대회에서 자기공명영상(MRI)만으로 심장병을 진단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한 팀이 우승했다. 이들은 헤지펀드 업계에서 유명한 투시그마의 퀀트 운용 전문가들이었다. 수많은 의학 전문가들도 풀지 못한 문제를 비전문가들이 공모전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해결한 것이다.

-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201708호 (2017.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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