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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DITION_(1)] 유행의 심리적 속성 

정신과 의사가 보는 ‘유행과 소멸’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널리 퍼트리려 한다. 멈추지 않고 변하는 유행 덕분에 인류 문명은 더 다채로워졌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유행은 과도한 광고와 마케팅을 만났고, 일부 현대인은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강박관념이 될지 모르는 유행, 떨쳐낼 방법은 있다.

▎인간에게는 대중과 같아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러한 동류 의식과 집단 소속감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유행이 퍼져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이 석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약 250만 년 전이다. 동부 아프리카 올두바이 협곡에서 많이 발견되기에 올도완 석기라고 불린다. 둥근 돌 옆을 깨서 뾰족하게 만드는데, 자연석과 구분하기 어려워 고고학자나 겨우 구분할 정도다. 그러다 약 백만 년 전쯤 멋드러진 석기인 아슐리안 대석기가 ‘대유행’했다.

흔히 주먹도끼라고 부르는 이 석기는 좌우 대칭으로 물방울 모양을 띠고 있다. 잘 만들어진 아슐리안 석기는 매우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유행’은 약 10만 년 전까지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에 퍼져 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유행 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선 전혀 사용하지 않을 법한 주먹도끼와 실생활에 사용하기에 너무 큰 석기 등도 발견됐다. 이 석기들의 용도는 뭘까.

최초의 유행: 이노베이터


▎페트리에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제공(2016). 아슐리안 석기는 백만 년 넘는 시간 동안 ‘유행’한 물방울 모양의 대칭형 석기를 말한다.
유행의 시작부터 따져보자. 보통 유행을 처음 시작한 이를 유행 혁신자, 즉 ‘이노베이터’라고 한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물건이나 디자인을 최초로 고안한 사람이다. 아슐리안 석기의 디자인은 당시 기준으론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진화 심리학에선 아슐리안 석기가 지닌 예술성이 성 선택을 위한 과시재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정도다. 구애하려고 예쁜 석기를 만들었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아슐리안 석기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일단 적당한 돌을 고르고 전체적인 모양을 설계한 후, 강력한 힘으로 돌을 쪼개 정교하게 다듬었을 것이다. 좌우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하며, 위아래의 모양도 달라야 한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석기의 모양만 봐도 석기 제작자가 들인 공과 그가 지녔을 강한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또 다양한 이론을 펼친다. 실용적인 수준을 과도하게 넘는 장신구나 사치품이 지닌 목적에 대해서 말이다. 진화인류학자들은 이성의 관심을 끌려는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밖에도 우수한 지적 능력, 양호한 재정적 능력, 탁월한 미적 감각, 균형 잡힌 육체를 과시하고자 등장했다는 설이 추가된다.

유행의 시작: 초정상자극

어쨌든 아슐리안 석기를 만든 이는 이노베이터라고 봐야 한다. 혁신이 유행으로 이어지려면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초기 수용자(얼리어댑터)라고 하는데, 유행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소재를 빨리 간파하는 사람이다. 현대 사회에선 이노베이터와 얼리어댑터가 잘 구분되지 않기도 한다.

유행을 선도하는 가치는 뭔가. 인간의 인지 시스템에서 소위 ‘쿨’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으면 일단 성공이다. 주로 남성적 혹은 여성적 매력을 배가하거나 젊음과 건강함 등을 과시하는 물건이나 행위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유행을 가장 많이 타는 품목은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의류다. 한때는 어깨를 부풀렸고, 또 언제는 몸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가 인기를 얻었다. 신체적으로 여성성·남성성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보이시한(사내아이 같은) 여성복이나 핑크색 남성복이 유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또한 대비를 극대화한 과시 행위다.

학문적 업적도 상당하다.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니콜라스 틴베르헌은 정상보다 더 증폭된 고정행동 패턴을 유발하는 자극을 ‘초정상자극’이라고 불렀다. 실제보다 과장되게 허리가 잘록하게 보이도록 한 옷차림은 이성에게 성적인 초정상자극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크다는 것이다. 유행은 성적 매력이나 젊음·건강함·귀여움 등의 신호와 연관이 깊다. 지적 능력이나 경제적 부유함을 과시하는 경우도 있다. 긍정적인 매력을 반감시키는 복장, 예를 들어 밋밋한 회색 작업복이 유행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유행의 성장: 같아지고 싶은 마음

초정상자극을 유발한다고 해서 무조건 유행하는 건 아니다. 유행하려면 반드시 추종자(팔로워)가 있어야 한다. 이들은 비슷한 패션이나 사물을 유행시키기도 한다. 팔로워는 왜 남들을 따라 하려 할까. 유행이 확산되는 배경엔 ‘동질성 추구’라는 욕구가 자리한다. ‘핫’한 아이템이 등장해 얼리어댑터의 선택을 받으면, 그들과 같아지고 싶은 무리가 생긴다. 연예인이 입은 옷이나 장신구가 유행을 타는 것도 그들과 같아지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나이 들어도 마찬가지다. 값비싼 고급 차나 골프 클럽이 잘 팔린다. 죽어서 들어가는 관도 유행을 타는 세상이다. 요즘 ‘돈 있는 사람’들은 고급 관을 쓴다는 말이 돌면 수백만원짜리 관이 잘 팔린다. 남과 달라지고 싶어 유행을 따르지만, 역설적으로 남과 같아지려는 마음 탓에 유행은 또 퍼진다. 그래서 혁신자와 초기 수용자의 심리는 추종자와 정반대다. 추종자는 유행에 뒤늦게 편승해선 이득을 볼 수 없다. 잘해야 ‘뒤처지지 않았다’라는 안도감만 얻을 뿐이다. 무리하게 최신 유행을 따르면 과도한 카드 명세서만 남을 뿐이다. 유행의 열매는 이노베이터와 얼리어댑터가 거의 독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유행의 소멸: 달라지고 싶은 마음


▎프란스 포르부스 2세 작(1609~10년 추정). 루브르 박물관 제공. 프랑스 앙리 4세의 부인이었던 메디시스 왕비의 초상화. 여성의 아름다움을 과장한 복식을 하고 있다(왼쪽). 로버트 브라우닝의 『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표지.
그래도 무엇이든 널리 퍼지면 진부해진다. 과거 뜨거웠던 유행도 시간이 지날수록 고리타분해지고 특별한 느낌도 사라진다. 이때 다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이노베이터가 등장한다. 기존 유행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뭔가 터뜨리고 기존 유행을 완전히 구식으로 만들어버린다. 지금처럼 인구 이동이 많고, 인터넷·방송 등이 보편화된 사회일수록 유행의 주기는 점점 더 짧아진다.

유행 피로증 극복하기

아슐리안 석기는 인간이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퍼트리려는 본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멈추지 않고 유행을 따르는 본능 덕에 인류 문명은 더 화려하게 발전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선 부정적인 측면도 만만치 않다. 유행은 과도한 광고와 마케팅과 만나 나타났고, 의도적으로 조장되기도 했다. 몇 주만 입으면 그만이라는 패스트패션, 환경 오염과 자원 고갈에 일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신없이 바뀌는 유행, 현대인은 피로감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얼리어댑터 강박, 팔로워 피로증이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면 현대 사회의 진정한 이노베이터는 ‘유행을 따르지 않고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려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유행 현상의 심리적 속성을 이해하면, 인위적으로 유행을 따르려는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을까 싶다.

갑자기 그림 형제의『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동화가 생각났다. 이 얘기에선 마을의 모든 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나마 목숨을 구해 돌아온 아이들은 귀가 들리지 않거나 다리를 다쳐 제대로 걸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상업성이 강한 저급한 유행이라면 가끔은 귀를 닫고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지금도 유행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질 낮은 유행도 마찬가지다. 조언하자면 무분별하게 모든 유행을 따르는 것처럼 ‘유행에 뒤진’ 일도 없다.

※ 박한선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현재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강사를 지내며, 비교문화연구소에서 정신의 진화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가 있고, 옮긴 책으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가 있다.

201803호 (201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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