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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폐허 속 율리우스 카이사르 신화 

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ITALIA-ROMA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로마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팔라티노 언덕 위에 창건한 이래로 거의 28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대도시이다. 이렇듯 장구한 역사가 흐르는 ‘영원의 도시’ 로마는 도시 전체가 열린 박물관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한 돌무더기에도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이 담겨 있다. 그중 라르고 아르젠티나와 포로 로마노에서 발견된 돌무더기 폐허는 기원전 44년 3월 로마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대사건의 현장이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다본 고대로마 세계의 중심 포로 로마노의 유적.
‘영원의 도시’ 로마는 일곱 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그 중심은 캄피돌리오 언덕이다. 이 언덕 남쪽으로는 고대로마의 중심 포로 로마노의 유적이 펼쳐지고 이 언덕 북서쪽으로는 평지에 세워진 시가지가 펼쳐진다. 이 평지의 옛 이름은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 ‘군신 마르스의 들판’이란 뜻이다. 이 지역은 고대로마 초기에 로마군 훈련장으로 쓰던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라르고 아르젠티나’라고 하는 광장이 있는데, 광장 한가운데에는 1927년에 발굴된 로마공화정 시대(기원전 509~기원전 27)의 신전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은 폼페이우스(기원전 135~기원전 87)가 세웠던 로마 최초의 반원형 극장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신전 유적터의 한쪽 편에는 아르젠티나 극장이 있다. 이 극장은 오페라 공연을 위해 1732년 1월 31년에 문을 열었으니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극장은 폼페이우스 극장에 속해 있던 회랑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바로 그 회랑에서 암살당했다. 한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영어식 발음은 ‘줄리어스 시저’. 고대로마 역사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손꼽히는 그는 후세의 통치자들이 가장 흠모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황제’를 뜻하는 독일어의 카이저(Kaiser)나 러시아어의 차르(Tsar)는 다름 아닌 카이사르(Caesar)에서 유래된 것이다.

운명의 날, 기원전 44년 3월 15일


▎라 르고 아르젠티나에서 발굴된 공화정시대 유적. 가운데 소나무 뒤에 보이는 건물이 아르젠티나 극장이다.
때는 기원전 44년 봄. 그해 2월 14일에 종신 독재관이 되어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움켜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강력한 라이벌 파르티아(당시 지금의 이란에 해당하는 강대국)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하기 3일 전인 3월 15일에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에는 로마에 원로원 건물이 별도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정적이던 폼페이우스가 세운 회랑이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 회의장으로 가기 위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서민지역 수부라에 있는 집을 나섰다. 그는 로마 시민들이 자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호위병 없이 혼자서 길을 가는 것이 예사였다. 하지만 적은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그가 회의장 회랑에 들어서자 한 원로의원이 무엇인가 탄원하려는 듯 다가왔다. 그러자 여러 명의 원로의원이 그를 에워쌌다. 그중에는 그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쳤던 부하도 있었고, 정적 폼페이우스파였다가 사면을 받아 카이사르파가 된 자도 있었으며, 그로부터 개인적인 도움을 받은 자도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청하려고 했다. 이들은 갑자기 옷자락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달려들었다. 평생을 전투와 전투 속에서 용맹을 떨쳤던 56세 사나이의 몸에는 순식간에 예리한 칼날들이 꽂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정적 폼페이우스를 제거한 후에도 그에 대한 예우로 그의 석상은 그대로 두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아래에서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도 예기치 못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자 회의장에 왔던 원로의원들은 공포에 휩싸여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수도 로마에는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숨만 죽이고 있었다.



율리우스 신전 돌무더기 위에 놓인 꽃송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화장된 곳에 세운 원기둥의 유적, 누군가가 던져놓고 간 꽃송이들이 놓여 있다.
캄피돌리오 언덕 남쪽 아래에는 포로 로마노의 유적지가 펼쳐진다. 옛 이름은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이다. 고대로마 세계의 중심지였던 이곳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기 2년 전에 세웠던 공회당 바실리카 율리아와 그가 죽은 후에 세워진 율리우스 신전의 폐허가 눈길을 끈다. 율리우스 신전은 쓸 만한 돌은 모조리 뜯겨나간 채 오로지 기초부분의 콘크리트 덩어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데 이 신전 폐허에는 특별한 것이 보존되어 있는지 지붕이 덮여 있다. 지붕 아래에는 돌무더기로 남은 원기둥 폐허 위에 누군가가 던져놓고 간 꽃송이들이 항상 놓여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된 다음 날인 3월 16일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주축으로 하는 암살 주모자들은 정적을 깨고 로마 시민들이 모여 있는 포로 로마노의 광장에 나섰다. 그들은 공화정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에 호응하는 소리는 어느 곳에도 들리지 않았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카이사르파는 일단 신중하게 사태를 지켜봤다. 이때 키케로가 양측을 만족시킬 만한 절묘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즉, 원로원은 암살범들을 사면해주는 대신에 카이사르의 정책을 고수하며, 카이사르를 추모하는 국장(國葬)을 치르고 카이사르를 신격화한다는 것이었다.

3월 20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신은 로마 시민들이 운집한 포로 로마노로 운반되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졌다.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연단 위에 올라서서 묵묵한 군중을 향해 비통한 감정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기록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다음과 같다.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내려다본 포로 로마노의 유적.
나는 시저(카이사르)를 묻으러 왔지, 그를 찬양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악행은 죽은 후에도 남고, 선행은 자주 뼈와 함께 묻히는데, 시저(카이사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시들지 않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신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상.
그런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어떻게 연설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연설내용은 실제로 전해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군중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연설을 마친 그는 로마 시민 한 사람당 상당한 액수의 금액을 증여한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을 발표하고는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고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 그의 옷을 높이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러자 군중들의 감정은 순식간에 돌변했고 암살범들은 일순간에 역적으로 몰렸다.

마침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신이 올려진 장작더미는 로마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곧 불길에 휩싸였다. 하늘로 피어오르던 연기는 봄꽃 향기 스민 로마의 언덕을 뒤덮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렇게 연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가버렸던 것이다. 그는 뛰어난 무인이었으며, 언변이 좋고 탁월한 문장가였고, 다방면에 걸쳐 교양과 학식이 풍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결단과 행동이 확실하고 신속했으며, 적에게는 무자비하면서도 때로는 과감하게 관용을 베풀 줄 알았으며 개방적이었던, 그야말로 로마인의 표본이었다. 한편 암살자들은 그의 호의를 받고 있던 귀족들이었는데 그들은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를 맹목적으로 신봉한 나머지 그에게 비수를 꽂았던 것일까? 또 당시 로마가 더는 도시국가가 아니라 이탈리아와 여러 속주의 모든 계층을 책임져야 하는 거대한 열린 제국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은 외면했던 것일까? 한편 공화정 체제하에서는 왕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생전에 자신은 왕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조카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이상을 이어받도록 했으니 거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에 벅찬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체제를 완전히 개혁할 의도는 분명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율리우스 신전의 유적 (지붕이 씌워져 있는 곳).
그가 사라진 다음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고는 그가 화장된 곳에 기념 원기둥을 세웠다. 그 후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2년에 이 원기둥이 세워진 자리에 율리우스 신전을 착공했다. 그해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그리스로 피신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를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격파했다. 또 기원전 30년에는 정적이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제거했다. 명실공히 로마의 최강자로 떠오른 그는 이 신전을 기원전 29년 8월에 완공했다. 그가 480년간 지속된 로마공화정의 막을 내리고 기원전 27년 1월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달고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어 ‘제정’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약 15개월 전의 일이었다. 이 신전은 장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처절한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신화만큼은 돌무더기 위에 던져진 꽃처럼 지금도 시들지 않은 것 같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1803호 (201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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