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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30년 사건과 인물들(4)] 벤처 열풍 시대의 명암 

 

최영진 기자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를 흔히 ‘벤처 붐’ 시대라고 말한다. 벤처 창업가가 각광을 받던 시기였고, 벤처기업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때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서 이 모든 게 가능했다.

▎2001년 10월 1일 코엑스에서 열린 제5회 벤처기업 전국대회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치사를 하고 있다.
사례 1. 그가 카이스트에서 산업경영을 전공한 이유는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1999년 학사장교로 전역한 후 재학 시절 만들었던 창업 동아리 ‘애크론’에 돌아와 창업을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지만 ‘애크론’은 ‘세상을 알고 싶은 패기 있는 젊은이들의 모임(Ambitious Kids Company Real Objective Needs: AKCRON)’에서 따온 이름이다. 학교에 있는 창업보육센터에서 어떤 것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주위 이야기를 들어보니 흔히 말하는 ‘묻지마 투자’가 많이 이뤄진다고 했다. ‘설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개인투자자인데 당신이 창업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투자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사업계획서를 달라”고 말했다. 사업이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사업계획서도 없었다. 급하게 3장 분량의 사업계획서를 만들어서 보냈다. 1주일 후 투자자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다. “계좌를 불러달라”고 했다. 얼마 후 그 개인투자자가 그 젊은 창업가 통장에 무려 ‘24억원’을 입금했다. 3장짜리 ‘허접한’ 사업계획서로 24억원을 투자받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 사무실 문을 두드린 이는 부산의 제3금융권에서 일했던 이다. 쉽게 말해 벤처 창업가를 발굴해 투자를 유치하는 일종의 ‘브로커’였던 것. 24억원을 투자한 이들은 의사와 변호사를 포함해 67명이나 됐다. 이들 중에는 흔히 말하는 벤처캐피털 관계자도 있었다. 24억원을 투자 받은 그 창업가는 당시 이스라엘 기업이 독점했던 ‘디스플레이 검사장치’를 제조하는 스타트업 애크론을 창업했다. 그는 2002년 애크론을 미국 나스닥 상장사에 매각한 홍기현(46)씨다. 그는 현재 3D 홀로그래피 현미경 시장의 퍼스트 무버로 인정받고 있는 스타트업 토모큐브의 공동창업자이자 대표다. 홍 대표는 “당시 우리뿐만 아니라 누군가 창업을 하면 투자자들이 ‘묻지마 투자’를 했던 때”라며 “벤처 투자가 미친 듯이 이뤄졌고, 코스닥 시장도 널뛰기를 하면서 강남 룸살롱이 최대 호황기를 이뤘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웃었다.

사례 2. “DJ 정부 이전에는 정부가 대기업에 돈을 뿌렸지만, 외환위기를 맞은 DJ 정부는 벤처기업의 창업을 적극 지원했다. 이 시기와 맞물려 수많은 벤처캐피털이 생기기 시작했고, 벤처기업에 투자를 많이 했다. 아쉬운 것은 당시 VC는 전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1999년 곰플레이어로 유명한 ‘그레텍’을 창업해 큰 성공을 거뒀던 배인식(49)씨의 이야기다. 그는 2013년 그레텍 의장직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2016년 ‘키클롭스’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해 제2의 도전을 하고 있다. 그는 ‘벤처 붐’ 시대를 전문성이 없던 VC가 ‘인터넷’이라는 허상을 좇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인터넷 서비스’라는 깃발을 꽂기만 하면 창업가들은 쉽게 투자를 받았다. 수억원 혹은 수십억원을 투자 받은 창업가는 1~3장짜리 계약서를 받았다. 1990년대 후반 배 대표도 마찬가지로 쉽게 투자를 받았다. 1999년 ‘버추얼 데스크톱 서비스’로 주목을 받던 시기였다. 그 소식을 듣고 벤처캐피털 일곱 곳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대부분 “인터넷 서비스를 한다고 소개를 받아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은 인터넷 서비스에 전문적인 노하우나 지식이 없었다. 인터넷 서비스를 하는 벤처기업이라면 무조건 투자할 기세였다. 심지어 ‘아직 사업계획서도 없다’는 말에 ‘그래도 인터넷 서비스를 할 거 아니냐. 간단하게라도 사업계획서를 달라’고 요구하는 곳도 많았다. 배 대표는 “당시 벤처기업은 돈을 너무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수익을 낼 수 있는 시장을 찾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두 대표의 기억대로 ‘벤처 붐’(1990년 대 말부터 2000년대 초기까지) 시대는 ‘인터넷’이라는 깃발만 꽂으면 투자를 받을 수 있던 시기였다. ‘사’ 자가 붙은 전문직 종사자들도 벤처기업에 개인투자자로 나섰다. 벤처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상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문 지식 없는 VC & 비즈니스 모델 없는 창업가


▎2000년대 초반 코스닥의 활성화로 한때 시가총액이 현대자동차를 제쳤던 새롬기술이 선보인 다이얼패드로 통화를 시도하고 있는 모습.
인터넷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는 벤처기업이라는 소문이 돌면 쉽게 투자를 받았다. 심지어 투자 계약서가 5장이 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요즘 투자자들은 원금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해놓기 때문에 투자 계약서가 수십 장에 이른다. 벤처 붐 당시에는 ‘1주에 얼마’라는 식으로 투자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투자금을 지키기 위한 방안은 ‘연대보증’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배인식 대표는 “당시 벤처 창업 붐이 일면서 VC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VC 대부분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점”이라며 “오로지 인터넷 서비스가 떠오르니 인터넷 기업을 찾아서 투자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개인투자자들도 경쟁적으로 벤처 투자에 뛰어들었다.

창업가들도 투자 계약서를 어떻게 써야 하고,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 등 노하우를 배울 곳이 없었다. 홍기현 대표는 “24억원의 투자를 유치했을 때 계약서 내용이 3년 안에 원금과 이자 10%를 돌려주고 안 되면 개인이 배상한다는 내용이었다”면서 “말도 안 되는 계약 내용이었지만 당시에는 계약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사인을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벤처기업 사무실이 몰려 있던 서울 강남에서 ‘룸살롱’이 호황이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벤처업계에 돈이 몰렸고, 창업가들은 사업 이야기를 하기 위해 룸살롱으로 모여들었다. 심지어 창업가들이 모여 룸살롱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왜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날 만큼 ‘벤처 붐’이라는 강력한 바람이 생겼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외환위기라는 비상 상황 때문이었다.

1997년 말 한국에 휘몰아쳤던 IMF 사태는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1997년 1월부터 12월까지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삼미그룹, 삼립식품, 해태제과, 기아자동차, 한라그룹, 뉴코아, 청구그룹, 나산그룹, 극동건설 등 대기업 부도 소식이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대기업 일을 하청 받았던 중소기업의 줄도산이 이어졌다. 한국 경제는 추락을 거듭했다.

1998년 임기를 시작한 DJ 정부는 한국 경제의 위기를 벤처 활성화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지식기반 경제’와 ‘정보 대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이를 상징한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5년간 벤처기업 2만 개 창업 지원’, ‘9000억원의 벤처 지원자금 마련’, ‘창업 벤처기업에 3억원 지원’ 등 관련 정책을 연달아 내놓았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매월 벤처기업 500여개가 탄생했을 정도로 벤처 육성 정책은 강력했다. ‘한국벤처산업의 0세대’로 불리는 구관영 에이스테크놀로지 회장은 벤처기업협회와의 인터뷰에서 “1999년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지원과 맞물려 벤처기업이 IMF 체제 조기졸업의 대안으로 부각되던 시기였다”면서 “닷컴기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벤처기업으로 우수인력과 자금이 대거 유입됐다”고 밝힌 바 있다. “심지어 IT업계를 중심으로 대기업을 퇴사한 인력들이 벤처기업으로 대거 몰려오는 인력 대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벤처의 전성기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초고속 인터넷망 등장, 인터넷 세상 열려


▎1999년 4월 초고속 인터넷 ADSL 서비스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신윤식 하나로텔레콤 사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화상통화를 하고 있다.
ADSL이라는 초고속 인터넷 등장은 벤처 붐을 촉발한 또 다른 이유다. ‘인터넷’이라는 신무기를 장착한 창업가들이 탄생했다. PC방도 이때를 기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PC방의 등장으로 한국 온라인게임 산업의 부흥기가 시작됐다. 이상규 인터파크 대표는 “인터파크가 성장할 수 있던 것은 초고속 통신망인 ADSL이 전국에 깔렸기 때문”이라며 “ADSL은 정액제로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망이었다”고 평가했다. “인터넷 서비스가 활성화된 것은 인터넷을 정액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편리성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넷 활성화로 인터넷 서비스를 표방한 벤처기업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서비스를 운용하는 벤처기업이 내세운 성과 지표는 ‘회원 수’와 ‘페이지 뷰’가 대부분. 회원을 많이 모으면 시장에서 승자가 되는 분위기였다. 당시는 실명제가 실시되기 전이어서 가입된 회원 수에 허수가 많았다. 그렇지만 회원 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나 기관은 많지 않았다. 당시 한국 사회는 벤처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심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배인식 대표는 “2000년대 초 한 벤처는 회원 수가 꽤 되는 서비스를 인수해 회원이 100만 명을 넘었다고 홍보하는 경우도 있었다”면서 “이후 회원당 1000원, 뭐 이런 식으로 대규모 투자를 받았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회원 규모를 늘리는 벤처기업의 행태를 ‘비전 장사’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회원 수를 늘려 어떻게 비즈니스를 펼치고, 매출을 올리겠다는 전략은 부족했다. 대신 회원 수를 늘리면 인터넷 광고를 유치할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비즈니스 모델만 있었다.

회원 수를 늘리고 광고 시장을 연다?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다만 당시 인터넷 광고 시장은 막 발걸음을 뗀 시장이었다. 인터넷 서비스 시장에 수많은 투자금이 흘러 들어갔지만, 실제 성과로 이어지기는 어려웠다.

1999년 시작된 네이버컴(현재의 네이버)도 당시 검색 시장에서 유효한 매출을 올리지 못했다. 네이버가 성장을 시작한 것은 한게임과 합병 덕분이라는 분석이 높은 이유다. 네띠앙(1998년 설립), 다모임(1999년 설립), 프리챌(1999년 설립), 아이러브스쿨(1999년 설립) 등은 한때 회원 수 100만 명을 넘은 성공한 인터넷 벤처기업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이어나가지 못해 사라졌다.

벤처 붐은 코스닥 활성화와 맞물려 큰 폭발력을 가지게 됐다. 코스닥 상장은 벤처기업의 성공 신화(몇 년 후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를 뒷받침하는 신기루였다. 코스닥에 상장만 하면 벤처기업의 가치가 껑충 뛰었다. 심지어 100배나 오른 벤처기업이 나올 정도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 벤처 신화로 여겨졌던 새롬 기술이다. 다이얼패드라는 무선전화 기술로 1999년 코스닥에 상장됐고 한때 시가총액이 2조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당시 현대자동차의 시가총액을 뛰어넘는 규모다. 2757원으로 시작했던 주가는 한때 30만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알다시피 새롬기술 창업가는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됐다. 홍기현 대표는 “당시 공중파 방송에서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이 유행했는데, 당시 남편감 1위로 ‘벤처 창업가’가 선정된 적도 있다”면서 웃었다. ‘벤처 붐’의 위세를 엿보게 하는 장면이다.

벤처 붐이 확산되는 데는 벤처기업협회의 역할도 중요했다. 벤처기업협회는 벤처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다 양한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갔다. 대표적인 게 ‘1실험실 1벤처 창업운동’, 대졸 실업자 10만 명을 웹마스터로 양성하는 ‘인터넷코리아 사업’, ‘재미 한국상공인협회와 벤처기업협회 업무협약’, ‘산업은행의 벤처투자은행화’ 등의 움직임이다.

-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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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호 (20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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