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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기업에서 배운다 | 칼 자이스] 인류의 ‘밝은 눈’이 되다 

 

박지현 기자
172년간 인류의 ‘눈’이 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광학기기 업체로 알려진 이 기업은 세계대전과 동서독 분단의 아픔을 겪은 산증인이다. 재단 소유 경영으로 기업 이윤을 사회적 책임으로 환원한 과학자들의 직장, 칼 자이스(Carl Zeiss, 이하 자이스)다.

▎칼 자이스는 뛰어난 광학기술로 시각 기술(visual technology)의 새 지평을 넓혔다. 서울 용산에 있는 자이스 비전 센터. / 사진:칼 자이스 제공
사례 1. 아폴로 11호가 임무를 맡은 인류 최초의 달 탐사. 1969년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은 여행자들처럼 기념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이 사진은 훗날 전 세계 현대사 교과서에 실리게 된다.

사례 2. 1882년 결핵균 발견, 1883년 콜레라 병원체 발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세균을 현미경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인류는 생명을 위협하던 큰 재앙을 비껴갈 수 있었다.

두 사례에 등장한 카메라와 현미경은 모두 독일의 광학회사 ‘칼자이스’ 제품이다. 1846년 정비공 칼 자이스(독일어: Carl Zeiss 카를 차이스)가 독일 예나에서 정밀역학과 광학을 연구하는 공방으로 시작한 자이스는 광학기기 제조업체 가운데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독일 오버코헨에 본사를 둔 자이스는 2만8000여 명이 종사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다. 전 세계 40여 개국에 50여 개 영업·서비스 지사, 30여 개 공장, 25개 연구개발 센터를 둘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1850년대 세계 최초 조립식 현미경 제작을 시작으로 세계 최초 수술용 현미경 제작 등 인류가 하기 어려운 ‘정밀한 눈’ 역할을 하며 혁신적 광학 기술력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자이스는 주력 사업인 현미경뿐 아니라 의료기기, 반도체, 3차원 입체측정기, 안경·카메라 렌즈 등으로 사업 분야를 확대해왔다. 나노미터 크기의 미세한 구조를 자랑하는 현미경 사업은 전 세계 관련 기업 중 유일하게 광학현미경, X레이 현미경, 전자현미경 등 가장 광범위한 포트폴리오를 자랑한다.

광학기술이라는 한 우물만 파왔지만 기업사(史)는 ‘우여곡절’로 가득한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세계대전 후 동서독으로 나뉜 자이스, 상호 분쟁, 약 40년 만의 합병, 대규모 구조조정 등 파란만장한 시간을 자이스는 우직하게 견뎌냈다.

자이스는 지금도 무섭게 성장 중이다. 사업의 90% 이상이 해외시장에서 이뤄지고 있는 자이스는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매출 50억 유로를 초과 달성했고, 그룹 수익도 사상 최고인 5억6000만 유로를 기록했다. 자이스 코리아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지난해 1312억원을 달성하며 1986년 창립 이래 최대 실적을 일궜다. 2010년에 비해 168% 성장한 수치다. 6월 말 자이스 사무실에서 만난 피터 티데만 자이스 코리아 대표는 “자이스의 경쟁력은 회사 철학인 과학, 기술, 사회정신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흔들림 없이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기본은 과학기술이다


‘이론과 실천을 결합해 과학을 진보시킨다.’ 자이스는 창립할 때부터 과학자의 수를 근거로 모든 경영 계획을 입안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과학자 직원 수에 따라 연구실과 설계실, 실험 작업실 수와 크기가 결정됐다. 칼 자이스의 설득으로 공동 CEO로 합류한 물리학자 에른스트 아베는 과학기술이 사업으로 인해 퇴색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연구개발(R&D)은 자이스의 ‘특기’로 꼽힌다. 현재 매출의 약 10%를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연구 인력만 전체의 11~12%를 채용한다. 현재 직원 2만8000명 중 3000여 명이 연구 분야에 종사한다. 상당수가 박사 출신이다.

창립 초기부터 그랬다. 젊고 유능한 물리학자와 엔지니어는 동독에 있는 예나에 몰려들었다. 당시 예나는 독일에서 계획적인 과학 육성이 이뤄지는 ‘지식과 공업의 도시’였다. 미국이 소련의 점령지 예나에서 고위직 과학자와 기술자를 서독으로 데려간 것도 ‘두뇌 유출’이었다.

뛰어난 광학기술을 도입한 자이스의 현미경은 수많은 연구 성과에 기여했다. 생물학 세포 연구와 염색법을 사용한 사진 촬영으로 명확한 연구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고, 결핵균체도 발견할 수 있었다. 과학 발전에 이바지해 노벨상을 수상한 30명 이상의 과학자가 사용한 현미경은 모두 자이스 제품이었다.

과학기술에 천착한 역사는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혁신 솔루션 제품으로 이어졌다. 자이스는 매년 평균 최소 400여 개 기술특허를 출원한다. 일하는 시간으로 따지면 특허가 하루에 약 2개 정도 나오는 것이다. 올해 6월까지 따낸 특허 수만 500개 정도다. 티데만 대표는 “최근 3년 이내 이뤄진 매출액 증가는 대부분 신제품 덕분”이라며 자부했다.

의료기기에서도 자이스의 과학기술이 돋보였다. 자이스의 광학기술과 극도의 정밀성으로 개발한 의료용 펨토초 레이저 장비 ‘비쥬맥스(VisuMax®)’는 자이스 스마일 수술을 가능케 했다. 일명 ‘스마일 라식’이라고 알려진 ‘자이스 스마일(ZEISS SMILE: Small Incision Lenticule Extraction)’은 안과 수술의 혁신으로 주목받았다. 현대 시력교정술인 라식·라섹 수술이 일상화되며 부작용에 대한 연구도 적지 않았다. 안구 표면을 깎아내 통증이 있던 라섹의 대안으로 라식이 나왔다. 라식은 각막 절편을 만들어 살짝 드러내 레이저 시술을 하고 각막을 덮는 기술이다. 통증이 없는 반면 각막 절편 생성으로 인한 각막신경손상으로 안구건조증이 생길 수 있다. 이런 라식·라섹의 단점을 보완한 3세대 시력 교정술이 바로 자이스 스마일이다. 스마일은 각막 내부에 레이저로 시력교정 도수만큼 작은 조직조각을 만들어 2mm의 각막절개로 제거한다. 절개부위가 작아 각막 손상을 최소화하고 통증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한 수술이다. 스마일은 전 세계 65개국에서 100만 번 이상의 수술 기록을 가졌다. 국내에서도 충분한 임상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40여 곳의 안과에서 자이스 스마일을 시행하고 있다. 자이스의 의료기기 사업부는 80% 이상이 안과로 진출해 있다. 백내장 수술을 할 때 삽입하는 인공수정체(IOL)를 단초점 렌즈가 아닌 다초점 렌즈로 국내에 처음 도입한 것도 자이스였다.

한반도 분단 역사 닮은 두 개의 자이스


▎ZEISS MeRiT neXT® (반도체 공정 마스크 리페어 장비) / 사진:칼 자이스 제공
광학기기에서 의료기기까지 사업 영역이 확대된 데는 이유가 있다. 첨단을 달리던 연구개발력으로 기업을 키우는 것도 좋지만, 동시에 인류 공영에도 이바지해야 한다는 자이스의 철학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다. 티데만 대표는 “자이스는 ‘선도적 연구, 극도의 정밀성과 최고의 품질, 사회적 책임’이란 가치를 무겁게 느낀다”고 설명했다.

늘 ‘세계 최고’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이 기업은 순탄함과 거리가 멀다. 자이스는 정치적 풍랑이 심했던 근현대사의 아픔을 몸소 체험한 기업이다.

“사나운 광풍에 배는 점점 서쪽으로 떠내려가 결국 표류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근처 섬으로 가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타고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으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익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로빈슨 크루소이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대학교 아민 헤르만 교수는 자신의 저서 『우리가 할 수 없으면 누구도 할 수 없다』(삼성경제연구소)에서 서독으로 차출된 과학자들을 로빈슨 크루소에 비유했다.

자이스 과학자들에게 종전 직후 1945년 4월 미군이 동독 예나에 있는 과학자, 설계자, 기술자 77명을 트럭에 태워 서독 오버코헨으로 옮겨갈 때 “우리는 두뇌를 뺏어간다(we take the brain)”고 말했다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는 ‘기술력 전쟁’이 한창이었다. 미국은 독일의 연구개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입수하고 최대한 이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에 의해 자이스의 첫 고향인 예나에서 서독으로 차출된 사람은 가족까지 1300여 명.

몇 년 후 독일엔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고, 자이스도 동서 두 개로 쪼개졌다. 1948년 소련이 예나 재단기업을 몰수하면서 피난한 직원들은 오버코헨으로 이동했다. 수백 명에 불과하던 오버코헨 공장엔 갑자기 세 배가 넘는 인원이 문을 두드렸다. 서독과 동독의 관계가 정치적으로 냉각되며 문호는 막혀버렸다. 두 회사가 기나긴 역사 끝에 재회한 건 1991년이 돼서였다.

당시 서독의 오버코헨은 예나와 같은 과학·공업도시가 아니었다. 황무지에 던져진 과학자들은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그럼에도 정밀한 기술에 대한 원칙을 고수했다. 오버코헨 공장 건설도 거의 제로에서 시작했다. 오버코헨 자이스 과학자들은 가장 먼저 안경렌즈 개발에 착수했다. 사실 전후 당시 시계와 라디오, 카메라 등의 수요가 엄청났다. 품질을 약간 포기하면 생산력을 높이긴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이스는 ‘제품의 품질은 적어도 전쟁 이전의 예나 품질에 필적해야 한다’는 원칙을 관철했다. 최고 수준의 정밀성을 달성하기 위해 세세한 계획을 세울 때마다 새로운 제조 시스템을 도입했다. 공장 건설 초기엔 매년 늘어나는 적자를 감당하다가 1952년 중반부터 수익이 지출을 상회하게 됐다.

동서독 대립이 격화될수록 두 자이스의 갈등도 깊어졌다. 트레이드 마크 분쟁도 치러야 했다. 1954년 ‘칼자이스’란 상호를 누가 쓸 건지 다투다 급기야 소송으로 이어졌다. 동독 역사상 가장 긴 소송이었다. 1971년 런던 협정으로 오버코헨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1991년 독일은 통일됐지만 기업의 통합은 녹록지 않았다. 서로 협업은커녕 간첩(스파이)으로 인식했다. 통합의 당위성은 누구나 알았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혼란의 시기였다.

통일 당시 동독과 서독의 경쟁력은 이미 차이가 나 있었다. 동독 노동자의 생산성은 서독의 30% 수준이었지만 직원이 6만 명(서독 8000명)이던 예나 자이스의 기술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동독 계획경제의 보석(jewel)’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1991년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정반대의 평가 진단을 내렸다. “동독 예나 칼자이스는 자유경쟁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함께 갈 수 없는 기업이다.”

결국 자이스는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한다. 이미 19세기에 노동자들의 권리를 명시한 기업으로서는 비판과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서독과 달리 국유 형태로 유지되던 예나 자이스의 직원 6만 명은 갑자기 거리에 나앉게 됐다. 정리해고 방침이 알려지자 예나 자이스 노동자 2만 명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예나 자이스는 수년간 직원을 20분의 1 수준인 3000명으로 줄였다. 그럼에도 해고된 직원들을 챙겼다. 예나의 한 공장에 ‘비영리 자격취득 회사’ 사무실을 만들어 정보통신 관련 기술 재교육을 실시했다. 대상은 대부분 일자리를 잃은 전직 직원들이었다.

‘더욱더 위대한 행위’ 칼자이스 재단 설립


▎칼 자이스 재단을 설립한 공동 CEO이자 물리학자 에른스트 아베.
인원이 정리되고 나자 1995년부터 의료용 장비와 현미경 사업부로 재편해 본격적인 역할 분담이 시작됐다. 19세기 말 하루 8시간 노동을 도입했던 회사는 24시간 근무체제로 전환했다. 1주일에 60시간씩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보너스와 휴일을 반납했다. 동서독 자이스 통합 10년은 암흑기였다. 2000년 예나 칼자이스는 다시 흑자로 돌아섰다. 피터 티데만 대표는 “직원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의 자이스 정신(One Zeiss Spirit)’을 공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자이스는 ‘사회적 책임’이 제도로 구현된 곳이다. 이 기업을 이해하려면 매우 이상적이고 독특한 지배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가족 경영이나 개인 소유 구조가 아니다. 동독 예나에 있는 칼자이스 재단은 비상장 회사인 자이스 그룹을 단독 소유해 장기적 전략을 제시하고 소유권의 안정성을 보장한다. 재단에는 주주가 없고 매출 이익은 연구개발 투자로 이어진다. 티데만 대표는 “자이스 재단의 이익 개념이 기업 이윤과는 좀 다르다”며 “과학 발전은 반드시 사회적 기여로 이어져야 한다는 창립자들의 정신이 재단 설립의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에른스트 아베는 칼 자이스가 세상을 떠나고 1889년 재단을 설립했다. 아베는 평생 과학자의 삶을 지키고 싶어 했다. 비즈니스와 연구개발의 결합을 원칙으로 삼아 자연의 신비에 대한 통찰을 산업에 이용하고자 했다. 아베는 자신의 재산은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간 덕에 얻은 것이므로 자손들에게 남기지 않고 공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영 지분의 일부를 받은 그는 1886년 초기 자이스부터 자연과학 분야의 학술 연구 촉진을 위해 수익의 일부를 예나대학에 기부하는 동시에 개인 경영이란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한편 국영기업으로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그는 딜레마에 빠졌다. 재단법인은 이 부분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피터 티데만 칼 자이스 코리아 대표는 “자이스는 과학, 기술, 사회정신 세 가지 원칙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장비는 ZEISS O-INSPECT (멀티센서 3차원 측정기). / 사진:전민규 기자
아베는 1896년 재단 산하 회사들의 기업 이윤을 올바르게 활용할 방법을 정했다. 기업 운영, 노동 관계법, 공익의지를 반영한 정관을 만들었다. “일부는 투자 기금으로 기업에 남기고, 일부는 사원에게 배당, 나머지는 학술 분야에 쓴다”는 회사 정관은 당시 매우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규정된 휴가 권리가 포함됐다. 근속 연수와 상관없이 모든 사원에게 연간 휴가 12일을 보장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휴가가 사실상 전무했던 시절이었다. 퇴직금 도입도 신선하다. 3년 이상 근무한 직원은 회사 측에서 해고 통지를 하면 퇴직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됐다. 티데만 대표는 “퇴직금 제도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도 가능하면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도록 일종의 보장을 의미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외에도 ‘이익분배, 근무기간에 따른 차등적 연금 지급의 문서화, 산재 보상, 하루 8시간 근무’ 등은 세계 ‘최초’로 이뤄진 노동개혁이나 다름없었다. 이 내용이 놀라운 이유는 처음이어서만이 아니다. 무려 140여 년 전 제정돼 지금까지 한 번도 고쳐지지 않은 채 법적 구속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 덕분이다. 혹자는 “아베의 현미경 이론이 ‘위대한 행위’라면 칼자이스 재단 설립은 ‘더욱더 위대한 행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직원들의 복지에 힘쓴 이유는 방적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60세에 타계한 아버지와 가족들의 고충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자이스는 공업이 후대까지 지속되도록 소유권을 재단에 양보했다. 현재 자이스 직원들의 높은 애사심은 아베의 정신을 받들기 때문이다. 피터 티데만 자이스 코리아 대표는 거듭 ‘계승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성숙한 조직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며 “자이스가 시간이 지나 어떤 리더를 만나도 꾸준히 독립적으로 자생하고 변화할 수 있으려면 한 가지 원칙만 잊지 않으면 된다”며 덧붙였다. “바로 칼자이스의 창립 정신이다.”

-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201808호 (20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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