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People

Home>포브스>CEO&People

허영구 네오바이오텍 회장 

韓 임플란트 업계의 에디슨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글로벌 임플란트업계에서 한국은 꽤 ‘핫’한 시장이다. 두터운 임플란트 수요층, 우수한 치과의사들과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까지. 삼박자가 어우러져 가장 빠르게 성장한 시장이 됐다. 특히 허영구 네오바이오텍 회장은 한국 임플란트 1세대로 지금까지 제품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허영구 네오바이오텍 회장은 이순(耳順)의 나이에도 임플란트, 수술기구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는 “임플란트 시술 대중화를 꿈꾼 지 20년이 지났다”며 “이젠 글로벌 대중화를 위해 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능력과 수준을 정작 우리 자신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이오헬스 산업 분야의 경쟁력도 그중 하나입니다. (중략)…우리나라는 치과 임플란트 세계 5위 세계적 기술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3대 중점육성 산업’을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임플란트란 인공치아 시술을 말하는데, 주위의 치아나 조직에 손상을 주지 않고, 사라진 치아의 거의 모든 기능과 외모를 되살리는 수술법이다. ‘틀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한 현대 치과 기술의 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언제부턴가 한국은 임플란트 분야에서 세계적인 시장이 됐다. 글로벌 1위 임플란트 기업 스트라우만에 따르면 한국이 인구 1만 명당 임플란트 이용자가 500명으로 세계 1위였다. 독일, 스위스, 미국, 일본, 영국, 중국 등 주요 시장을 모두 제친 셈이다. 스트라우만은 시장 보고서에서 “한국의 고령화 진행으로 임플란트 수요 증가가 가속화됐고, 고난이도 임플란트 시술을 수행할 수 있는 의사 인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유가 또 있다. 왜 의사들이 본격적으로 임플란트 시술을 하기 시작했을까. “시술이 안전하고 편해졌기 때문입니다. 치과 치료 하면 ‘통증’이 떠오르니 환자들은 치료를 차일피일 미루는 게 예사죠. 심지어 10년 전만 해도 임플란트를 심을 때 마취 후 망치(?)를 활용했다는 게 믿어지세요? 글로벌 시술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최근 서울 구로구 네오바이오텍 본사에서 만난 허영구(60) 회장이 그 의문에 답을 해줬다. 그는 치과에서 망치(?)를 없애고, 수일 이상 걸리던 임플란트 시술도 당일 치료가 가능케 한 인물이다. 직접 개발한 제품도 수십 가지다. 대표적으로 위턱에 임플란트하기 위해 뼈를 이식할 때 상악동을 들어 올리면서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멤브레인-세포막)을 다치지 않게 하는 드릴, 세멘(임플란트 접착제)에 의해 보철이 유지되는 동시에 나사를 풀고 조임에 따라 보철물을 분리 또는 장착할 수 있는 ‘SCRP’(Screw-Cement-Retained Prostheses)라는 새로운 개념의 임플란트 보철 시스템도 그가 개발했다. 어려운 용어지만, 최대 한 달가량 걸리던 임플란트 시술을 몇 시간 만에 끝낼 수 있게 해준 제품들이다.

이 밖에도 그는 실패한 임플란트를 쉽고 안전하게 제거하는 방법과 임플란트 염증을 치료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또 흡수된 골(骨)을 재생할 수 있는 멤브레인도 그의 머리를 거친 제품이다. 정부도 그 공을 인정했다. 지난 5월 24일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가 주최한 ‘제12회 의료기기의 날’에서 허 회장이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식약처는 선정 사유로 “임플란트 시술 편리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안전한 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공로를 인정했다”고 밝혔다.

허 회장은 지금도 치과계에서 계속 ‘무언가’을 만드는 사람으로 통한다. 한국 치과계의 ‘에디슨’ 같다는 호칭도 여기서 비롯된다. 다소 늦은 나이인 49살에 사업을 시작한 ‘늦깎이’ 창업가는 “사업을 할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며 얘기를 이어갔다.

어떻게 사업을 시작했나?

불편함을 느끼면서 시작됐다. 나도 치과 의사다. 임플란트 시술을 하면서 환자를 마취시키고, 망치로 때리는, 의사도 뭔가 불안하고, 환자는 두려워했다. 잇몸에 구멍을 내는 게 어디 쉽나. 세게 때리고 마취가 풀리면 현기증이 난다. 이 방법을 세계적으로 30년 가까이 썼다. 치과대학에서 그렇게 배웠으니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냥 직접 방법을 찾아보자는 생각에 제품을 개발했고, 2006년 오스케어란 회사를 차렸다. 그때 나이 49세였다.


오스케어? 현재 네오바이오텍의 전신인가?

오스케어가 SCRP 보철 시스템에 필요한 인공뿌리(픽스처), 지대주(어버트먼트), 보철(크라운-인공치아) 등 각종 요소를 만들었다. 주문이 폭주했다. 감당할 수 없어 끌어모을 수 있는 자금을 전부 모아 공장과 시설을 가진 네오바이오텍을 인수해 합병했다. 주위에서 쓰러져가는 회사를 샀다고 미쳤다고 손가락질했다. 어찌 보면 새로운 제품을 써보고 우리도 달라는 치과의사들 성화에 사업을 시작한 셈이다.

사업이 날개를 달았겠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단 기존 네오바이오텍이 외국 제품을 치과의사에게 팔았는데 사후관리가 잘 안 됐다. 인수 후 신제품을 영업하려 해도 잘 먹히지 않았다. 인수 후에도 2년간 후유증이 남았다. 게다가 제품 독점권 계약을 했던 회사와도 특허권 무효 논란, 명예훼손 등 여러 분쟁 이슈가 있었다. ‘이러려고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닌데’란 아쉬움도 많이 들었다. 제품 개발을 진두지휘하면서 법원을 오가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제품 개발에 매진하기 쉽지 않았겠다.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 임플란트업계가 빠르게 커지는 과정에서 업체들이 경쟁하면서 겪은 ‘성장통’ 정도라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특허권은 지켜냈고, 명예훼손도 무혐의로 처리됐다. 한편에선 우리 신제품을 써주는 치과의사가 많았으니 제품 개발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사실 내 목표는 명확했다. 1998년부터 디지털시대엔 새로운 임플란트 수술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치아를 뽑은 뒤 임플란트를 바로 심는 발치 즉시 식립(植粒)과 임플란트 식립 후 즉시 보철물을 만들어 끼워주는 ‘즉시부하’(즉시로딩·immediate loading)였다. 환자가 내원하면 콘빔CT를 찍고, 환자 치아의 본을 떠 치과 내 임플란트 3D 프린터로 수술용 가이드와 치아를 만든다. 수술용 가이드를 이용하니 어떤 의사가 해도 사고가 나지 않는다.

이제 임플란트 시장이 그렇게 바뀐 건가?

많이 달라지긴 했다. 다른 업체도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많은 의사가 이 방법에 공감한다. 20년간 강단에 서면서 설파했지만, 아직도 정상적으로 심은 임플란트가 자리를 잡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는 의사가 많다. 사실 디지털 임플란트는 새로운 세상이다. 시술이 편해지고, 전 세계 수많은 치과의사가 시술 사례를 공유할 수 있다. 빅데이터를 참고하고, 시술이 편한 키트에 시간도 적게 걸리면 전체 비용이 낮아진다. 결국 치과의사, 환자 모두 ‘윈윈’할 수 있게 된다.

발명가 같다. 원래 뭔가 만드는 걸 좋아했나?

자라온 환경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만든다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집이 참 가난했다. 다들 치과대학을 졸업했다고 부유한 줄 아는데, 등록금은 모두 방학 때 일해서 벌었다. 당시 등록금 70만원을 벌기 위해 구두닦이, 풀빵장사, 과일장사, 호텔 웨이터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놀러 다니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어려운 학업도 나에겐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치과 개업해도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실제 개업하고 돈을 많이 벌었다. 지방에서 페이닥터(월급의사)로 일하다 경상남도 의령에 치과를 차렸다. 1988년 개업해서 1993년까지 참 잘됐다. 그렇게 점심도 굶어가며 환자를 보던 중 ‘뭔가’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1990년 경남 마산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임플란트를 처음 접했다. 다 접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아내 빼곤 다 반대하더라.(웃음) 치과를 후배한테 넘기고, 무작정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고 들었다.

미국 UCLA에 임플란트 단기 1년 교육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단기 어학연수 과정을 다니다 정식으로 보스턴대학 보철과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레지던트 과정이니 공부도 해야 하고, 환자도 봐야 했다. 환자를 봐도 돈을 주지 않았다. 힘들었다. 그러다 지도교수가 ‘치아에 닿는 강도는 어떻게 측정하지’라고 던진 말이 머리를 스쳤다. 당장 공구점과 도서관을 돌며 측정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연치아와 인공치아에 어느 정도 힘이 가해져야 느끼는 지 측정하는 기계였다. 다들 놀랐다.

그때부터 개발자의 길에 들어섰나?

그런 것 같다. 특허도 내지 않고 그냥 석사논문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1997년 9월 귀국 후 몇 달 후 한국은 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무일푼이었다. 그래서 가톨릭대 교수로 일하면서 박사논문을 준비했고, 석사논문의 심화 버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때부터 임플란트 시술법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고 수없이 학회를 돌며 아이디어를 내고, 공유했다. 그때도 혼자 골방에서 실험적인 제품을 만들어보곤 했다. 지금은 매년 GAO(글로벌 힘플란트 연구회) 라는 학술포럼을 열어 전 세계 치과의사를 한국으로 초대해 수술 케이스를 공유한다.

지금은 임플란트 업계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한국은 세계적인 수준의 치과의사들과 기업이 포진한 곳이다. 환자도 임플란트 시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나라가 됐다. 이제 미국과 유럽에 출장 가면 유학 시절과 대접이 사뭇 다르다. 한국이 대단한 나라가 됐음을 느낀다. 여기에 IT, 5G 통신, 3D 스캐너·프린터 등 각종 기술이 발전하면서 임플란트 업계는 또 다른 변신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치과 진료도 직접 하고 있지 않나?

난 기업인이기 이전에 치과의사다. 매주 수요일은 구로 본사가 아닌 청담동 치과에서 하루 종일 진료를 한다. 직접 환자를 만나고, 시술하면서 환자들이 느끼는 불편함과 치과의사로서 생각했던 개선점을 정리해본다. 의사, 환자가 느끼는 불편함 모두 나에겐 해결해야 할 ‘문제’다. 현장은 그걸 내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역시 연구개발(R&D) 아니겠나.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에서 제대로 쓰일 때 느끼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신기술도 빠르게 발전해 임플란트업계에서 응용해볼 만한 기술도 많아졌다. 새로운 형태의 시술법이나 도구를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덕분에 배울 게 산더미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니 이런저런 제품 개발을 고민하느라 며칠 동안 멍할 때가 많다. 더불어 젊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좀 더 적극적으로 들어볼 생각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뜨거운 열정을 가진 청년이 많다. 이들과 함께 업계를 놀라게 할 제품을 선보이고 싶다.

201907호 (2019.06.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