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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환이 만난 혁신 기업가(7) 신경철 태극당 전무이사 

34세 청년이 73년 전통을 재해석하는 방법 

정리=김민수 기자 kim.minsu2@joins.com·사진 김현동 기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2015년 리모델링을 거친 태극당 2층 벽면 한편에 쓰여 있는 문구에 시선이 멈췄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이 다시 대중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약 4년 전부터다. 태극당 빵집 손주 신경철(34) 전무의 젊은 시도로 1970년대 태극당 전성기를 이끈 창업주 고(故) 신창근씨의 안목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태극당 입구에 선 신경철 전무. 천장의 대형 샹들리에는 1973년 장충동으로 이전했을 때 창업주가 주문 제작했다. “1970년대에 호텔 이외에 샹들리에를 설치한 곳은 저희밖에 없었죠”라고 말하는 신 전무에게서 창업주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太極 식빵’ 간판과 원목 매대들도 그대로 보존했다.
‘브랜딩’이 기업의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다. 이 시대 소비자들은 기업들의 각종 판매촉진 활동이 어떤 방식을 띠든지 귀신같이 감지한다. 진정성 있는 스토리가 없다면 아무리 잘 만든 콘텐트라도 ‘구독’과 ‘좋아요’를 얻기 힘들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광고와 마케팅에 질린 사람들은 더욱 심플하고, 위트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에 끌린다. 그 메시지가 시각적으로도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전달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 광복 직후에 문을 연 서울 최초의 빵집 태극당을 3대째 이어가고 있는 신경철 전무는 선대의 품질과 스토리를 정제된 브랜딩과 컬래버레이션으로 풀어내면서 제2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빵집인 태극당을 3대째 이어가고 계시다. 한 세대를 잇기도 힘든데 3대를 이어가고 있다는 게 대단하다. 가업을 잇게 된 계기가 있었나?

2012년에 입사해서 1년 반 정도 카운터를 보면서 매장 일을 도왔다. 그러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는데 바로 한 달 뒤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위기감에 갑자기 뛰어들게 됐다.

그렇게 2012년부터 태극당을 이끌게 됐다. 당시 20대였을 텐데 앞이 깜깜했을 것 같다.

매출을 처음 알았을 때 충격이 컸다. 하루하루 겨우 명목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공장 직원과 아르바이트까지 포함해서 스무 명이 채 안 됐다.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는 할아버지의 이름이 서울에서 가장 소득세를 많이 낸 사람 10위권에 항상 들어가 있었다.

아버지의 병환과 할아버지의 별세가 연이어 닥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사실 그때는 힘들어할 여유도 없었다. 당장 직원들 월급 주고, 세금 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태극당을 운영하기 전에는 뭘 했나?

20대 때 열심히 놀았다.(웃음) 그러다 준비 없이 태극당 운영을 맡게 되자 그동안 빵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을 깊이 후회했다. ‘언젠가 이어받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퇴근 후 제빵을 배웠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서 최고급 페이스트리를 만들어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단팥빵이라는 걸 깨달았다.

고민될 땐 본질로 돌아가


1973년에 지어진 건물을 2015년에 리모델링했다. 옛것을 현시대에 맞춰 재해석한다는 게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다.

무엇인가 결정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항상 ‘할아버지,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외부에서 가맹점 제안이 들어왔을 때도 할아버지가 직영점만 고집하셨던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해 거절했다.

중구의 랜드마크인 태극당 매장 리모델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낡은 태극당 건물을 보수하고 생산설비를 제대로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당시 모나카 아이스크림이 품절될 때가 많았는데 생산을 못 해서 품절된 거였다.

부친께서 반대하진 않으셨나?

한 달여 공사 기간 동안 매장 문을 닫아야 할지 고민했다.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장사는 해야지, 무슨 말이냐” 하셨다. 아버지의 원칙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한 달간 다른 공간을 빌려 운영했다. 비용은 훨씬 많이 나갔지만 유산 상속과 증여부터 건축, 공사와 관련된 많은 부분을 배웠다.

리모델링이 힘든 이유는 어디까지 유지하고 어디까지 버릴지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둘 사이에서 적정선을 잘 지켰고, 이제는 7080세대부터 20대까지 찾는 장소가 됐다.

옛 멋과 추억을 간직하는 동시에 어떻게 하면 더 깔끔하게 정리할지 스스로 기준을 세웠다. 사 남매가 머리를 맞대고 어렸을 때 태극당의 모습을 그려보니 브랜딩의 방향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고급스러우면서도 튀지 않는 걸 추구하셨다.

사 남매가 어떻게 뭉칠 수 있었나?

아버지는 9남매의 장남으로 누님이 5명이셨다. 저도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아들로서 책임도 있지만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래서 태극당 운영을 결심했을 때 “어찌 됐든 내가 다 먹고살 수 있게 해줄 테니 지금은 무조건 도와달라”고 누나들을 설득했다. 리모델링을 할 땐 의견이 달라 많이 싸웠다.(웃음)

할아버지 때부터 일하고 있는 직원들과 의견 차이는 없었나?

기본적으로 장인분들을 믿고 맡긴다. 선대가 해오셨던 방식에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할아버지께서 상여금을 일일이 현금으로 챙겨주셨던 것도 재미있어서 그대로 하고 있다.(웃음) 직원식당에서 쓰는 식재료는 매일 어머니께서 직접 장을 보신다. 할머니께서 그렇게 하셨다.

말은 쉽지만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이었을 것 같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오신 발자취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태극당을 운영하려면 손주로서 당연하게만 여겨온 태극당이 왜 태극당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그러면서 차츰 어릴 때는 소위 ‘꼰대’라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다. 아버지는 항상 할아버지를 중심에 두고 계셨고, 할아버지는 사업 철학이 확고하신 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대들과 달리 나는 스마트폰을 쓰는 세대다. 옛 정신을 제 방식대로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풀어나가려 한다.

많은 2, 3세가 선진국에서 재무·IT 등 소위 ‘잘나가는’ 분야를 배우고 들어와 1세들의 역사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세의 전통이 2세를 거쳐 3세까지 이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는 항상 태극당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선대들을 연구하고 고민한다. 태극당 리모델링도 외부 업체와 2개월 넘게 디자인 작업을 하다가 마지막에 결국 무산된 적이 있다. 보기 좋고 실용적이긴 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태극당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기존 색깔을 최대한 유지하고 옛 디자인은 모두 남기는 방향으로 다시 시작했다. 대형 샹들리에와 태극당의 상징인 붉은 간판, 창업주의 경영정신이 깃든 ‘납세는 국력이다’ 표어, 원목 매대와 가구, 과거 겨울에 사용하던 라디에이터 그릴까지 그대로 보존했다.

젊은 3세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히려 반대로 철저하게 선대들의 원칙과 철학에 기반해 운영하고 계신 것 같다.

맞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 시대에선 어떻게 하셨을까 항상 상상한다. 오래된 가치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면 고인 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움직이는 것만이 답이라 생각한다.

리모델링 소식에 항의가 많았다고 들었다.

“손주 놈이 매장을 바꾸려고 하는데 잘못되면 안 된다”며 그대로 보존해달라고 전화도 오고 메일도 많이 받았다.(웃음) 태극당이 참 많은 분께 사랑받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옛 모습을 잘 살린 리모델링도 화제가 됐지만, 그 전부터 시작한 브랜딩 작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옛것을 개성 있게 홍보한다는 평이 많다.

원래부터 다양한 브랜딩 방식에 관심이 있었다. 2010년쯤부터 홍대 부근에 카페인데 와인을 같이 파는 가게가 많이 생겼다. 그때 자전거 타고 혼자 시장조사를 하면서 가게들의 인테리어나 브랜딩 방향을 노트에 적어두곤 했다. 태극당을 맡은 뒤로는 주위에 조언도 많이 구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나서 성심당 이사님을 무조건 찾아가서 브랜딩은 어떻게 하는지 여쭤보기도 했다.

브랜딩의 일환으로 ‘태극당 1946체’를 새로 개발한 것도 재미있다.

애플, 배달의민족, 현대카드 등 자기 색깔이 뚜렷한 브랜드들은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서체를 갖고 있다. 그래서 태극당이 처음 문을 연 1946년 이후의 자료를 모아 태극당 옛 서체를 복원했다. 나무판에 글을 쓰고 한 글자씩 정성 들여 파며 만들었던 옛날식 목판활자의 멋을 살리고 싶었다.

그 당시 매출로는 비용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텐데 리모델링, 설비 확충, 패키징에 서체 개발까지 과감하게 결정했다.

어차피 나중에 할 거면 지금 그냥 하자고 생각했고, 닥치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웃음)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태극당은 대한민국의 유산이다. 이 색깔을 잘 유지해 발전시켜야 하는 소임이 있다. 이런 인터뷰도 태극당 손주라서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또 아들이 태어나고 나니까 기반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다양한 업체와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색깔을 입히고 있는데.

지난해부터 ‘태극당 열리다’라는 슬로건으로 다양한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해왔다. 빵을 판매해서 나오는 수익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태극당이라는 브랜드가 하나의 아이콘이 되면 이걸 플랫폼 삼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패션 브랜드부터 IT, 주얼리, 맥주, 도서 등 다양한 업계와 협업하면서 우리만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컬래버레이션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무명 시인이 태극당에서 낭송회를 열면 그게 컬래버레이션이다.

미래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궁금하다.

태극당 3대 대표는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로운 수익 기반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2015년에 5년 단위로 목표를 세웠다. 35살까지 자체 유통망을 확보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40살까지는 제조법인을 세워 서울 직영 매장을 6곳 정도 확보하려고 한다. 지난해 ‘아크앤북’에 을지로점을 열었고, 8월엔 인사동에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 45살까지는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 손님들이 한국에 오면 무조건 들르는 빵집으로 만들고 싶다. 50살에는 젊은 감각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면 경영에서 손을 떼려고 한다.(웃음)

왜 목표를 5년 단위로 세웠나?

계절을 다섯 바퀴 정도 돌아야 경험이 쌓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70년 된 브랜드를 1~2년 만에 바꾸면 탈이 날 것 같았다. 100주년 때는 지금 색깔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200주년 정도가 되면 서울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될 거라 믿는다.


▎힙합 패션 브랜드 ‘브라운브레스’와의 컬레버레이션으로 탄생한 패키징과 앞치마.



▎이탈리아 스니커즈 브랜드 ‘수페르가’와의 컬래버레이션.



▎신경철 전무(왼쪽)와 김익환 한세실업 대표가 태극당 연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어린이 디자인 브랜드 ‘장차’와 컬래버레이션으로 탄생한 동화책 『 빵 아저씨 이야기』. 태극당의 장녀인 신혜명 부장(브랜드전략팀)이 할아버지(창업주 故 신창근) 이야기를 동화로 만들었다.



▎옛 멋을 살린 인테리어가 태극당 요소요소에 살아 있다.



▎신경철 전무(왼쪽) 와 1966년에 입사한 아이스크림 장인 한청수씨. 하루 평균 3000개씩 판매되는 태극당의 베스트셀러 모나카 아이스크림이 그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1980년대 태극당과 현재의 태극당.
※ 김익환은… 노동력 위주의 제조업인 한세실업에 IT를 접목해 성과를 내고 있는 혁신 CEO다. 한세드림, 한세엠케이, FRJ 등 패션 자회사들의 경영에 직접 참여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며 지난해 1조7000억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렸다. 최근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갖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908호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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