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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욱의 對話(1)]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 

“열린 소통 없이는 4차 산업혁명도 위기 극복도 없다”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김현동 기자
우리 경제의 위기는 곧 기업의 위기다. 포브스코리아는 삼성SDI 사장과 농심 회장을 역임한 손욱 전 회장과 함께 이 시대 위대한 경영 구루들을 만나 한국 경제의 위기를 헤쳐 나갈 고언을 듣는 시리즈를 기획했다. 첫 순서로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을 만나 혁신의 근간을 이루는 열린 소통 문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미중 무역 분쟁과 이로 인한 글로벌 경기 침체, 뉴노멀로 정의되는 저금리·저성장의 고착화, 수년째 ‘박스피’를 탈출하지 못하는 자본시장. 어느 것 하나 헤쳐 나오기 어려운 악재가 한국 경제의 숨통을 죄고 있다. 지난 4월 경상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서자 그간 낙관적 희망론을 밝히던 정부와 청와대마저 “경기 하방 위험이 장기화할 소지를 배제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을 드러냈다. 경상수지 적자는 유럽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2012년 4월 이후 7년 만이다.

손욱 전 회장과 강석진 전 회장은 우리 경제 앞에 닥친 위기 해결의 열쇠로 ‘열린 소통 문화’를 꼽았다. 비단 경제뿐 아니라 정부와 기업, 사회, 교육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의 퀀텀점프를 가로막은 최악의 장애물이 바로 소통 문화 부족이라는 지적이다.

강 전 회장은 국내 외국계기업 최장수 최고경영자(CEO)로 유명하다. 그가 사장에 취임했던 1981년 당시 한국제너럴일렉트릭은 직원 수 10명, 매출액 260억원의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21년간 CEO로 근무한 뒤 은퇴했던 2002년에 GE코리아는 종업원 1100명, 매출 4조원, 계열사 17개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강 전 회장은 은퇴 후에도 한국CEO컨설팅그룹 회장을 맡아, 혁신경영의 노하우를 후배 CEO들에게 생생히 전해주는 멘토로 활약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기회 아닌 위기 될 수도”


▎강석진 전 회장은 우리의 포지티브식 규제가 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규제 혁신이 아닌 혁파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욱: 우리 경제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 기업 중 어느 곳 하나 위기가 아닌 곳이 없고, 주력 제품들의 경쟁력도 떨어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위기가 일상화된 현실과 이를 극복할 고언을 강 회장님께 듣고 싶습니다.

강석진: 요즘 여기저기서 경제 위기를 말하는데, 사실 국가적 위기라는 게 정확한 진단입니다. 4차 산업혁명은 모든 과학기술과 문화가 융합해 새로움을 창조하는 시대를 말해요. 초융합 시대를 가능케 하는 열쇠가 바로 열린 소통 문화입니다. 기업과 정부를 떠나 모든 사회조직이 격의 없는 소통으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융합해내야 합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지만, 아쉽게도 이후론 아무런 준비가 없어요. 4차 산업혁명이 기회라고 말하지만, 반대로 꼴찌로 떨어질 위기의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손욱: 아널트 토인비는 인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정의했어요. 새로운 패러다임이 몰려오는 게 도전이라면, 그에 대응해 다시 도약하는 게 응전입니다. 한국은 1960년대 이후 커다란 산업화의 흐름에 올라타며 기적을 써내려갔지만, 이후로는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지 못했어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는 강 회장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세계는 1980년대 이후 벌써 융합과 복합을 통한 시너지 창출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뤘어요. 1990년대 후반 들어서면 구글과 페이스북, 알리바바, 텐센트 같은 거대 창조기업들이 탄생하기 시작하죠. 이게 불과 최근 20여 년의 얘기입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발휘하게 만들 것인가, 융복합의 가치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를 고민한 건데, 이걸 바꿔 말한 게 4차 산업혁명이에요.

강석진: 미국과 유럽, 일본은 이미 열린 소통 문화가 몇십 년 전부터 자리를 잡았어요. 현재 이들 나라는 정부 조직과 사회도 모두 열려 있죠. 이미 4차 산업혁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된 셈이에요. 우리는 어떤가요. 관료적인 규제가 많은 분야에서 발목을 잡고 있어요. 미국과 유럽은 ‘이건 하면 안 된다’는 것만 규제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환경 파괴나 국민 안전을 제외하곤 모두 자유죠. 우리는 일본에게 포지티브 시스템을 배웠고, 지금도 여전히 규제 공화국입니다. 규제로만 따지면 미국과 유럽에 80년 이상 뒤떨어졌죠. 변화의 골든타임을 이미 10년 전에 놓쳤어요.

규제가 모든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어요. 공무원은 규제 덕에 자리를 지킵니다. 국회의원도 이해관계자와 연결돼 새로운 규제를 만들어내죠. 대통령의 규제 혁신은 정치적 용어가 된 지 오래예요. 규제 혁신이 아닌 혁파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과 유럽은 다 하는데 왜 한국만 안 합니까? 다른 건 다 배워오면서 말이죠.

손욱: 우리는 어느새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는 나라가 돼버린 느낌입니다. 산업화 시대의 패러다임, 즉 소통이 아닌 상명하복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위에서 명령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줄은 알지만, 창의적이고 열린 토론 문화는 가져본 적이 없어요. 미국과 중국의 창조적 기업들이 세계를 재패하는 동안 우리는 새로운 산업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고 있어요. 창원 기계공단은 2008년이 정점이었고, 울산도 2011년, 구미도 2015년이 마지막이에요. 가진 게 20세기 성장 동력뿐이니 내리막길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ICT로 융합한 새로운 기업이 탄생하기는커녕, 젊은이들이 공무원에만 뜻을 두죠. 창조적 문화의 토양이 메말라 있습니다.

강석진: 열린 소통의 사회 문화적 정착이 가장 시급해요. 지금의 기업문화로는 잃어버린 골든타임을 회복하거나 기업가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모멘텀을 만들 수 없어요. 20년 전만 해도 한국은 기업가정신이 대단했던 나라입니다. 제 집과 땅을 털어 투자를 하고 사업을 일으켰어요.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안 합니다. 과거 산업화 시대는 리더가 모험을 무릅쓰고 밀고 나가는 조직문화에 익숙했어요. 모든 구성원이 이병철과 정주영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죠. 그러면서 상명하달의 조직문화가 우리 안에 자리 잡았어요. ‘노(No)’라는 말은 있을 수 없었죠. 1960년대 후반부터 2000년 대까지 그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GE에서 시작된 미국의 기업문화 혁신


▎손욱 전 회장은 창의적이고 열린 문화, 수평적인 조직을 만들자는 위기의식이 오늘날의 삼성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손욱: 2019년인 지금도 20세기 산업화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강석진: 세계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IT 기술이 널리 퍼지면서 창조적인 기술과 아이디어가 중요해졌어요.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은 모두 돈 없는 학생들이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로 주머니 털어 시작한 곳입니다. 이들이 5~6년 지나자 세계적 기업으로 급성장한 거죠. 과거에는 반세기 이상은 걸렸습니다. IT 혁명 이후의 변화상이죠. 미국도 1980년대 초반까진 관료적인 톱다운 문화가 지배적이었어요. 일본은 말할 것도 없었죠. 미국의 기업문화, 나아가 사회문화 전체를 오늘날의 열린 소통 문화로 바꿔놓은 이가 바로 GE의 잭 웰치 회장입니다. 젊은 나이에 CEO가 된 웰치는 ‘이래선 살아남지 못한다’는 위기감이 대단했어요. 모두가 관료적 사고방식에 갇혀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외부의 자극과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NIH(Not Invented Here) 증후군이 사회 전반을 지배했죠.

손욱: 웰치의 혁신을 직접 함께하셨습니다. GE도 웰치 전에는 관료주의에 찌든 공룡 아니었습니까.

강석진: GE와 웰치의 혁신은 한 기업의 성장이 아닌 오늘날 미국 사회의 열린 소통을 가능케 한 사회혁신 운동입니다. 회장 취임 후 웰치가 가장 먼저 한 건 조직문화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일이었어요. 그것도 가장 짧은 기간 안에 혁명적으로 바꾸는 게 목표였죠. ‘모든 경계를 허물고 관료주의를 무너뜨리자(Destroy Boundary, Destroy Bureaucracy)’는 슬로건을 내걸고 직위나 소속에 상관없이 토론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했어요. 거기서 출발한 게 바로 워크아웃 타운미팅입니다. 40만 명에 달하는 모든 GE 사업부가 매달 1~3회 1년 내내 타운미팅을 열었어요. 경영자를 비롯해 생산·기술·인사 부문의 간부, 현장 노동자, 구매 담당자, 노조 간부들까지 모두 참석했죠. 우리 사업부의 현재 문제가 무엇인지, 무엇부터 풀어낼 것인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모두 CEO가 아닌 직원들이 찾아냈어요. 영업과 기술, 생산, 회계, 노조 등 다양한 각도에서 문제를 들여다보니, 자연히 균형 잡히고 종합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죠. 타운미팅에 참여하면 직위 대신 이름만 쓴 명찰을 달았어요. 웰치도 그저 잭이라 불렀죠. 최종 결론에 대해 CEO는 절대로 ‘왜 이런 문제를 토론했느냐’는 질문을 하지 못해요. ‘내 생각과 다르다’는 말도 할 수 없죠. 안타깝게도 GE도 웰치가 물러난 이후론 당시의 혁신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손욱: 웰치의 기업문화 혁신이 어떻게 미국 사회 전반의 혁신으로 이어졌는지도 흥미롭습니다.

강석진: 타운미팅에서 합의된 문제 해결 방식의 80%가 그 자리에서 받아들여졌어요. 나머지도 좀 보완해달라는 정도였죠. 다양한 의견과 문화, 지식이 융합했으니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웰치 자신도 비관료적인 회사로 완전히 바뀐 GE의 모습에 충격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토론하니 회사의 문제들이 빠른 속도로 해결됐어요. 이전까지 연간 매출 성장률 3%면 경영을 잘했다고 평가받다가, 타운미팅 체제 이후 매출과 순이익이 10% 넘게 급성장했어요. 1990년대 중반이 되니 세계에서 순익을 가장 많이 내는 기업이 되더군요. 더 중요한 건 모든 구성원이 열정을 쏟는 회사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당시 미국 언론과 경영학자들도 ‘디스 트로이’라는 구호에 크게 우려했어요. 하지만 몇 년 지나 완전히 다른 회사로 재탄생한 걸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죠. 강성 노사분쟁도 완전히 사라졌어요. 노조와 경영자가 머리를 맞대 토론해서 문제를 해결한 덕분이에요. 언론이 앞다퉈 긍정적인 보도를 쏟아냈고, 다른 기업들도 너도나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도 GE식 열린 소통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죠.

구글이나 아마존 등은 이미 타운미팅 문화를 바탕으로 시작한 기업들이에요. 그러니 창업 5년 만에 세계적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미국이 초강대국 자리를 지키게 만든 배경이 됐어요. 유럽도 미국의 이런 변화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럽은 관료적 사고가 아시아만큼이나 셌죠. 그러다 신속히 열린 토론 문화를 받아들인 겁니다. 미국과 유럽은 이미 1990년대 중반 들어 열린 소통 문화가 기업과 사회에 완벽히 정착됐어요. 여기에 IT 기술혁명이 가세하면서 글로벌 혁신기업으로 성장한 겁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관료문화가 2019년인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규제도 그대로고요.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어도 인가를 못 받아요. 남들은 20년 전에 정착시킨 변화를 우리는 아직도 못 따라가고 있어요.

손욱: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이 우리 경제 전반의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신경영의 가장 큰 동기가 바로 창의적 기업 만들기였어요. 관리의 삼성에서 창의의 삼성으로 변신한 계기죠. 1960~1970년대만 해도 한국 최고 그룹이었던 삼성은 1980년대 들면서 책임 경영의 현대와 창조적 도전을 앞세운 대우에 밀리기 시작했어요. 당시 상명하복의 수직적 문화에서 가장 앞에 섰던 분이 이병철 회장이었죠. 경영수업 중이던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변하지 않으면 4류기업이 되고 망한다’는 위기의식이 대단했어요. 이병철 회장 작고 후 1988년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제2의 창업을 선언하고 자율경영이라는 경영이념을 선포했어요. 열린 문화를 만들어 맘껏 일하자, 기술을 중심으로 인간을 존중하며 창의적 기업을 만들자는 선언이었습니다. 이건희 회장도 웰치가 오면 항상 배석해서 그의 말을 경청했어요. 그래도 안 되니 나선 게 바로 신경영입니다. 삼성이 어느 날 갑자기 일류기업이 된 게 아니에요. 창의적이고 열린 문화,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자는 위기의식이 오늘의 삼성을 만든 거죠. 만약 당시 다른 기업들도 삼성의 혁신을 받아들였다면, 지금쯤 미국 못지않게 창의적 기업이 많이 나왔을 겁니다.

“CEO가 가치창조 못하면 부도덕한 것”


강석진: 실제로 1990년대 초중반 들면서 우리 기업들도 GE의 타운미팅을 배우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저도 기업을 찾아 직접 교육하고, 토론 문화 전문가를 보내서 가르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우리 CEO들은 관심에만 그치고 나머지 실무는 밑에 있는 간부들에게 모두 맡겨버려요. 단기간에 실적이 오르는 것도 아니니 어느새 흐지부지돼버리죠. 미국과 유럽식 모델이 정착되지 못한 이유예요.

열린 소통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선 CEO부터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밀고 가야 합니다. 조직원들이 열린 소통 문화를 받아들이고 임원들이 소통 전문가가 되도록 해야 해요. 타운미팅을 진행할 전문가(Facilitator)를 두고, 이들이 전 사업부를 돌며 지휘하고 제대로 하는지 수시로 점검해야 해요. 임원 평가 때도 열린 소통을 잘하는지를 영순위로 봐야 합니다. 우리처럼 회장이 결정하면 무조건 따르는 회사는 선진국엔 없어요.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손욱: 리더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애써 열린 소통 문화를 만들어도 사장이 바뀌면 망가지기 일쑤예요. 리더를 평가하는 축은 두 개입니다. 한쪽은 퍼포먼스, 즉 실적이고, 다른 쪽은 밸류, 즉 가치와 문화죠. 양쪽을 다 잘하는 사람을 최고의사결정권자로 올려야 해요. 우린 퍼포먼스는 좋은데 밸류가 약해요. GE의 구조조정은 그런 사람을 잘라내는 과정이었어요. 단기성과는 좋지만 장기적으론 조직에 마이너스가 되는 리더들이죠.

강석진: CEO에겐 실적도 중요하지만 리더십과 가치관, 즉 어떻게 인재를 양성하고 다양한 사람을 경영에 참여시키느냐, 활력 있는 조직으로 변화시키느냐가 훨씬 중요해요. 예전에는 모티베이션이라는 용어를 많이 썼어요. 하지만 관료적인 냄새가 강해 요즘은 ‘임파워먼트(Empowerment)’라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 조직 전체를 활력 있게 만들고, 조직원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문화죠. 그 사람의 직위나 나이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기업, 하고 싶은 일을 신나게 하되 실수하면 다시 방향을 찾게 돕는 기업. 이런 기업에선 구성원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주인의식이 회사 성장과 강한 조직의 바탕이 됩니다. 임파워먼트 안에는 심지어 후임 리더를 키우는 것도 포함돼요. 차기 CEO 후보군을 몇 명씩 키워놓는 것이죠. 우리는 후임자를 안 키웁니다. 자기 자리가 사라지기 때문이죠.

손욱: 인간은 본래 돈보다 자기 생각과 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받는다고 느낄 때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깊이 있는 정신문화에 관심이 없어요. 대신 월급과 승진에만 매몰돼 있죠. 열린 토론에서 얻은 깊이 있는 성찰 대신, 다른 사람 핑계를 대는 일에 더 익숙해요.

강석진: 한국에선 아직도 ‘문화가 순이익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매출 올리는 게 최고라고 말하죠. 타운 미팅 같은 건 시간 낭비고, 그 시간에 영업이나 뛰라고 해요. 이에 비해 선진국은 열린 소통 문화가 가치 창출로 바로 이어진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CEO는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부도덕한 자입니다. CEO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자 목표가 바로 가치 창조예요. 조직문화의 80%가 리더에게 달려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선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사람 중심의 경영이 자리 잡았어요. 우리는 어떤가요. 회장에게 기업의 비전을 물어보면 기가 막힌 얘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현장에선 회장님 사무실에 걸린 액자 속 얘기일 뿐이죠. 비전은 모든 구성원과 공유해야 합니다. 웰치는 자기 시간의 60%를 가치 창조와 비전 공유에 썼어요.

“질문 없는 한국식 교육으론 미래도 없다”

손욱: 한국에는 리더를 키우는 교육이 없어요. 열린 소통을 위한 교육도 없고, 사회적 과제를 깊이 탐구하는 과제 탐구형 교육도 없죠. 우리는 리더 양성 과정은 없이 오로지 성과만 이야기해요. 삼성도 GE를 벤치마킹해서 리더 양성 시스템 갖췄어요. 지난 몇십 년간 이어진 교육 방식부터 다 바꿔야 합니다. 선진국에선 입시와 지식 중심의 교육이 이미 1980년대 들면서 폐기됐어요. 아직도 20세기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강석진: 톱다운 경영, 퍼포먼스 위주의 기업 경영, 입시 위주의 교육이 여전한 게 지금의 한국 사회입니다. 모든 교육이 입시를 위해서만 존재해요. 과외가 일상화된 교육이 4차 산업혁명과 맞을까요? 혁명적으로 입시 위주의 교육을 싹 걷어치워야 합니다. 공대생이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나라에 미래가 있습니까?

서울대 MBA에서 초빙교수로 몇 년간 있었는데, 학생들이 질문은 안 하고 받아 적기만 하더군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도 특강을 했는데 질문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어요. 질문만 1시간을 넘기니 지도교수가 그만 마쳐야 한다고 말릴 정도였죠. 캠퍼스를 나와 호텔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학생 3명이 계속 따라오면서 질문을 던지더군요. 결국 호텔 로비에서까지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어요. 얼마나 창조적인 문화인가요. 과연 어느 쪽이 미래의 인재로 성장할까요.

손욱: 요즘 판교에 가보면 새로운 리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창조적 기업이라 하더라도, 내부 직원들부터 열린 소통 문화가 체질화돼 있지 않다는 데 있어요. 그들이 자라온 교육 시스템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리더, 즉 CEO가 앞장서려 해도, 허리 역할을 하는 중간 간부들이 변하지 않으면 어려워요. 신입사원 뽑으면 뭐합니까. CEO보다 더 옛날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데요.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이 될 인력 수급을 지금의 교육 시스템이 받쳐주지 못하는 겁니다.

강석진: 기업의 경우 노사 문제가 모든 걸 다 가로막고 있어요. 열린 소통 문화가 정착되면 이 문제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서로 소통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회사의 비전을 노사가 똑같이 자신의 꿈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열린 소통 문화만 정착되면 우리 경제는 정말 강력해질 겁니다. 나아가 이런 문화가 기업과 경영자의 비전을 넘어서 사회 전반을 움직이는 문화로 완전히 자리 잡아야 해요.

기업가정신도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합니다. 이병철, 정주영의 경영은 그 시대에 맞는 기업가정신이에요. 지금은 ICT 주도의 4차 산업혁명 시대입니다. 창조와 융합을 통해 과감하게 기술 개발에 나서고 실행하는 기업가가 필요해요.

※ 손욱 전 회장은… 40여년간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정통 ‘삼성맨’이자 국내 최고의 기술경영자(CTO)로서 평생을 혁신에 전념해왔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최측근에서 보좌했고, 삼성그룹의 프로세스 혁신과 정보 시스템 구축도 그의 작품이다. 삼성인재개발원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이후 농심에서 현역 생활을 마친 손 전 회장은 현재 한국형리더십연구회 회장, 감사나눔운동 전파 등 사회문화 운동으로 또 다른 혁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1907호 (201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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