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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대한민국 50대 부자] 불황의 그늘… 쪼그라든 한국의 富 

 

제조업이 주도하는 수출주도형 한국 경제의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미중 무역 분쟁에 이어 일본의 수출 보복이 설상가상 이어지면서 풍전등화에 내몰린 형국이다. 포브스코리아와 포브스글로벌이 함께 조사한 ‘2019 한국 50대 부자’의 재산 가치도 지난해 총 155조원 수준에서 올해는 17% 감소한 130조원대로 떨어졌다. 다만 자수성가형 부자의 강세는 올해도 이어졌고, 새롭게 슈퍼리치 대열에 합류한 이도 지난해보다 늘었다.

포브스코리아와 포브스글로벌이 ‘2019년 한국 50대 부자’를 조사해 선정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재산 규모 19조8022억원으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 2017년 조사에서 12위에 올랐다가 2018년 2위로 10계단이 뛰어오른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도 8조7224억원으로 2위 자리 수성에 성공했다.

올해 ‘한국 50대 부자’ 조사의 특징은 ‘재산 규모 감소’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지난해와 달라진 조사 방법이 전체적인 재산 감소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포브스코리아는 지난해까지 부부의 재산을 한 명의 재산으로, 25세 미만 자녀가 부모와 같은 주식을 보유한 경우에도 한 명의 재산으로 합쳐 산출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조사 대상자 한 명의 기업 보유지분과 배당금, 주식 매각을 통한 현금화 자산 등만 계산했다. 지난해까지 조사에 포함됐던 특수관계인 지분이 올해는 제외됐다.

조사 방식과 별개로 국내 경제·산업의 불황도 한국 억만장자들의 자산 규모 감소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올해 슈퍼리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상위 10명 중 지난해에 비해 재산이 늘어난 사람은 7위(3조7718억원)를 차지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10위(3조1825억원)에 오른 김범수 카카오 의장뿐이다. 더욱이 이들은 모두 자수성가형 부자다. 서정진 회장을 제외하면 상위 10명 중 오너가 출신 부자들의 자산 규모가 모두 지난해에 비해 쪼그라들었다. 50명 전체를 봐도 지난해 대비 재산이 늘어난 사람은 19명뿐이다. 올 들어 부자 순위에 처음 이름을 올린 4명을 제외하면, 절반이 넘는 27명이 지난해보다 재산이 감소했다.

반도체 위기, 재산 감소에 직격탄


이건희 회장을 필두로 한 삼성 오너가 직계는 올해도 50대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다만 이 회장을 제외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은 재산 순위와 규모가 모두 지난해에 비해 떨어졌다. 2018년 조사에서 8조4570억원으로 3위를 차지했던 이재용 부회장은 올해 조사에서 김정주 NXC 대표에게 자리를 내주며 4위에 올랐다. 재산도 지난해 8조4570억원에서 올해 7조1901억원으로 15% 줄어들었다.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서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영업이익 58조8867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잔치를 벌였던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들어 영업이익이 6조2333억원에 그쳤다. 2018년 1분기에 올린 15조6422억원과 비교하면 이익 규모가 60% 넘게 급감했다.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도 지난해 각각 16위, 19위에서 올해는 21위, 24위로 떨어졌다. 이부진 사장은 호텔신라의 주가 부진이 재산 감소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올 7월 16일 현재 호텔신라 주가는 8만4800원이다. 1년 전인 2018년 7월 16일의 10만500원과 비교하면 주가 하락 폭이 15.6%에 달한다. 이서현 이사장 역시 삼성물산의 패션 부문이 부진에 빠지면서 삼성복지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도체 업황 부진의 여파는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피하지 못했다. 지난해 조사에서 5조314억원으로 7위에 올랐던 최 회장은 올해 조사에선 3조3004억원을 기록해 9위에 올랐다. 지난해 1분기 영업이익 4조3673억원을 올린 SK하이닉스는 올 1분기 들어선 68.7%한 1조3665억원에 그쳤다. 지난해 7월 중순 9만원대였던 SK하이닉스 주가는 올 7월 들어 7만6000원대로 빠진 상황이다.

부자 순위 상위권에서 눈에 띄는 이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다. 두 사람은 각각 재산 규모 3조7718억원, 3조1852억원을 기록했다. 대내외 경기 부진에도 두 사람은 지난해 대비 28.1%, 14.4%의 재산 증식을 이뤄냈다. 박연차 회장이 이끄는 태광실업은 지난 1971년 설립된 이후 1980년대부터 미국 나이키 신발을 제조해왔다. 태광실업은 나이키 브랜드의 전 세계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2조원 대 매출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도 2373억원을 기록해 2017년 대비 11.6% 증가했다.

카카오 지분 15%를 보유한 최대주주 김범수 의장도 지분가치가 크게 오르며 지난해 13위에서 3계단 오르며 톱 10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말 10만3000원으로 장을 마친 카카오 주가는 올 7월 13만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카카오는 올해 1분기에 영업이익 277억원을 올렸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104억원 대비 166% 증가한 호실적이다.

‘흙수저’들이 일군 부의 확장


자수성가형 부자들의 활약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계속됐다. 2018년 50대 부자 순위에서 22명이었던 자수성가 부자는 올 들어 23명으로 늘었다. 올해 처음으로 50대 부자에 이름을 올린 뉴페이스가 4명이라는 결과도 자수성가형 부자가 국내 경제·산업계의 주류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부자 순위 상위 10명 중 자수성가형 부자는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5명으로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10위에서 올해 12위로 밀린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을 포함하면 한 명이 늘어난 셈이다. 특히 김정주 NXC 회장은 이재용 부회장을 제치고 7조4528억원으로 3위에 올랐다. 삼성과 현대로 대표되는 전통적 오너가 부자들을 제치고 서정진 회장과 김정주 회장 등 ‘흙수저’ 출신 억만장자들이 당당히 톱 3에 등극한 것이다.

뉴페이스들의 면면도 눈에 띈다. 부친인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지분을 상속받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제외하면 15위에 오른 김상열 호반건설 회장, 김정웅 GP클럽 대표,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 등이 모두 자수성가형 부자다. 이들이 영위하는 업종도 각각 건설, 화장품, 게임 등으로 다양하다.

1961년생인 김상열 호반건설 회장은 지난 1989년 광주를 기반으로 호반건설을 창립하며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최근 호반건설은 공격적인 M&A를 펼치며 건설업을 넘어 다양한 영역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춰 재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2017년 제주도 중문관광단지에 있는 퍼시픽랜드를 800억원에 매입해 레저업에 발을 들인 김상열 회장은, 2018년 들어서 법정관리 중이던 리솜리조트를 사들여 사업 확장에 나섰다. 올해는 덕평컨트리클럽과 서서울CC를 사들였고, 서울 남산의 랜드마크인 그랜드하얏트호텔 매각에서도 쇼트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유력한 인수 후보로 떠오른 상황이다. 이 밖에도 지난 6월에는 청과 도매법인인 대아청과 지분 51%를 인수해 농산물 유통업에도 진출했다. 포스코가 보유한 서울신문 지분도 매입해 본격적인 중앙 미디어 진출도 노리고 있다.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은 지난 1997년 네오위즈를 공동 설립한 IT벤처 1세대다. 크래프톤은 글로벌 히트를 기록한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출시한 펍지와 또 다른 히트작 ‘테라’를 만든 블루홀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장 의장의 크래프톤 지분율은 올 1분기 현재 보통주 기준 17.6%다.

주력 산업으로 떠오른 ICT와 바이오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은 재산 규모 1조474억원으로 올해 처음 한국 슈퍼리치 대열에 합류했다. 전 세계에서 메카히트를 기록 중인 온라인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통해서다.
‘한국 50대 부자’ 조사는 단순히 대한민국의 부자 순위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의 면면을 살핌으로써 우리나라 주력 산업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를 처음 시작한 2005년과 14년이 지난 2019년의 부자 순위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부(富)의 사이즈 자체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사실이다. 2005년에도 1위에 오른 이건희 회장의 당시 재산은 1조9398억원에 불과했다. 올해 기록한 19조8022억과 비교하면 14년 사이 늘어난 재산 비율이 920%에 달한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등 삼성전자의 주력 사업이 글로벌 최상단에 자리 잡으면서 이건희 회장의 재산 가치도 수직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2005년 조사에선 자산 1조원 이상을 가진 부자가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상무,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신동빈 당시 롯데그룹 부회장 등 5명에 불과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제일 끝단인 50위에 올랐는데, 재산 규모가 1756억원에 불과했다. 반면 올해 조사에선 50위에 오른 이상일 일진글로벌 회장의 재산이 1조62억원이다. 지난해까지 9000억원대였던 이상일 회장과 이상록 카버코리아 전 회장 모두 올해 1조원대를 넘어섰다. 이로써 2019년은 50대 부자 모두가 1조원대 자산가로 올라선 해로 기록됐다.

조사가 이어진 14년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도, 반대로 새롭게 우리 경제의 중추로 올라선 이도 많다. 그만큼 한국의 산업구조가 커다란 변화를 맞고 있다는 뜻이다. 2005년 당시 50대 부자 중 올해 순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과반인 28명에 달한다.

전통적 주력 업종인 제조업과 유통업에서 벗어나 ICT와 제약·바이오, 게임, 화장품 등이 새로운 주력 산업으로 떠오른 것도 흥미롭다. 2005년 조사에서 제조·유통·금융·운송 등을 제외하면 신생 업종의 기업가로 분류할 수 있는 이는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김정주 당시 넥슨 사장 2명뿐이다.

올해 조사에선 ICT를 바탕으로 한 혁신기업과 게임, 화장품 기업을 통해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이가 15명에 달한다. 바이오시밀러를 통해 당당히 부자 순위 2위에 오른 서정진 회장을 비롯해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 등이 주목받는 최근과 달리 2005년에는 제약업종 종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게임 업종의 성장세도 눈부시다. 김정주 대표를 비롯해 8위에 오른 권혁빈 스마일게이트홀딩스 의장, 13위 방준혁 넷마블 의장, 18위 김택진 대표, 32위 이준호 NHN 회장, 46위 김대일 펄어비스 의장, 47위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 등 게임업계 수장 7명이 대한민국 50대 부자 리스트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단순 수치상으로도 게임기업 CEO는 전체 조사 대상자 중 14%에 달한다.

[박스기사] 새롭게 등장한 LG그룹 방계 - 구본식 회장, LT그룹으로 독립경영 본격화


▎故 구본무 LG 회장 장례식에 참석한 구본식 LT그룹 회장(왼쪽). 구 회장 옆으로 구본준 LG그룹 전 부회장(가운데)과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지난해 조사에서 1조2632억원으로 34위에 오른 구본식 당시 희성그룹 부회장은 올해 조사에서 1조2827억원을 기록해 35위에 올랐다. 주목할만한 점은 그의 직함이 올 1월 1일부로 LT그룹 회장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구본식 회장은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4남이다. 작고한 장남 구본무 회장이 맏형이고 그 아래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전 부회장에 이어 구본식 회장이 막내다.

구본식 회장은 지난해까지 둘째 형인 구본능 회장이 이끄는 희성그룹에서 부회장으로 일했다. LT라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한 건 올해 초다.

1976년 창립된 건설업체 삼보이엔씨는 지난해 12월 19일부로 상호를 LT삼보로 변경했다. LT삼보의 최대 주주는 지분 48.3%를 보유한 구웅모씨로 구본식 회장의 아들이다. 구 회장도 45.3% 지분으로 2대 주주다. 사실상 구본식 회장 일가가 보유한 지분이 97%를 넘는 가족기업이다.

지주회사 격인 LT삼보 아래로는 LT정밀과 LT메탈, LT소재 등이 있다. LG그룹의 신생 방계로 분류되는 LT그룹은 출범 직후부터 만만치 않은 사업 규모로 재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해 LT삼보의 연결기준 매출액은 1조1536억원에 달했다. 주요 종속기업인 LT정밀과 LT소재의 실적을 반영한 수치로, 관계사로 분류되어 연결실적에 잡히지 않은 LT메탈 등의 실적을 더하면 그룹의 덩치가 2조원대로 커진다는 전망도 나온다.

구본식 회장은 올해 62세다. 장자 승계가 원칙인 LG가의 전통에 따라 이미 아들인 구웅모씨로 이어지는 경영승계 작업까지 어느 정도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구본무 회장의 급작스런 타계로 구광모 회장의 상속 재원 마련이 이슈로 떠올랐던 상황과 대조적이다. 구웅모씨는 이미 LT그룹 지배구조의 최상단에 자리한 LT삼보의 지분을 48% 이상 확보한 최대주주다. 이 밖에 LT메탈의 지분도 7.5% 들고 있다.

[박스기사] 어떻게 조사했나

보유 주식의 지분가액을 집계했다. 코스피·코스닥 상장 주식은 5월 3일 주가와 주식 수를 곱해 산정했다. 비상장 주식은 지분율, 연결재무제표에 나온 각 회사의 주당 순자산, 5월 3일의 업종별 평균 PBR(주가순자산비율)을 곱해 산정했다. 이후 비상장 기업임을 감안해 10% 가치를 감산했다. 단, 업계 평균을 내기 어려운 기업은 동일 업종 상장회사 3개의 PBR 평균치를 곱했다. 주당 순자산은 연결재무제표를 기준으로 했고, 배당금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 치를 합산했다. 부동산과 그 외 금융자산은 반영하지 않았다. 다만 최근 보유 주식 매매를 통한 현금화로 큰 차익을 얻은 경우는 참고해 반영했다. 지난해까지의 조사와 달리 올해부터는 조사 대상자의 배우자나 25세 미만 자녀의 지분을 합산하지 않았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201908호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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