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33세에 멈춘 음악적 경험? 

사람들은 평균 33세부터 더는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 백세 인생을 생각한다면 무려 67년 동안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취향을 비난하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예전에 들었던 음악만 고집하는 당신을 젊은이들이 갑갑하게 여길 것은 분명하다.

▎피카소가 그린 스트라빈스키의 초상화.
방탄소년단(BTS)의 노래를 떠올릴 수 있는가? 노래방에서 마마무의 노래를 부른다면 젊은이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쉽지는 않다. 노래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즐거움을 주어야 그걸 따라 하고 기억할 텐데, 도통 생경할 뿐이니 기억하기는 둘째 치고 따라 하기도 버겁다. 그렇다고 공부하는 자세로 노래를 배워야 한다면, 시간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이 일부가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스포티파이 AB(spotify AB)라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가 있다. 2006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창립된 이 회사가 제공하는 스포티파이 서비스의 유료 가입자는 현재 1억 명이 넘는다. (2019년 3월, 이 회사는 한국에 진출하겠다는 뉴스를 전했다.) 이 회사의 중간급 매니저인 아제이 칼리아는 회사가 보유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흥미로운 점이 확인됐다. 사람들이 평균 33세부터 더는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것. 칼리아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생소한 음악을 접하면 이를 10대나 듣는 노래라고 치부하며, 자신들이 어렸을적 즐겨 들었던 음악을 다시 찾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칼리아의 연구는 좀 더 체계적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그의 연구와 무관하게, 음악이 그것을 즐겨 들으며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나도 뇌리에 남는다.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음악적 경험마저 뜻하지 않게 소환되는 경우가 있다. 영국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는 어느 날 밤 어린 시절의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음악을 들었다가 깨어난 후에까지 계속 음악을 들었다는 88세 노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음악 때문에 그녀는 잠을 잘 수 없었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다. 색스는 그녀의 오른쪽 뇌에 경색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아일랜드 음악이 통제할 수 없게 들려온 이유는 그녀의 대뇌피질 내 음악 기록 부위가 경색으로 인해 갑자기 활발해진 탓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즐겨 불렀던 노래를 나이가 들어서도 기억하는 것에는, 이처럼 뇌라는 물질적 토대가 있다. 미국 뇌 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가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뇌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뇌와, 그로부터 발원하는 우리의 성향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 성향은 우리 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 뇌의 특정한 작동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 뇌는 그것이 들어 있는 몸과 함께 어떤 시대, 어떤 나라, 어떤 사회에 놓여 있다.

나이가 든 우리의 뇌는 젊은 시절 얻었던 여러 경험과 우리 조상들로부터 상속된 어떤 기전에 따라 사물을 지각하고 판단한다. 노래 역시 그러한 사물들 중 하나다. 경험과 기전은 서로 어우러져 모종의 심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한 심적 구조를 장착하고 산다.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으로서 이런 구조를 세계관이라 할 수도 있고, (형태라는 뜻의 독일어인) 게슈탈트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이에게 ‘제발 당신이 가지는 편견을 잠시 내려놓고 당신 앞에 놓인 이것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세요’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가 그 편견을 잠시 내려놓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잠시 약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일 수 있다. 그는 주어진 사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감각을 얻고 그것을 편견 없이 처리해 판단한다. 이러한 뇌의 작동을 과학자들은 뇌의 상향식 경로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비되는 하향식 경로에 더 익숙하다. 어떤 관점 혹은 틀을 가지고서 어떤 사물을 접하기 전에 그 사물에 대한 가설을 먼저 세운다. 가설을 세울 때는 우리 내면의 저 깊은 곳에 자리한 내재적 지식이나 경험이 역할을 한다. 자신이 가설을 세운 것을 의식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세운 가설에 입각해 사물을 접하다 보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빠른 순간에 그 사물을 쉽게 지각할 수 있다. 뇌과학자 에릭 캔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보고 듣는 것은 그 대상의 어떤 특성들뿐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당신의 과거 경험에 의존한다.” 독일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정말로 듣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뇌와 마음의 하향식 경로는 선사시대에 우리를 살렸던 기제다. 낮게 그르렁대는 소리를 듣고선 ‘저건 사자일 거야’라고 즉각 가설을 세운 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선 급히 뛰어 도망가게 하는 기제. 우리는 선입견이 있어서 재빨리 판단할 수 있었으며 그런 판단에 따라 행동하여 살아남은 종족의 후손이다.

이렇게 효율적인 하향식 과정은 보수적이어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거야 뭐 뻔한 것 아닌가.’ 세상 다 아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서는 막상 자신의 편견과 감정만 앞세운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을 때 우리가 듣는 것은 베토벤의 교향곡 그 자체가 아니라 나이 든 나 자신일 수 있다. 우리는 음악이라는 추상적 타자(他者) 위에 우리의 상상과 욕구, 희망과 절망 등을 투사하며 음악을 듣는다. “이 노래를 들으면 좋았던 그때가 생각나. 그래서 좋아.” 반대로 어떤 노래를 듣고 자신의 슬픔을 더욱 고양시켜 자살하는 일마저 일어날 수 있다. 1936년 헝가리에서 발표된 ‘우울한 일요일(Gloomy Sunday)’이라는 노래는 헝가리와 미국에서 이후 1930년대에만 19명을 자살하게 했다는 괴담을 만들어냈다. (2000년, 동명의 영화가 상영됐다.) 이 이야기는 진위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음악이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부정하기 어려운 통념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노래의 작곡자와 가수가 책임지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뇌는 새로운 세상을 싫어하게끔 설계


▎발레 공연 [봄의 제전]의 1막 장면을 위한 스케치.
33세가 넘으면 10대와 20대 친구들이 즐기는 음악을 잘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 뇌가 너무 보수적이 된 탓일까. 젊은이들이 듣는 음악에는 상상과 욕구, 희망과 절망 등을 도저히 투사할 수 없게 된 것일까. 미국 기자이자 작가인 조나 레러는 보수적 마음구조의 신경학적 토대로 피질원심성 망(corticofugal network)을 소개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마음을 확장해온 일등공신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패턴들을 배울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 경험을 제한할 수도 있다. 피질원심성망은 산출이 투입을 다시금 유발하는 양성 되먹임 체계다. 스피커에 아주 가깝게 놓인 마이크를 생각해보자. 마이크에 입력된 소리가 스피커로 나오자마자 마이크에 다시 입력된다. 다시 입력된 정보가 다시 스피커로 나오더니 곧바로 다시 입력되어 다시 나오고… 이런 되먹임(feedback)이 짧은 순간에 엄청나게 발생한다. 하울링이라는 찢어지는 소리는 이런 과정을 거쳐 발생된다. “우리의 청각피질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전에 들어본 적 있는 소리들을 더 잘 들을 수 있다. 하여 우리는 이미 아는 (그래서 더 좋게 들리는) 옛날 노래들을 더 들으려 하고, 모르는 (그래서 거칠고 시끄럽게 들리는) 어려운 노래들을 무시한다. 우리 뇌는 새로운 세상을 싫어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신경학적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예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예술가는 우리 뇌의 양성되먹임 고리에 부단히 저항하며, 이전에 아무도 경험하지 않았던 경험을 창조하려 몸부림친다. 예술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뇌세포인 뉴런들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성장에서 나온다. 니체가 가학적으로 선언했듯이 ‘무엇인가 기억에 남으려면, 그것은 불로 지지듯 지져져야 한다. 계속해서 아픔을 주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새로움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필요하다.” 고통을 줄 수도 있을 음악적 새로움으로 그가 제시한 예는 러시아의 20세기 현대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같은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우리를 안일함에서 깜짝 놀라 뛰쳐나오게 만든다. 말 그대로 마음을 열어놓게 만든다. 아방가르드의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숭상할 터이다.” (레러,『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지호, 2007). 20세기 초에 작곡되어 발표된 이 곡은 현대음악으로의 유쾌하면서도 불쾌한 초대장이었다. 고전음악의 모든 통념을 완전히 부수어버린 혁명가의 불협화음으로, 동명의 무용 공연을 위한 부속 음악이기도 했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1908호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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