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박은주의 ‘세계의 컬렉터’] “수집가는 왕이다” 

 

의사, 사업가를 거쳐 수집가가 된 반스는 파리에서 왕성하게 작품들을 수집했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는 안목이 저속하다는 평가와 맞서다가 결국 독립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입장을 허락하며 그만의 노선을 걸어나갔다. 반스는 사망 후에도 여전히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왕국을 천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Albert Coombs Barnes (January 2, 1872~July 24, 1951)
1912년부터 본격적으로 필라델피아와 파리를 오가면서 예술에 심취했던 앨버트 반스(Allbert C. Barnes) 박사는 플레뤼스 27번지 거리(27rue de Fleurus)에 있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이었던 그들의 아파트에서 프랑스 작가들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유럽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스타인 가족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이 관심을 가졌던 마티스와 피카소, 세잔, 르누아르를 소개해 주었다. 반스는 아직은 시장이 불안정했던 파리 미술계에서 볼라르, 칸바일러, 폴 기욤 같은 화상들도 만날 수 있었다. 스타인 가족들이 펜실베이니아에서 도착한, 넘치는 에너지와 지성을 겸비한 사업가로 변신한 의사 반스가 혼자만의 도전으로 수집을 하고자 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반면, 반스는 이렇게 파리에서 처음 만난 수집가들의 나누고자 하는 열정을 예술에 대한 안목과 함께 배웠다.

파리 미술계의 왕이 되다


▎The Barnes Foundation(ph. © The Barnes Foundation)
반스는 사업으로 벌어들인 자금이 어떻게 수집가에게 힘을 실어 줄지 파악했다. 그는 말했다. “수집가는 왕이다.” 그는 파리에 있는 옥션회사들을 모두 방문했다. 그리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들을 마치 바짝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왕성하게 구입했다. 그만큼 반스는 예술에 목말라 있었다. 반스의 수집품들은 파리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확장되어 흑인과 인디언 작가들의 페인팅, 아프리카 마스크, 아즈텍 도자기, 타피스리, 골동품 가구, 철제 장식품으로 이어졌다. 자칫 혼란스러울 수 있는 복합적인 수집품들이지만 예술적으로 표현되는 연결점을 갖고 있었으며 반스는 능숙한 전시기획자의 실력으로 작품들 사이에 이것들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마침내 반스는 파리 미술계에서 왕이 됐다.

그러나 정작 그의 고향, 필라델피아에서 사람들은 정육점 주인의 아들이었던 반스의 안목을 저속하다고 평가했다. 차가운 시선은 반스를 파리에서보다 덜 열정적으로 만들었다. 1923년 반스는 자신의 컬렉션 중 일부를 펜실베이니아 예술 아카데미(Pennsylvania Academy of Fine Arts)에서 전시했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Bonheur de vivre)]을 포함해 훌륭한 작품 75점이 현지의 적대적이고 혹독한 평론에 부딪쳐 결국 전시장에서 내려지고 말았다. 이는 작가들에 대한 과소평가인 동시에 수집가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반스는 전시장에서 자신의 소장품들이 손가락질당하며 혹평을 받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결국 그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신의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흑인과 노동자,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입장을 허락했다. 반스의 이런 행동은 마치 자신의 소장품들을 전시장에서 끌어내렸던 사람들어게 복수를 하는 듯했다. 또 부르주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도발적인 결정이었다. 대부분의 박물관 큐레이터는 운전사, 가정부, 호텔 도어맨 등 ‘노동자 신분’으로 자신을 바꾸어 소개해야만 반스 재단의 문이 열렸다. 반스 자신도 관리인으로 신분을 바꾸어 방문자들의 작품에 대한 평론을 들었다. 만약 평론이 형편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당장 재단문밖으로 던져졌다.


▎Henri Matisse. Le Bonheur de vivre, also called The Joy of Life, between October 1905 and March 1906. BF719. ©2020 Succession H. Matisse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1922년 설립된 반스 재단의 건축 디자인은 토드 윌리엄스 빌리 첸(Tod Williams Billie Tsien Architects) 건축사에 맡겨졌다. 토드와 빌리가 완성한 문화 관련 건축물을 보면 그들의 화려한 경력과 탁월한 재능을 직감할 수 있다. 시카고 잭슨 파크의 오바마 대통령 센터(The Obama Presidential Center), 뉴욕의 데이비드 게펜홀(David Geffen Hall), 미국 민속 예술 미술관(American Folk Art Museum), 레이크사이드의 레프라크 센터, 홍콩 아시아센터(Asia Society Hong Kong Center) 등.

1899년 콜로이드성 물질을 주요소로 한 아르지롤(Argirol)을 발명해 상용화하여 큰 성공을 이룬 후 1902년 반스 기업(Barnes Company)을 세워 1907년 이미 백만장자가 된 반스는 1929년 미국 주식시장 붕괴 4개월 전, 모든 자산을 600만 달러에 처분했다. 반스는 이 자금으로 재단에 더욱 헌신했다. 마티스를 재단에 초대해 현장에서 작품을 완성하도록 요청했다. 갤러리 입구를 장식한 [춤(The Dance)]은 지금도 마티스의 본질만 남기는 작품 철학을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예술 아카데미 전시에 소개되었던 마티스의 [생의 기쁨] 과 반스 재단의 높은 창 위에 솟은 거대한 아치 세 개로 장식된 중앙 홀의 벽화 [춤]은 마티스의 중요한 대표작이다. 두 작품 모두 부인의 결혼 예물을 전당포에 맡겨가며 어렵게 구입해 평생 소중히 간직했던 소장품,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을 향한 일련의 연구 결과다. 아울러 [춤]은 마티스가 수집가의 요청으로 현장에서 작업한 보기 드문 대작이다. 반스는 마티스에게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해도 된다고 제안하며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 진심으로 부탁했다. 아티스트와 수집가 간의 진심 어린 소통은 결국 작가의 발길을 필라델피아로 옮기게 했으며 5m가 넘는 아치에 그려진 대작을 오려 붙이기로 실험했던 뜻밖의 경험은 마티스에게 후에 방스성당을 제작하는 기초가 되었다. 단순함과 명료함, 자유로움을 표현한 [춤]은 반스가 소장하고 있는 다른 주옥같은 작품들이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배려해주었다. 반스 재단의 중앙 홀 작업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는 크기를 잘못 재는 바람에 결국은 잠시 버려졌다가 후에 제작된 첫 번째 작품을 파리 현대미술관의 마티스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데서 실감할 수 있다. 파리 현대미술관은 마티스 갤러리를 별도로 만들어 건축물의 일부가 된 그림의 본질을 새롭게 부각하는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Henri Matisse. The Dance, Summer 1932 - April 1933. 2001 Overall (left): 133 3/4×173 3/4 in. (339.7×441.3㎝) Overall (center): 140 1/8×198 1/8 in. (355.9×503.2㎝) Overall (right): 133 3/8×173 in. (338.8×439.4㎝) ©2020 Succession H. Matisse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르누아르의 [화가의 가족]을 포함한 총 181점, 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총 69점, 마티스 59점, 피카소 46점, 모딜리아니 16점, 앙리 루소 18점, 수틴 22점, 찰스 데뮤스 44점, 모리스 프렌더게스트 27점, 호레이스 피핀 4점과 아프리카 조각 125점, 미국과 유럽의 장식 미술품과 철제품 887점을 포함해 3000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했던 앨버트 반스는 필라델피아뿐 아니라 미국을 상징하는 수집가가 되었다. 반스 재단(Barnes Foundation)은 예술에 대한 교육 사명뿐 아니라 아티스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반스는 자동차 사고로 1951년 79세에 사망했다. 범상치 않은 수집가답게 그는 지역의 작은 흑인 대학, 링컨대학교에 재단을 예외적인 조건과 함께 기증했다. 자신이 기획한 그대로 전시를 이어갈 것과 그림의 색 복구 금지, 판매와 대여 금지, 단일 작품 전시 금지! 괴팍하면서도 명석한 의사이자 사업가였던 수집가는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왕국을 천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Pierre-Auguste Renoir. Reclining Nude (La Source), c.1895. (ph. ©The Barnes Foundation)
※ 박은주는… 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2008호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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