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에 버금갔던 군왕후그러자 중이의 수행원들이 뽕나무 아래에 모여 수근거리며 앞날을 논의했다. 한 여인이 뽕을 따다가 그 말을 듣고는 부인 강씨에게 알렸다. 강씨는 그 말이 새어나가는 것을 두려워해 여인을 죽이고 중이에게 말했다.“어쩌시려고 이곳에 이리 오래 머물러 계십니까? 진나라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셔야지요.”중이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인생이 얼마나 길다고 그러시오? 안락한 생활을 즐기며 한세상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왕위를 꼭 가질 필요가 있소?”이에 강씨가 정색하며 말했다.“공자님은 불가피하게 제나라에 피난 온 몸이 아니십니까? 공자님을 수행한 신하들은 모두 공자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입니다. 진나라에서 위험도 사라진 지금 공자님이 진나라로 돌아가 왕위를 차지하지 않으시고 이곳의 안락함에 만족하고 계신다면 지금까지 공자님을 위해 헌신한 그들은 뭐가 됩니까? 공자님의 말씀을 들으니 신첩도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시단 말입니까? 하루빨리 진나라로 돌아가십시오.”이렇게 말하는데도 중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강씨는 수행 신하들과 짜고 중이에게 술을 먹여 만취하게 만든 다음 수레에 싣고 제나라를 떠났다. 부인 강씨의 이 같은 현명함과 결단력이 없었다면 중이는 훗날 진문공으로 이름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강씨 부인 이야기 역시 또 다른 여인의 현명함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당 태종의 부인 장손황후다. 당 태종은 ‘정관의 치(貞觀之治, 627~649년)’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끈 중국 최고의 성군 중 하나다. 그가 그런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징 같은 명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손황후 같은 현명한 아내를 둔 덕이기도 하다.위징은 당 태종에게 300번 이상 ‘노(No)’라고 외쳤을 정도로 쓴소리를 한 인물로 유명하다. 태종이 무슨 일만 하려면 반대하고 나서니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민 태종이 “저놈을 당장 끌고 가 참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이내 거둬들인 것도 여러 차례다.
당 태종을 이끌었던 장손황후어느 날 태종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내전에 들어왔다. 장손 황후가 이유를 묻자 태종이 대답했다.“위징 때문이오. 그놈의 촌 늙은이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중신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지 않겠소? 내가 이번엔 기필코 그놈의 목을 치고야 말겠소.”그 말을 들은 장손황후는 조용히 물러났다가 조복을 차려입고 다시 황제 앞에 나서 절을 올렸다. 조복이란 공식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 입는 예복이다. 당 태종이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자 황후가 대답했다.“역사책에서 보니 군주가 어질고 현명할 때야 비로소 충성스런 신하들이 황제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위징이 그렇게 거리낌없이 직언할 수 있는 것은 폐하께서 어질고 현명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훌륭한 황제를 지아비로 두었는데 어찌 경하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이런 황후에게 태종은 종종 의견을 구했지만 황후는 항상 “아녀자가 어찌 정사에 관여하겠느냐”며 사양했다. 그러나 어느 날 태종이 장손황후의 오라버니인 장손무기를 승상으로 삼으려 하자 이렇게 말했다.“저는 제 오라버니와 조카들이 권력을 가지길 바라지 않습니다. 한나라 여후(呂后)의 예를 살피십시오.”여후는 한고조 유방의 부인으로 고조가 죽자 실권을 잡고 여씨 일족을 중용해 전횡을 휘두른 인물이다. 태종은 장손황후의 말을 듣지 않고 장손무기를 승상으로 삼았다. 장손무기는 무능하고 타락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며, 결국 태종은 이듬해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했다. 장손황후는 능력이 아닌 정실 인사의 폐혜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흔히 측근을 중용하면 자신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언컨대 절대 그렇지 않다. 어떤 자리의 입지는 아랫사람의 친소 여부가 아니라 능력으로 결정된다. 아래에서 사고를 치면 윗사람의 자리가 안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요직에 중용하는 인사의 결과는 가문의 미래를 망치는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남자들이 모르던 그런 평범한 진리를 장손황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평범한 남편을 영웅으로 만드는 아내의 사례는 바보 온달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무궁무진하다. 기왕 당 태종의 얘기가 나왔으니 그와 관련된 예를 또 들어보자. 수나라 때 이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뜻한 바 있어 서경을 지키고 있던 양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양소는 일어나지도 않고 의자에 앉아 거만한 태도로 이정을 맞았다. 그러자 이정이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말했다.“천하가 어지러워 영웅들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때 중임을 맡은 양공께서는 마땅히 현자들을 공경하게 대하고 호걸들을 끌어들여야 하거늘 어찌 그렇게 의자에 앉은 채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마지못해 양소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 곁에 있던 한 시첩이 이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녀는 붉은색 먼지떨이를 들고 있어 홍불이라 불리었다.
자신을 맡길 사람을 알았던 홍불녀이정이 물러나자 홍불은 시녀에게 그가 어디에서 머무르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시켰다. 그날 밤 이정이 여관에서 잠을 자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정이 문을 열고 보니 자주색 옷을 입고 머리에 사모를 쓴 사람이 손에 자루 하나를 들고 문 밖에 서 있었다. 눈을 비비고 보고 나서야 이정은 그가 낮에 양소 집에서 홍불을 들고 있던 시첩임을 알 수 있었다.이정은 급히 그녀를 방 안으로 맞아들였고 여인은 도포와 사모를 벗더니 이정에게 절을 올렸다. 이정이 급히 맞절로 대하고는 그녀가 찾아온 사유를 물었다.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제가 양소공을 모신 지 오래고 천하의 적잖은 호걸을 보았으나 지금까지 나으리 같은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이정이 그녀의 이름을 물으니 그녀는 자기의 성이 장씨라고 대답했다. 이정은 홍불녀와 잠자리에 들었는데 며칠 뒤 홍불녀를 찾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이정은 그녀와 함께 성을 나와 태원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영우라는 마을에서 쉬어 가기 위해 객점에 들었다. 그때 방 안에서 홍불녀가 긴 머리를 빗고 있었는데 키는 보통이고 얼굴에 구레나룻이 시커먼 사람이 객점에 들자마자 넋이 나간 듯 홍불녀를 쳐다봤다. 이를 본 이정이 그에게 욕을 하려는데 홍불녀가 그를 만류하고는 그의 앞에 나서 성을 물었다. 그가 장씨라고 대답하자 홍불녀는 말했다.“어머 저도 장씨인데 그럼 제가 오빠라고 불러야겠네요.”이어 홍불녀가 이정에게 구레나룻 난 사람을 오빠라고 소개했고 세 사람은 의기투합해 술을 마셨다. 세 사람은 태원에 있던 이세민을 찾아갔다. 구레나룻 난 사람은 이세민의 상을 보고는 천자의 상임을 알아봤다. 그러고는 자신의 재산을 몽땅 내다 팔아 바꾼 돈 스무 수레를 이정에게 주며 말했다.“내가 보아하니 이세민은 곧 천자의 자리에 오를 인물일세. 불행하게도 나는 그에게 쓰임새가 없음을 알고 있네. 자네는 그에게 도움이 될 테니 이세민을 도와 공을 이루고 나라를 일으켜 세우게나.”구레나룻 난 사람은 다음 날 처와 함께 하인을 하나만 데리고 바람처럼 떠나버렸다. 이정은 그가 남긴 돈으로 이세민을 보좌해 천하를 통일하고 당나라를 세운 뒤 위국공이 됐다.홍불녀는 이름 없는 남자의 시첩에 불과했지만, 세상을 일으킬 인물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처지에 있었던 것은 시대적인 현실이 그랬기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능력이 있었기에 이정을 알아보고 또 그를 도울 구레나룻 난 사람을 알아봤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이세민이 아버지 이연과 함께 당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혜안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홍불녀의 시대에서 1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불이익을 받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조직은 성장하고 발전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이것은 페미니즘의 문제가 아니다. 능력으로 평가받는 정당성의 문제다. 특정한 이유, 학연이나 지연만으로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보다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조직이 있다면, 그 조직의 미래가 어찌 밝을 수 있겠나. 나아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기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남성에게 기회를 빼앗기는 조직은 더욱더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 여성의 기회를 빼앗고 능력을 사장하는 것을 넘어, 그 조직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차별을 하는 리더가 있는 조직은 앞날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그런 리더가 있다면 차라리 그를 내치고 그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여성을 리더로 삼는 게 훨씬 밝은 앞날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성은 최소한 전임자였던 남성이 상상하지도 못한 세계를 그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