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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마에 실패한 한고조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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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얼굴 보고 전쟁할지 알아좀 더 난도를 높여보자.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이 조회에서 관중과 함께 위나라를 칠 계획을 논의한 뒤 후궁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위희(위나라에서 시집온 희비)가 환공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놀란 환공이 까닭을 물으니 그녀가 대답했다.“신첩은 대왕께서 의기양양한 용안으로 들어오심을 보고 이미 다른 나라를 진공할 결심을 하셨음을 알았고, 대왕께서 신첩을 보고 안색이 순간 변하시는 걸 보고 대왕께서 치려는 나라가 위나라인 것을 알았습니다.”이튿날 환공이 조회에 나가 관중을 불러들이니 관중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대왕께서는 위나라를 치지 않기로 하셨습니까?”“아니 중부께서 어찌 아시오?”“대왕님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느리신 데다 태도도 겸허하시고 또 신의 물음에 참괴한 빛을 보이셔서 알 수 있었습니다.”물론 제 환공이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을 만큼 경박한 성품의 인물인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관중과 위희의 췌마가 상당한 수준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위희는 환공의 표정을 읽어 대처함으로써 자신의 부모가 살고 있는 위나라를 공격하는 걸 막을 수 있었고, 관중 또한 환공의 속마음을 읽어 보임으로써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마찬가지로 제 환공 때의 사례를 통해 또 다른 고수의 췌마술을 소개한다. 환공과 관중은 거나라를 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이튿날 온 나라 백성이 모두 알아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환공과 관중은 소문의 진원지를 역추적해 동곽수라는 이름의 잡부를 잡아들였다. 관중이 그에게 물었다.“우리나라가 거나라를 친다는 말을 네가 퍼뜨렸느냐?”“네, 그렇습니다.” 동곽수는 서슴없이 대답했다.“그런 말을 밖으로 낸 적이 없는데 네가 어찌 지어낼 수 있었단 말이냐?”“지어낸 것이 아니올시다. 군자는 모략에 능하지만 소인은 추측에 능한 법입니다. 소인은 저 혼자 추측해 알았을 뿐입니다.”“도대체 어떻게 추측했다는 말이냐?”관중의 질문에 동곽수는 차분히 설명했다.“전날 단 위의 대왕님을 소인이 우러러보니 용안에 생기가 충만해 계시기에 바야흐로 군사를 출동시키려는가 보다 추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왕께서 하시는 말씀이 거나라와 관계되는 게 많았고 임금님께서 가리키는 곳도 대부분 거나라 쪽이었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귀순하지 않은 작은 제후국은 거나라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소인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환공은 말문이 막혔을 터다. 일개 잡부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전쟁 계획을 헤아려낸 것이다. 이쯤 되면 왕보다 한 수 위의 췌마 고수인 셈이다.내친김에 한 단계 더 고수의 세계로 가보자. 춘추시대 위나라 왕의 가신 남문자 이야기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육경 중 한 사람인 지백은 위나라를 칠 마음을 먹고 이를 위장하기 위해 위나라에 준마 400마리와 벽옥 하나를 보냈다. 위 임금과 신하들은 이 선물을 받고 모두 기뻐하고 경사를 축하했다. 하지만 남문자만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위 왕이 물었다.“대국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기쁜 일인데 무슨 걱정을 그리 하는가.”“공로 없이 상을 받을 때나 이유 없이 남의 것을 받아 쓸 때는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따져봐야 합니다. 준마 400필이나 큰 벽옥, 이런 보물을 기증하는 것은 약소국이 강대국에 바치는 일이지, 진나라 같은 강대국이 우리 같은 약소국에 하는 일이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이 일을 숙고하시기 바랍니다.”위 왕은 남문자의 말을 새겨듣고 변방을 더욱 엄하게 지키라고 명했다. 얼마 후 과연 진나라 지백이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기습하려고 했으나 위나라의 방비가 더욱 엄해졌음을 알고 물러났다. 지백은 “위나라에 현명한 사람이 있어 내 계획을 알아챘구나” 하며 개탄했다.
다산 정약용도 췌마의 고수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도 췌마의 고수가 왜 없었겠나. 그중 한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이 황해도 곡산 부사로 나가 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돌림병이 서쪽 길을 따라 퍼졌다. 겨울철이었던 것으로 봐서 독감이 아니었나 싶다. 중국에서 의주를 거쳐 평안도 지방까지 내려왔다. 특히 노인들은 걸리면 다 죽었다. 곡소리가 사방 마을에 진동했다. 다산도 이 병에 걸려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쳤다. 그는 아전을 시켜 언 땅에 까는 화문석을 사 오도록 했다. 중국에서 칙사가 올 때 쓰는 것이었다. 과연 아전이 화문석을 사오자마자 의주에서 청나라 건륭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알리는 파발이 도착했다. 온 부중이 놀라 소란스러운데 다산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놀랄 것 없다. 중국에서 온 돌림병에 노인들이 다 죽었다. 황제도 80세를 넘긴 고령이니 무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알았다.”체마술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서두에 얼핏 말했듯 내가 췌마를 쓰는 것을 상대는 물론, 제3자까지 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귀곡자는 말한다.“성인은 남들이 모르게 지략을 세우므로 사람들이 오묘한 계책이라 하고, 드러내서 일을 완성하니 사람들이 밝고 지혜롭다고 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성인의 길을 따르면서도 왜 따르는지도 모르는 것을 보고 세상에서는 신명에 비유하는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매일 승리하는 자는 항상 싸우지 않고 비용도 들지 않는 전쟁을 이끄는 것이니, 백성들은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굳이 두려워하지도 않는다.”앞서 포위된 유방을 구해냈던 진평은 한고조 유방의 가장 훌륭한 모사였다. 공도 가장 많았다. 한신을 끌어내렸고, 번쾌를 무리 없이 처리했으며, 그의 처가인 여씨 일족을 몰아내 유씨 권력을 지켰다. 하지만 그가 그런 책략을 꾸며내는 것을 피해자는 물론 제3자까지 모두 알았고, 그 암수를 두려워했다. 진평 자신도 그것을 알았는지 이렇게 고백했다. 『사기』‘진승상세가’ 편은 이렇게 기록한다.“나는 음모를 많이 썼는데 이는 도가(道家)에서 금하는 것이다(我多陰謨 是道家之所禁). 내가 작위를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 나고 후손들은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내가 음모를 많이 사용한 후과다.”실제로 진평의 후손들은 그의 작위를 계승하지도 번창하지도 못했다.무엇보다 췌마의 가장 큰 목적은 미리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 수가 높든 낮든 마찬가지다.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준비하면 어떤 일이 터져도 당황할 게 없다. 준비한 대로 차분히 대응하면 그만이다. 예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경쟁자와의 거리를 큰 폭으로 넓힐 수 있는 훌륭한 기회이기도 하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도 사전 대비를 전제로 한 것이다. 문제는 실마리를 찾는 능력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중요한 단초였던 것도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일상사이기 쉽다. 어떠한 위험도 사전에 신호를 보내게 마련이지만 그 신호는 극히 미약해 안테나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미세한 차이를 구별하는 힘이 췌마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늘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주위를 잘 살펴보라. 당신이 방금 휴지통에 던져버린 광고 전단이 그 단초일지 모른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