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도 알려진 탈무드 격언이 떠오른다. “남편을 선택하려면 한 단계 눈을 높이고 아내를 선택하려면 한 단계 눈을 내려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격언은 예술이 이끈 자크마르와 앙드레의 운명적 만남과는 거리가 멀다.
▎Nélie Jacquemart, Autoportrait © Institut de France / Christophe Recou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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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평민 집안에서 탄생한 넬리 자크마르(Nélie Jacquemart, 1841~1912)는 어린 시절부터 화가의 감각이 탁월했다. 서자 출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회화, 조각, 건축 분야에 걸쳐 자신의 실력을 깨우쳐갈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의 천재성을 믿고 당대 최고의 베로키오 아틀리에에 아들을 등록한 아버지 덕분이었다. 넬리 또한 부모님이 고용된 곳의 안주인, 마담 드 바트리(Madame de Vatry)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미술에 대한 능력을 키워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귀족사회를 넘나들수 있었다. 넬리는 미술계에서 여류 화가들이 실력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당시, 전에 없던 독보적 행로를 걸었다. 서른이 되기 전, 파리의 보자르에서 데생을 가르치던 시절, 프랑스 교회의 주문들이 이어졌으며 그녀만의 뛰어난 섬세함은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더욱 부각했다. 넬리는 1868년 상원의원 베누아 샴피(Benoît Champy), 1869년 교육부 장관 빅토르 뒤뤼(Victor Duruy), 1870년 캉로베르 장군(Canrobert)의 초상을 그린 데 이어 파리 살롱전(Salon de Paris)에서 세 번이나 연속해서 메달을 수상할 정도로 프랑스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여류 초상화가였다.
1870년부터 이미 넬리는 대중이 자신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길 바라며 순서를 기다려야만 하는 명망 높은 초상화가였다. 그녀는 1872년 제3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의 초상화를 그리기에 이르렀다. 여류 화가 넬리와 지성인, 정치인들의 관계는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의 초상화를 그렸던 궁중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Élisabeth Vigée Le Brun)과의 깊은 유대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Franz-Xavier Winterhalter, Portrait d’Edouard André en uniforme des guides de la garde impéria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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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티에르의 초상화를 그렸던 1872년, 넬리는 에두아르 앙드레(Édouard André)의 초상화 주문을 받았다. 에두아르 앙드레는 넬리 이전에 이미 장 바티스트 카르포(Jean-Baptiste Carpeaux)가 제작한 자신의 흉상 조각과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Franz Xaver Winterhalter)가 완성한 자신의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었다.에두아르 앙드레는 프랑스 남동부 님(Nîmes)에서 부유한 개신교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두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운명은 그를 제국의 군인으로 이끌었고 18세에 생시르에 있는 고등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할 때는 나폴레옹 3세의 개인 근위병이었는데, 특히 황제와 황제비의 인정을 받았다. 이탈리아와 멕시코 전투에 참가했었던 그의 명성은 나폴레옹 3세 시대, 제2제국 아래 절정에 달했다. 나폴레옹 3세의 확고한 지원으로 앙드레 가족은 프랑스의 근대화와 제국 체제의 대기업 자금 조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63년 30세였던 그는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군인으로서 소명을 중단한 그의 새로운 열정은 예술품, 가구, 오브제 수집으로 옮겨갔다.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인으로서 삶을 새롭게 이어갔다.
1868년 건축가 앙리 파렁(Henri Parent)에게 오스만 거리 158번지의 5700㎡ 부지에 화려한 저택을 지을 것을 주문했다. 당시 152만 프랑에 달하는 상당한 건축비를 감당했다. 1869년에 시작해서 1875년에 완공된 이 저택이 현재의 자크마르-앙드레 박물관(Musée Jacquemart-André)이다. 1872년 그는 예술에 대한 역사와 비평을 기재하는 프랑스 예술 잡지 가제트 보자르(Gazette des Beaux-Arts)를 인수하고 중앙장식예술협회 회장이 됐다.
▎Musée Jacquemart André - Jardin d’Hiver 겨울정원 © Culturespaces / Sophie Lloy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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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섬세함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사랑으로 결실을 맺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질 수 있다. 두 사람은 첫 초상화를 그린 후 9년이 지난 1881년 결혼했다. 달리 말하면 넬리가 화가에서 명성이 자자한 귀족 집안 구성원으로 신분을 높일 수 있었던 기회는 에두아르 앙드레와의 결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결혼 당시 앙드레는 이미 신체적으로 매우 나약한 상태로 지병을 앓고 있었다. 결혼 계약서에는 앙드레의 가족들에 의해 강요된 ‘결혼 이후에도 부부의 각자 재산 분리’ 조항이 있었고 넬리에게 불합리한 조건이었지만 넬리는 수용했다. 자신의 신분이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를 그녀도 받아들인 것이었다. 게다가 부르주아 집안의 일원이 되면서 결혼 후 넬리는 화가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콘서트와 연회를 즐기는 귀족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오브제 찾아 이집트, 콘스탄티노플까지
▎Musée Jacquemart André - extérieur © Culturespaces / Sophie Lloy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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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리에게는 결혼 후에도 지속되는 큰 기쁨이 있었는데 남편의 고상한 취미였던 예술품 수집의 열정을 나누는 것이었다. 넬리 또한 이미 고서, 골동품 오브제, 고화 등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던 터였다. 넬리의 수집 열정은 결혼 전부터 시작됐다. 그녀의 수집품들은 1860년부터 시작된 남편의 수집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성격이 다른 부부의 수집품들은 점차 하나의 포괄적인 소장품 성격을 띠게 되었다.귀한 오브제를 구하기 위해 부부는 자주 유럽 여행을 떠났고 이집트와 콘스탄티노플까지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술품 수집을 위한 그들의 여행은 반복되는 귀족들의 향유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특히 감동했던 부부는 조각 207점, 화화 97점을 수집했다. 파두(Padoue) 근교에 있는 콘타리니 피사니(Contarini-Pisani) 궁에는 1745년에 티에폴로(Tiepolo)가 완성한 벽화가 있었는데 부부는 이 벽화를 구입하는 데 따르는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예술을 수호하려는 이탈리아인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분노했으며 언론은 이 벽화의 해외 반출을 금지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결국 프레스코는 무사히 파리에 도착했다. 벽화는 오스만 거리에 있는 두 사람의 저택 내부의 영예의 계단(escalierd’honneur)에 설치됐다.
건축가 앙리 파렁은 마치 오스만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하는 듯한 연극적인 전용 입구를 설계했다. 반원형 입구가 있는 건물은 매우 모던한 편의시설을 갖춘, 연극 혹은 오페라 전용 개인 저택을 상징하는 듯 우아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대로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테라스는 두 개 마차문으로 열리는 분할된 대지에 지어졌다. 오른쪽 테라스는 지붕이 있는 현관 역할을 하면서 메인 안뜰로 연결됐다.
▎Musée Jacquemart André - Salon des tapisseries © Culturespaces / Sophie Lloy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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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 파빌리온으로 둘러싸인 오스만 거리 쪽의 파사드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개인 별장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에서 영감을 받은 레이아웃에 따라 기둥 모양의 중앙이 앞으로 둥글게 돌출됐다. 안뜰은 아치로 장식된 반원형 벽으로 닫혀 있고, 14마리 말을 위한 마구간 및 13대 차량을 위한 주차공간에 접근할 수 있는 열린 아치가 중앙에 있다.황금으로 장식된 문, 대리석과 17~19세기 가구, 타피스리가 사방에 장식되어 있는 저택 내부에 들어서면 현관, 회화실, 그랜드 살롱, 타피스리 살롱, 사무실, 내실, 도서관, 음악실, 겨울정원과 계단, 흡연실, 티에폴로의 프레스코화, 조각방, 피렌체방, 베네치아방으로 구분되는 이탈리아 전시실이 있다. 또 저택 안주인 넬리의 방, 남편 앙드레의 방을 비롯해 현재 박물관의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는 식당이 초현실적인 우아함을 드러낸다. 당시의 나무 바닥과 벽, 문 모두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프랑스인들의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자크마르-앙드레 박물관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는 계단을 올라 2층에서 즐길 수 있는 멋진 프레스코 벽화와 더불어 건축물 내부에 존재하는 겨울정원이다. 그리고 별도로 조성된 흡연실은 다른 개인 저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실이다. 부부가 함께 담배를 피웠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곳에는 이색적인 동양의 오브제들이 진열되어 있다.
박물관 소장품들은 크게 이탈리아 회화와 프랑스 회화로 나뉘지만 네덜란드·플랑드르·영국 회화와 조각, 가구와 오브제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놓치지 않아야 할 작품이 방마다 가득해 부부의 정성스러운 수집 열정이 절절히 느껴지는 감동적인 순간들이다. 마치 16세기 이탈리아로 시간 이동을 한 듯 너무도 초현실적인 공간에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하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장 바티스트 샤르댕(Jean-Baptiste Chardin),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도나텔로(Donatello), 안토니 반 다이크(Antoine van Dyck), 프라고나(Jean-Honoré Fragonard), 프란츠 할스(Frans Hals), 렘브란트(Rembrandt), 유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엘리자베스 비제 르부랑(ÉlisabethVigée-Lebrun) 등의 작품에 영혼을 맡긴 채 흠뿍 빠져버린다.
▎Musée Jacquemart André - Salon des peintures 회화실 © Culturespaces / Sophie Lloy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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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앙드레는 60세 나이로 죽음을 맞았고 넬리는 남편의 유서를 공개했다. 유서에는 그의 재산에 대한 유일한 상속인으로 그녀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앙드레 가족들은 유언장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넬리는 결국 이 사건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녀는 모든 수집품을 인수하여 동전과 영국 회화에 이르기까지 수집품 분야를 확장했다. 또 1902년 넬리는 아시아를 발견하기로 결심한 후 인도에 첫발을 디뎠다. 그렇게 아시아 수집품들이 자크 마르-앙드레 부부의 수집품으로 새롭게 추가됐다.
그녀는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마담 드 바트리(Madame de Vatry)의 상속자로부터 그녀가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보냈던 샬리(Chaalis) 저택을 판매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택을 구입해 그곳에 컬렉션 일부를 설치했다. 1912년 70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 넬리는 죽기 전 30년 동안 화가의 길을 포기했지만 수집가로서 생의 마지막까지 즐겼다. 죽음을 맞이하며 생전에 이미 남편과 상의한 대로 저택을 프랑스 재단(Fondation de France/ institut de France)에 유증했다. 1년 뒤 샬리 저택(musée de l’Abbaye de Chaalis)과 부부가 살았던 파리 오스만 거리의 저택(Musée Jacquemart-André)은 대중에게 공개됐다. 부부의 컬렉션과 가구들을 제외하고도 박물관에서는 특별전을 꾸준히 기획하고 있다. 2020년 겨울, 터너의 회화와 수채화 전시가 있었고 올해 3월에는 시냑, 9월에는 보티첼리의 전시가 대중을 기다리고 있다.
▎Musée Jacquemart André - Salon des sculptures 조각실 © Culturespaces / Sophie Lloy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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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저택에 있는 차를 마시는 살롱, 벽난로 위에 있는 그녀의 흉상 조각과 자화상에서 그녀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넬리는 샬리 저택의 예배당에 묻혀 있으며, 팔레트와 붓을 들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청동 조각상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Musée Jacquemart André - Jardin d’Hiver 겨울정원 © Culturespaces / Sophie Lloy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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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 부부(Christo et Jeanne-Claude), 길버트&조지(Gilbert & George), 게라르드 리히터 &사빈 모리츠(Gerhard Richter & Sabine Moritz) 등 화가 커플은 무수하다. 동시에 화가와 모델의 사랑 이야기는 피카소가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셀 수없이 많다.평생 수집의 열정을 따랐고 죽음 이후 모든 소장품을 국가에 유증한 자크마르-앙드레 부부의 모습은 이 두 영역에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삶이었기에 프랑스 수집가들에게 더욱 훌륭한 롤 모델이 되고 있다. 자크마르-앙드레 저택은 모든 연인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다. 베르사유궁에 트리아농 별궁이 있던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조차도 파리에 이처럼 우아한 개인 저택을 갖고자 했르리라. 저택 내부에 겨울정원이 있고 유럽과 아시아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예술 문화가 있으며 담배를 태우며 여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방이 있다. 게다가 연회를 즐기는 파티장과 콘서트실이 있으며 이것을 함께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위한 편의 시설들이 갖춰져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감동을 주는 것은 이 부부가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끝없는 열정으로 호기심을 찾아 현실에 집중해 살았다는 것이었다. 소중한 그 시간의 중심에 예술품 수집이 있었다.
※ 박은주는… 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