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전문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이렇게 전문화된 문화예술 분야를 지원하고 육성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대한민국에는 국가의 문화예술 정책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국책 연구원 혹은 연구소가 없다. 이런 연구원이 필요해 보인다.
▎예일대학교 음악대학은 6위에 오른 하버드 대학교를 따돌리고 작곡, 연주, 지휘, 음악학 등 음악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으로 각종 평가에서 미국 내 1위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 사진: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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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삶을 좀 더 좋게 만드는 사회적 활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정치를 꼽을 수 있다. 시민운동가, 지자체 의원 및 장, 국회의원, 정부 관료 등 주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행사하는 국민의 다수가 정치적 행위를 한다. 이들 대부분은 정치학 전공자는 아니다. 대조적으로, 정치적 행위 등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대학교 교수와 연구소 연구원 등이 있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해 보인다. 학위 없이 행해지는 현장의 정치적 활동과 고급 학위인 정치학 박사학위 혹은 석사학위를 가진 이들의 연구 활동. 다른 분야도 같다. 경제 분야를 따지면, 현장의 경제활동과 경제학 혹은 경영학 학위를 가진 이들의 연구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 모든 분야에는 현장에서의 활동과 책상에서의 연구 활동이라는 두 축이 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학교를 다니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어떤 경영학과 교수도 정주영 전 회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정주영과 21세기 모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일을 한다. 모두 필요하다. 경영학은 21세기에도 정주영처럼 학교를 다니지 못한, 그러나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기업가가 어떻게 발굴될 수 있고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를 연구할 수 있다. 그러니 경영학을 학문 영역에서 지우자는 주장에는 호응이 없어야 한다.과거 많은 세계적 음악가도 음악 관련 박사학위나 그에 상응하는 고급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70이 넘어서까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 베를린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장악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 지휘 전공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실력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혹은 별개로, 오늘날 많은 음악대학은 박사학위 혹은 그에 상응하는 최고 학위를 요구한다. 능력보다 학위가 더 중요하다는 논리 때문이 아니다. 대학에서 교수를 뽑을 때 능력을 무시할 수 없고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지를 학위가 대략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위는 예술 분야에서도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중요하다. 경쟁이 심해지는 상황이 학위의 인플레이션을 불가피하게 초래해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2021년의 선진국 세계에서 훌륭한 음악인이 이미 과도하게 배출되었고, 냉정히 평가했을 때 그들 중 다수가 과거 20세기 중후반의 세계적 음악인들보다 더 낫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떠돌고 있는 ‘전설의 명연주 명음반’ 따위의 밈(meme)은 과거의 향수를 이용해 과거 연주를 상품으로 팔아먹는 이들의 술수일 뿐이다. 실용음악계만 해도 그렇다. 최근 여러 경연 프로그램을 보면 노래를 잘하는 젊은이가 너무 많다. 그들을 과거에 인기를 끌었던 이들이 평가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어느 분야가 퇴행을 하는가? 의미가 없는 분야는 그냥 없어지고, 젊은이들이 의미를 계속 부여해주는 분야에서는 그들이 참여해 무자비하게 경쟁할 것이다. 무척 독재적이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라면 모를까, 웬만한 민주국가에서 학문과 예술의 영역에도 자유와 경쟁이 기조라면, 거기서 살아남으려는 수많은 학문 및 예술 종사자의 실력이 늘지 않을 수가 없다. 실력이 상향평준화되면 변별력은 학위가 된다. 단언컨대, 19세기의 전설적 바이올리스트인 파가니니보다 더 연주를 잘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명성을 얻지 못하고, 자리도 못 잡는다. 다른 분야도 같다.
▎젊은 시절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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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고급 인력은 많은데,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대학교와 연구소, 일부 기업이 전부다. 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는 몇몇 대학을 현재 한계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1990년, 대학에 진학하게 될 나이인 18세는 92만 명이었는데, 2021년에는 47만 명이다. 올해는 대학 입학정원보다 18세 인구수가 적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라는 꽤 오래된 괴담이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이다. 어떤 모습이 되든지 간에 대학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정리해보자. 모든 분야에서 경쟁이 심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전문화 추세가 확고해졌고, 젊은 세대 중 많은 이가 여러 학문 분야에서 고급 학위를 가지고 있다. 예술계도 그러하다. 그런데 그들을 소화할 일자리로서의 대학은 줄여나갈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대학에서도 기초과학, 기초적 인문학, 순수예술 등의 분야를 줄이거나 없애는 추세일 것이다. 젊은 순수과학자, 젊은 인문학자, 젊은 예술가들이 일할 곳이 필요해 보인다. 그 일자리는 위인설관(爲人設官)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산출이 이 나라를 문화예술 강국, 기초과학 강국으로 만들 것을 고려하면 그 일자리는 미래를 견인하는 국가적 장치다.
문화예술 정책 형성에 국가적·제도적 과정이 부재
▎국가정책연구포털(www.nkis.re.kr)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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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논의와 관련해서 문화예술 분야의 연구소 혹은 연구원을 국가가 신설, 개원해주기를 희망한다. 특히 상술한 문화예술 분야의 상황에 대처할 문화예술 정책을 만들어내는 연구소(원)을 국가가 신설, 개원해주기를 희망한다. 현재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있는데, 이는 경제와 인문사회 분야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을 지원·육성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함으로써 국가 연구사업 정책을 지원하고 지식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된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경제·인문사회연구회 설립목적).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법령에 따라 만들어진 ‘국무총리(국무조정실) 산하의 기타공공기관’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다분야의 범국가적 정책과제 및 정책현안에 대한 학제간 협동 연구 수행을 통하여 국가정책을 선도하고 연구 수행의 효율성과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문화예술 분야에는 “범국가적 정책과제 및 정책현안”이 없는 것 같다.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는 분야별로 소관 기관들이 있다. 소관 기관들은 위 법률에 정한 분류표에 따라 개원되었다. 이 분류 체계에는 유독 문화예술 분야가 빠져 있다. 그 결과 경제·인문 사회연구회의 소관 기관에도 문화예술 분야 연구원이 없다.다시 말하면, 앞에서 지적한 전문화 추세, 학위 인플레이션, 예술인들의 일자리 보장 등과 무관하게, 국가는 여태껏 지원·육성의 대상으로서, 문화예술 분야를 빠뜨리고 있었다. 이것은 공정하지 않고 공평하지도 않다. 왜 유독 문화예술 분야만 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서 빠져 있는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관 기관들이 여러 분야의 순수한 학문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해당 분야의 ‘정책연구’를 함으로써 “지식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의 정책을 연구하는 연구원이 없다는 것은 문화예술 정책 형성에 국가적·제도적 과정이 부재함을 의미한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내 문화 관료에 의한 정책 형성 과정이 있을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정부부처의 관료들에 의한 정책 형성 과정이 있다. 다만 다른 분야에서는 이들에 의한 정책 형성 말고도 상기한 소관 기관들의 정책 연구 과정이 있다. 그러한 소관 기관의 산출을 중앙부처가 참고할 것이다.어떤 이들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을 거론하면서 문화 분야 공공기관, 특히 정책 연구기관이 이미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연구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기타공공기관이며, 상술한 국무총리 산하 연구원이 아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거론할 것이다. 이것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으로,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한다. 정책적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니다. 문화예술 분야의 정책을 연구하는 국책연구원으로서 (가칭) ‘한국문화예술정책연구원’의 신설을 희망한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관 기관으로서 말이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