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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생각 여행(34) 슈투트가르트의 추억, 독일인의 책임감과 진정성 

 


▎하이델베르크 고성(古城) 정면 건물에는 선대 독일 왕들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조각상들이 창문을 하나씩 차지하고 서 있는 듯하다.
유럽으로 출장 갈 때 사업상 목적지나 경유지로 가장 많이 방문하는 도시는 아마도 독일 프랑크푸르트일 것이다. 유럽 경제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연중 내내 많은 전시회가 열린다. 또 유럽 주요 에어라인들의 허브로서 수많은 유럽 내 다른 도시로 연결해주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프랑크푸르트를 찾을 때면 1~2시간 거리에 있는 다른 독일 도시들을 한두 곳씩 방문하곤 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찾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도시가 바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다.

#1.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라인강 지류인 네카어강 변에 자리한다. 이곳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크대학도 있다. 일부 복원되지 않고 파괴된 상태이긴 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하이델베르크 고성(古城)도 있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다.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면 도시 넘어 우뚝 솟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웅장한 고성이 연극무대 배경처럼 분위기를 압도한다. 언덕을 올라 만나는 하이델베르크 성은 특이하게도 많은 부분이 부서진 채 보존돼 있어 마치 몬스터 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하지만 주변 숲과 정원이 어우러져서 흉물스럽지 않고 오히려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400년부터 3세기에 걸쳐 지어진 붉은 사암 성은 1689년 루이 14세의 군대에 의해 약탈되었다. 그 후로 화가와 시인들은 이 폐허를 낭만적으로 표현해왔다.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성내에 들어가면 여러 건축물이 각기 다른 독일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에서는 선대 독일 왕들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조각상들이 창문을 하나씩 차지하고 서 있는 듯하다. 또 다른 건물은 약학박물관인데 이곳에서는 독일 약학의 역사에 관한 전시를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성채의 지하에 있는 거대한 와인 술통(Great Heidelberg Tun)이다. 술통이 만들어진 1751년엔 용량이 22만1726리터였는데 목재가 건조함에 따라 현재 용량은 21만9000리터라고 한다. 이 술통을 만들기 위해서 참나무 130그루를 썼다고 하니 가히 세계 최대(?)의 술통이라 할 만하다.

성채의 넓은 발코니로 이동하면 네카어강이 유유히 흐르는 네카어 계곡이 한눈에 보인다. 성 아래쪽으로 하이델베르크의 전경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진 풍광을 볼 수 있고, 강 건너편 계곡에는 저택들이 아름답게 줄지어 있다. 시간이 많으면 괴테와 헤겔이 방황했던 네카어강 북쪽 기슭, 숲이 우거진 산비탈에 있는 철학자의 길을 따라 거닐어보는 것도 멋진 계획이 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고성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성에서 마을로 내려올 때, 1386년에 설립돼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크대학과 그 주변 상가들을 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야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언덕 위 고성을 올려다보는 것도 여유로운 일정이다. 저녁 무렵 영화 [황태자의 사랑]의 배경이 되었던 붉은 황소(Roten Ochsen)라는 호프집에 들렀다. 한 무리의 독일인 여행 그룹이 손잡이가 달린 맥주잔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합창을 한다. 엄청 큰 1000cc 맥주잔을 여러 개씩 양손에 들고 나르는 웨이터나 웨이트리스의 힘에 감탄했다. 그 큰 맥주잔을 들고 의자에 올라서서 일행의 박수를 받으며 돌아가면서 호기롭게 ‘원샷!’을 외치기도 했다.

유구한 지성이 흐르고 역사와 전통이 있는 대학가에서 야성적 낭만을 즐기는 사이 독일과 독일인에 대해 생각해본다. 1·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해 온 나라가 파괴되었는데도 독일인들은 특유의 근면함과 이성적인 노력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더 나아가 서독과 동독이 평화통일을 이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되었다. 독일 도시나 시골을 구석구석 여행해보면 잘사는 나라의 시스템과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경험할 수 있다. 독일인들은 어떻게 세계 최고의 고속도로 위에 최고 품질의 자동차가 달리게 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히든챔피언 기업을 갖고 있으며, 불가능에 가까웠던 동서독 통일을 이루어냈을까?

독일과 유사하게 전쟁을 겪었고, 강대국에 둘러싸인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독일이라는 국가, 또 어려운 환경에서 기적을 이루어낸 독일인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하이델베르크대학 같은 오래된 교육 시스템에서 얻어낸 지성과 선진적인 의식이 그들만의 자긍심이 돼 현재와 같은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의 전경. 유유히 흐르는 네카어강과 카를 테오도르 다리가 어우러진 멋진 풍광이다.
#2. 독일에 갈 때면 생각나는 슈투트가르트의 특별한 추억도 있다. 고객 40여 분과 동행해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모스트라 콘베뇨 전시회’를 참관했다. 바쁘게 진행된 전시회 행사를 마치고 밀라노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르네상스 중심지 피렌체에서 하루 관광을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피렌체공항이 공사 중이어서 볼로냐공항에서 독일 루프트한자(Lufthansa) 항공편으로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비행기가 볼로냐공항에서 이륙해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가던 중 기내 방송이 나왔다. 갑작스러운 폭설로 인해서 프랑크푸르트공항이 폐쇄되었고, 중간 도시인 독일 슈투트가르트공항에 내려준다는 방송이었다. 해외 출장을 수없이 다녔지만 비행기가 이동 중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로 인해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적은 처음이었다.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이착륙이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경우는 있었어도, 이미 출발한 비행기가 상공에서 운항 중에 목적지를 변경해서 착륙하는 상황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이었다. 볼로냐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는 약 1시간 내외 짧은 여정이었지만 중간에 슈투트가르트에 내리라고 하니 모두들 당황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일단 슈투트가르트공항에 착륙했다. 이어 루프트한자 항공사 직원들의 안내를 받았다. 버스 한 대도 아니고 여러 대에 나누어 타고 슈투트가르트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고객 그룹을 인솔하던 필자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캄캄하고 눈 오는 밤중에 버스로 몇 시간을 가야 될지도 모르는 프랑크푸르트공항으로 이동한 후, 눈 내리는 공항 안에서 기약 없이 대기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도 못 하는 상황에서 싸늘한 공항 청사에 내팽개친 채 소중한 고객들과 막연하게 기상이 좋아질 때까지 밤을 새우며 대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슈투트가르트 공항에 있는 루프트한자 안내 카운터에서 루프트한자 매니저와 협상을 시작했다. 우선 버스 여러 대에 나눠 타고 미끄럽고 먼 눈길을 이동할 수 없고, 영어에도 익숙하지 않은 많은 고객이 폭설로 폐쇄된 공항에 가서 아무 대책 없이 대기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루프트한자 항공 측은 버스로 이동하는 방법 외에는 도울 길이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표했다. 그때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니 ‘뫼벤픽 호텔’ 네온사인이 보이는 게 아닌가! 내친김에 “호텔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마을 야외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하며 언덕 위 하이델베르크 고성을 올려다보면 마치 연극무대의 배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호텔 객실 수가 적어서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2인 1실로 숙박하면 객실 수가 반으로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고 루프트한자 매니저에게 이런 내용을 제안했다. 지금은 비상 상황이고 한 방에 2명씩 숙박할 테니 뫼벤픽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기상 상황을 봐서 이동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윽고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루프트한자 매니저와 직원들이 사무실에 들어가서 논의를 시작했다. 잠시 후 카운터로 나온 이들은 “2인 1실로 한다면 호텔 숙박이 가능하다”는 답을 전했다. 일단 호텔에 숙소를 정할 수 있게 됐다. 이젠 저녁식사와 이튿날 아침·점심식사, 다음 비행기 연결 편이 문제였다. 또다시 협상에 나선 결과 슈투트가르트에서 프랑크푸르트공항을 거치지 않고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는 방법은 슈투트가르트에서 런던을 거쳐 아시아나항공 편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아시아나 좌석을 확보해주면 루프트한자 측이 슈투트가르트에서 런던까지 보내주고, 런던에서 다시 아시아나 편으로 한국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동행한 여행사 임원과 함께 한국에 전화를 돌렸다.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런던에서 한국까지 가는 아시아나항공 좌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바로 루프트한자 측에 런던 경유로 귀국할 수 있게 조치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합의가 이뤄져 밤늦도록 여러 시간에 걸쳐 비행기 표를 모두 수정 발급받았다. 그렇게 항공기 이동 수단을 확보했다.

문제는 또 남아 있었다. 바로 식사다. 여러 명이 밥을 먹게 되면 예상하지 못했던 추가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저녁식사와 다음 날 아침식사에 대해서 루프트한자 항공 측과 다시 논의에 나섰다. 루프트한자 측은 처음에는 식사 비용을 책임질 수 없다고 완강히 주장했다. 우리도 물러서지 않았다. 천재지변으로 비상 상황이 발생했으니 이런 경우에는 루프트한자 측이 그 정도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다시 매니저가 사무실에 들어가서 자기들끼리 의논을 거친 다음 카운터로 나왔다. 저녁과 아침까지는 그들이 제공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음 날 오후에 출발하는 비행기 편이니 점심은 어떻게 해야 할지 협상했다. 루프트한자 측은 또다시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은 협의가 안 되어서 점심은 우리 측이 부담하기로 하고 협상을 마무리했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하이델베르크 고성은 많은 부분이 파손된 채로 보존돼 있다. 몬스터 같은 위압감을 주다가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지리한 협상 과정 동안 여러 시간을 불평 없이 기다려준 고객들과 오랜 시간 어려운 협상에 응해준 루프트한자 측이 모두 고마웠다. 뫼벤픽 호텔에서 편안하게 숙박한 다음 날 아침, 3월에 내린 춘설(春雪)로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모두가 지쳐 있었지만 폭설이 만든 하얀 세상은 아이러니할 만큼 아름다웠다. 덕분에 하얀 눈이 덮인, 분위기 있는 슈투트가르트 시내로 나가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 런던행 비행기에 올라 무사히 귀국했다.

지루한 협상이었지만 여러 문제점에 대해 즉석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루프트한자 매니저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만일 이런 비상 상황을 맞아 다른 나라 공항에서 다른 항공사와 협상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엄청나게 고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루프트한자 덕에 비상 상황이었지만 슈투트가르트 일정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었다.

독일을 떠나면서 루프트한자 항공, 독일인들의 업무 프로세스와 의사결정 중 권한의 위임 등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이들이 우리에게 준 건 결국 신뢰였다. 그 후로 유럽 출장을 다닐 때는 되도록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이용하고, 많은 한국인 지인에게도 신뢰할 수 있는 항공사라고 소개하곤 한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고 독일인과 독일 기업을 신뢰하는 마음이 생기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항상 고마운 마음이고, 주변에도 계속해서 이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이것을 ‘슈투트가르트의 추억’이라고 이야기하며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협상 과정에서 독일인 매니저가 보여준 진정성, 배려심, 책임감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도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조직의 각 단계에 맞는 권한의 위임을 통해서 책임경영을 하는, 선진화된 경영 시스템을 뿌리내리게 할 때다. 더 나아가 독일인들이 이룬 경제 기적과 높은 국민적 의식 수준, 그리고 평화통일을 떠올린다. 우리 한국인도 한강의 기적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내길 소망한다.

※ 이강호 회장은… PMG, 프런티어 코리아 회장. 덴마크에서 창립한 세계 최대 펌프제조기업 그런포스의 한국법인 CEO 등 37년간 글로벌기업의 CEO로 활동해왔다. 2014년 PI 인성경영 및 HR 컨설팅 회사인 PMG를 창립했다. 연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다수 기업체, 2세 경영자 및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영과 리더십 코칭을 하고 있다. 은탑산업훈장과 덴마크왕실훈장을 수훈했다.

202210호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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