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PJ살롱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08) 

구속할 수 없는 정신 

버번과 켄터키 사람들의 자유를 찾아 떠난 여덟 번째 위스키 여행.

▎금주법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위스키로우의 마지막 버번, 올드포레스터 증류소. / 사진:올드포레스터 인스타그램·박병진
버번위스키의 본류를 찾아서

역대급 무더위로 힘들었던 여름의 절정, 나는 오랜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미국의 버번 증류소들을 찾아가기 위해 켄터키 여행길에 올랐다.

KFC와 창업자인 인상 좋은 샌더스 대령, 켄터키 옛집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곳은 미국의 남부 같지만 의외로 남북전쟁 당시에는 북부에 속했다. 켄터키주와 미국 위스키의 주도권을 두고 늘 다툼을 하는 바로 남쪽에 있는 테네시주는 그 당시 남부 연합에 속했다. 이들의 지역적 라이벌 의식은 사실상 동일한 버번위스키 제조 과정임에도 두 지역의 자존심 대결로 번져 테네시 위스키라는 별도의 카테고리를 만들게 되었다.

테네시 위스키는 버번과 모든 제조 과정이 동일하지만 오크통에서 숙성 전 단풍나무 숯 여과 과정을 추가로 거치는 링컨 카운티 프로세스로 차별화된다. 이는 잭다니엘 위스키가 이곳 테네시주 링컨 카운티에서 이런 공정으로 생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켄터키가 ‘Abraham Lincoln Birthplace’를 내세우는 링컨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두 주가 이렇게 한 치도 양보 없이 대립하면서 거의 유일한 테네시 위스키인 잭다니엘은 결코 버번이란 말을 쓰지 않으며, 현재도 대부분의 버번위스키는 켄터키주에서 만들어진다. 다만 단일 품목으로는 잭다니엘이 압도적인 1위이니 켄터키와 테네시의 대결은 현재진행형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 대표적인 버지니아 식민지는 현재의 버지니아주뿐만 아니라 후에 노예제 반대로 북부로 귀속한 웨스트버지니아, 켄터키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고, 그 너머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땅이라 막연히 프랑스 식민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루이 왕들의 땅이었기에 루이지애나라고 불렀고 많은 지명이 ‘루이 왕의 도시’를 뜻하는 루이빌이었으며, 프랑스 부르봉 왕가(house of bourbon)를 영어로 발음한 버번이란 지명도 이 지역의 일부 혹은 이 지역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광범위하게 쓰였다.

버지니아 서쪽에 있는 켄터키는 자신들이 바로 버번의 원류임을 내세우고 이 지역의 풍부한 옥수수 생산량을 기반으로 위스키 산업을 육성했다. 현재 켄터키주 버번 카운티는 렉싱턴 동쪽에 있는 작은 카운티로, 행정 중심지는 패리스(Paris)인데 버번 증류소는 단 한 개뿐이라 루이빌을 중심으로 한 위스키로우(Whiskey Row)에 주도권을 넘겨준 지 오래다.


▎금주법 시대의 115 Proof (57.5%)를 오마주해서 만든 올드포레스터.
사실 현재도 캔자스나 조지아에 버번 카운티가 있어 버번이 켄터키에서 유래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또 다른 유력한 설에 따르면 당시 미시시피 유역의 많은 물자가 모이고 버번이 가장 많이 소비되었던 뉴올리언즈의 버번 스트리트에서 버번위스키가 유래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번 내 버킷 리스트는 이렇게 정해졌다. 언젠가 뉴올리언즈 프렌치 쿼터로 가서 내 눈으로 버번 스트리트를 보고, 그 시절을 상상해보는 것이 내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버번의 원조가 어디인지는 내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단지 미시시피와 루이지애나의 버번과 그들의 삶은 어떠한지, 그들이 마신 버번은 현재와 또 무엇이 다른지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미시시피강 유역에 펼쳐진 광대한 루이 부르봉의 땅에서 버번의 본류를 유추해나가는 재미는 덤으로 얻게 되지 않을까?

루이빌을 향한 여정


▎흐린 날씨 탓에 예약 일정을 바꿔 간신히 라과디아-루이빌 항공편의 마지막 좌석에 탑승했다.
켄터키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루이빌로 가는 여정은 무척 험난했다. 팬데믹 해제 이후 보복성 여행의 여파로 천정부지로 솟은 항공권 가격을 아끼려고 도쿄를 경유해 뉴욕으로 가는 항공편으로 만 하루를 꼬박 날아와 오후 늦게 JFK공항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첫 비행기로 루이빌에 가려고 했기에 아예 라과디아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고 다음 날 5시에 일어나 공항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북미 전역의 날씨가 좋지 않아 여기저기서 지연과 결항이 반복되었는데 내가 탈 비행기는 정확히 네 번 출발이 지연되다가 결국 결항되고 말았다. 그동안 미국 국내선을 많이 타봤는데,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세 번째 지연 시에 델타항공 데스크로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출발 시간이 아예 뒤쪽인 다른 항공기로 예약을 바꾸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취소(Cancelled)라는 사인 보드에 망연자실할 때 나는 그날 유일한 라과디아-루이빌 항공편의 마지막 좌석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라과디아 공항의 두 개 활주로는 평행하게 놓여 있지 않고, 특이하게 십자 형태로 교차되어 있다. 어느 방향이든 동시에 이착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매우 정교한 교차 관제를 필요로 하는 공항이다. 이 때문에 날씨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안 그래도 혼잡한 관제탑이 혼돈 속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수십 년째 큰 사고 없이 그럭저럭 운영되는 것을 보면 최신 시설이 없음을 탓하기보다는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의 효익을 누리고자 많은 이가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이 이 공항의 운영 시스템에 한 땀 한 땀 잘 모자이크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또 사고를 100% 방지하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함을 잘 인지하고 발생시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학습 절차를 준비하는 것이 무조건 사고 제로를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덜 위선적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 같은 천조국이 돈이 없어서 라과디아 공항의 십자 활주로를 그대로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사회에서 합의된 우선순위가 그보다 높은 것이 더 많기에 주어진 제약 조건을 인지하고 그 안에서 운영을 잘 해나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사회적 합의 과정들을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우리나라 지방 공항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적용해보면 좋겠다. 나라 전체 재정의 효율성과 사회적 효익의 균형점을 찾아 국가적 우선순위에 대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정립하고 존중해나가는 것이 현재의 무안 공항, 양양 공항, 최근의 새만금 공항에서 부산 신공항까지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주제넘지만 잠시 걱정해보았다.

두 가지 푸른 식물로 유명한 켄터키


▎경마의 성지가 된 켄터키 더비 경마장 앞.
드디어 루이빌 공항에 도착했다. 앞으로 며칠간 세계 버번의 수도인 이곳 루이빌(Louisville)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바즈타운(Bardstown)과 동쪽의 프랭크포트(Frankfort)까지, 이 트라이앵글 지역을 돌면서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버번 증류소들을 하나씩 정복해나갈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켄터키는 두 가지 푸른 식물로 유명한데, 첫 번째가 푸른 켄터키블루그라스, 즉 양잔디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의 많은 골프장에서 켄터키블루그라스를 사용하는데, 한겨울에도 푸른 빛깔의 양잔디 위에서 정확히 공을 가격하여 큰 디봇과 함께 멋진 샷을 만들어내는 것은 골프의 큰 재미 중 하나이다. 켄터키 양잔디는 부드러워서 디봇이 잘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목초로도 제격이라 켄터키에서는 경주마 사육이 발달했고, 미국 최대의 켄터키 더비를 개최할 정도로 경마의 성지가 되었다. 바로 이 켄터키 더비의 공식 음료이자 켄터키 버번위스키로 만든 대표적인 칵테일이 민트 줄렙이다. 복잡한 다른 부재료 없이 그저 푸짐하게 버번을 두 잔 정도 넣고, 민트 몇 장과 설탕으로 단맛을 더한 후 잘게 부순 얼음을 가득 채운 시원한 민트 줄렙 한잔을 마시며 자신이 베팅한 경주마를 목청껏 응원하는 것도 인생에서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두 번째는 전 세계에서 소비하는 옥수수 중 40%를 생산하는 미국, 그중 최다 생산량을 자랑하는 켄터키의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밭이다. 바로 이 켄터키 옥수수에서 버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위스키의 주재료인 보리를 구하지 못한 초기 아메리카 정착민들이 문제해결 의지를 갖고 고민한 끝에 오히려 더욱 저렴하고 효율적인, 또 다른 맛의 버번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맞는 것 같다.

금주법과 버번위스키


▎켄터키 버번위스키로 만든 대표적인 칵테일인 민트 줄렙. 미국 최대의 켄터키 더비의 공식 음료이기도 하다.
버번위스키의 역사는 금주법의 역사와 분리할 수 없다. WASP(White Anglo Saxon Protestant)로 대변되는 미국의 주류와 독일계, 아일랜드계, 라틴계 등 비주류 간 대결의 역사이기도 하다. 주류 세력인 WASP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퓨리턴의 후손들이기에 엄격한 캘빈주의를 주창하여 음주를 배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계 이민자들은 당연히 맥주를,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위스키를 만들었기에 그들 간 대립은 필연이었다. 특히 독립전쟁 직후에는 위스키에 중과세하여 비주류의 위스키 반란까지 일어났다. 이후 여러 차례 금주법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남북전쟁, 1차 세계대전 등으로 미뤄졌다가 결국 1920년 수정 헌법 18조에서 금주법을 제정했다. 재미있는 것은 양측 모두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규제하지 않고 오직 술을 제조, 유통, 판매하는 것만 엄격하게 규제했으니, 시작부터 이 법은 철저히 위선적이었다. 흔히 1929년 미국 대공황 이전인 1920년대를 Roaring Twenties, 즉 광란의 20년대라고 표현했다. 이 시절의 키워드는 아르데코, 재즈댄스, 빅밴드, 칵테일이었으니 이런 시절에 어떻게 술이 빠질 수 있을까?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미국 상류층이 롱아일랜드 라이프에서 매일 밤 파티를 즐기는 바로 그 모습이다. 상류층은 상류층대로, 하류층은 하류층대로 그들만의 음주 생활을 공공연히 지속해나갔으니 광란의 20년대는 위선의 20년대와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루이빌의 위스키로우는 바로 이 금주법의 직격탄을 맞은 곳으로, 금주법 직전의 호황기에는 루이빌에만 무려 80개가 넘는 증류소가 있었으나, 영화 [킹스맨 2]에 나와 이제는 꽤 알려진 올드포레스터 하나만 금주법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위스키로우의 마지막 버번이 되었다.

첫날 비행기의 지연과 결항으로 늦은 오후에 켄터키에 도착했기에 루이빌 시내에서 몇몇 버번 증류소를 보려던 내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그중 단 한 군데만 갈 수 있었으며 나의 선택은 당연히 올드포레스터였다. 물론 올드포레스터도 100년 동안 이 자리를 계속 지켜온 것은 아니고, 의료용 위스키 생산 면허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이를 위해 이 거리를 떠났다가 최근에 돌아왔다.

라벨 위에 ‘First Bottled Bourbon’이라고 쓰여 있는데, 19세기 말에 만연한 가짜 위스키를 방지하기 위해 최초로 유리병에 위스키를 담았기 때문이다. 창립자의 이 의지는 희생한 물류 비용보다 더 큰 고객의 신뢰를 얻었고 성공의 첫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의 여러 시련 또한 잘 극복해 위스키로우로 돌아온 루이빌의 맏형으로서 계속 승승장구하기를 응원한다.

영화 [킹스맨 2]처럼 이 위스키의 밑바닥을 보아야 나타나는 그 암호를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오늘 밤은 달콤하면서도 느끼한 올드포레스터의 밑바닥을 한번 보고 싶다.

※ 박병진 - 1991년 IBM 신입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해 IBM, SAP, SK 등 글로벌기업의 임원으로서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2022년부터 딥러닝 기반의 무인 교통단속장비를 생산하는 (주)토페스의 CEO로 부임해 더욱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위스키 사랑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각종 증류주의 매력에 빠져 세계 각국의 증류소를 다니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Salon de PJ’라는 위스키 클래스로 기업체, 대학교,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에게 증류주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

202310호 (2023.09.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