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44) 

자기애 | 남을 낮추며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예술로 승화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정을 찾지 못한 채 계속된 방황으로 그릇된 자기애를 가져야만 했던 그의 작품 세계를 음미해보자.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 1889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떠받드는 사람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며, 그렇지 못한 순간에는 쉽게 좌절한다. 이들의 자기애는 진정한 자기애가 아니라 자기혐오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대단하다고 말해주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그 박수 소리가 끝나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 이들은 스스로를 온전하게 사랑하는 것이 참 어렵다.

이들은 박수갈채가 사라져갈 즈음에는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 보조배터리들을 찾아다닌다.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멋지고 훌륭하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존감을 회복하고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으며 살아간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보조배터리 역할을 할 사람들을 굉장히 잘 알아보는 능력을 지녔다. 보조배터리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용기와 응원을 주었다는 보람을 느끼고, ‘너와 만나니 다시 자신감이 생겼어’라는 말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이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상대에게서 위로나 응원을 받은 경험은 없을 것이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누군가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예수라 생각한 화가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은 30대 중반까지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는 컬렉터였다. 그는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림들을 보면서 자신도 충분히 도전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주말에만 그림을 그리다가 곧 전업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몇몇 작품은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자주 그리스도에 비추어 표현했는데, [황색 그리스도]도 자화상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거나 따르지 않지만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다는 것이 고갱의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신을 인정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의 예술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는 중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그가 부인과 네 자녀를 버리고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간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가족까지 버려가며 희생하는 중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엄청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당신을 낮추고 나를 높이고


▎(좌) 폴 고갱 〈반고흐를 위한 자화상〉 1888 (우) 반고흐 〈폴 고갱을 위한 자화상〉 1888
고갱은 뒤늦게 미술에 뛰어들었지만,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도 있었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신했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미술의 리더로 불리던 마네가 고갱의 그림을 칭찬했을 때, 고갱은 “아마추어일 뿐입니다”라며 겸손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마네는 “아마추어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네”라고 말했다. 고갱은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낮출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반고흐에 대한 고갱의 태도는 달랐다. 고갱은 고흐가 자신보다 그림을 못 그린다고 생각했고, 고흐의 생활 태도 전반을 무시했다. 1888년 고흐가 프랑스 파리에서의 생활에 지쳐 아를로 떠나면서 화가들에게 자신의 작업실에서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고흐를 따라 아를로 갈 예술가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고흐의 작품은 단 한 점도 팔린 적이 없었고, 다른 작가들 입장에서는 괴팍하고 까다로운 화가에 불과했다. 빈센트 반고흐의 남동생 테오 반고흐는 고갱에게 매달 한 점씩 그림을 사주는 조건으로 고흐와 작업실을 같이 쓰도록 설득했고, 고갱은 이를 받아들였다.

처음 이 두 작가가 만났을 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1000억원에 낙찰된 그림 [해바라기]는 고갱을 위해 그렸던 7점 중 하나였으며, 이 둘은 처음에 서로를 위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갱은 고흐가 사용하는 물감의 색마저도 지적했고, 고흐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고갱의 입장에서는 감정적이고 집요한 고흐의 성격이 유치한 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10월에 함께 작업실을 쓰기 시작한 이들은 그해 12월 23일 크게 싸우고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을 계기로 결별했다. 이듬해 고갱이 그린 그림이 바로 [황색 그리스도]이다.

내 가치가 남들보다 높다는 생각

에밀 슈페네커는 고갱과 함께 증권회사에서 일했던 동료였다. 고갱은 생활비가 떨어지자 슈페네커의 스튜디오에 얹혀살았다. 여러 인상주의 작가가 서로 힘든 시기에 돕고 의지했지만, 고갱의 양상은 달랐다. 고갱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러 지역을 떠돌았고, 돈이 떨어질 때마다 슈페네커의 집을 찾아왔다.

문제는 슈페네커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갱은 슈페네커의 집과 작업실을 마음대로 사용하면서도 슈페네커의 그림을 비난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고갱은 자신을 충분히 그렇게 해도 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작품 [슈페네커의 가족]에는 아내의 눈치를 보고 있는 슈페네커와 화난 듯 보이는 슈페네커의 부인 모습이 담겨 있다. 고갱은 자신으로 인해 그들 가족이 불편해진 것을 알면서도 조심하기보다는 그 장면을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었다.

후에 열대지방으로 떠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고갱은 그림 과외를 해서 돈을 모아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고갱이 선택한 것은 최대한 많은 학생을 모아 슈페네커의 집 전체를 그림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를 높여줄 수 있는 사람들을 원하는 사람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는 방법은 다양하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그 어떤 모습이건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는 자기수용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쉬운 방법이 있다. 자신에게 훌륭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계속 옆에 두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더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고갱은 타히티섬으로 떠나 그곳에서 티티라는 소녀를 알게 되어 성적 대상이자 하녀처럼 부렸다. 또 13살 소녀 테후라를 만나서 결혼했는데, 그녀는 [테하마나의 조상들]의 모델이다. 고갱은 타히티섬에서 원시적인 색채가 담긴 그림을 그려나갔고, 이 정도면 파리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테후라가 임신한 상태였지만, 그는 그녀를 버리고 파리로 향했다. 고갱에게 필요했던 것은 테후라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에서 그의 그림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그는 [자바 여인 안나]의 모델이었던 14살 소녀 안나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그림을 그리려 타히티로 떠났다. 도착해보니 과거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던 테후라는 다른 남자와 혼인한 상태였다. 고갱은 새로운 14살 소녀 파후라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파후라는 고갱의 아이를 낳았다. 스스로를 그리스도라 칭했던 고갱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그린 그림에 [신의 아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그림은 마리아를 유색인종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많은 질타를 받았지만, 고갱에게는 그의 아들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어떤 사람들은 고갱이 10대 중반의 어린 유색인종 소녀들만 만난 것이 의도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당시 백색인종을 동경하는 원시부족 소녀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추앙하기를 바랐던 마음,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 소녀들에게 쉽게 가스라이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이유가 어찌되었던 결과론적으로 고갱은 자신이 원할 때만 소녀들을 곁에 두었고, 필요할 때만 소녀들을 찾았다.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힘


▎폴 고갱 〈신의 아들〉 1896
아마도 고갱에게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상관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힘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곁에 있을 누군가를 두고자 했던 고갱은 말년에 쓸쓸하게 사망했다. 대인관계에 진정성이 없었고,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가족을 저버린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갱의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변명할 거리가 많을 것이다. 자신이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바라보는 편견에 저항해야 했고, 가족들과도 자주 갈등을 겪었다. 안정된 삶을 추구하지 않고 욕구에 따라 여러 장소를 떠돌아다녔으며, 불안정감은 다시 그릇된 자기애로 변질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거나 자신보다 낮게 취급해도 된다는 허용을 해주지는 않는다. 사람은 사용 대상이 아니며, 교체해서 사용할 수 있는 부품도 아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좋으나 스스로도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무시나 경멸이 아닌 공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자기애만 충만하고 자존감은 낮지 않은지 확인해보는 것 등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힘을 가진다면, 지금보다 더 유연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최종적으로 삶이 반짝거리지 않는 순간에도 내 곁에는 소중한 누군가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소울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310호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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