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이강호의 생각 여행(52) 고궁(古宮), 깨달음을 준 봄날의 선물 

 

조선 초기 창건된 우리네 궁궐은 역사 속 시련만큼이나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오늘의 모습을 찾기 위해 수백 년의 수난을 견뎌낸 궁궐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성공의 길로 이끌도록 노력해야 한다.

▎멋들어진 모양새를 드러낸 궁궐 지붕과 여러 신상(神像)을 새겨 얹은 장식 기와인 잡상(雜像)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이 산, 저 산(山)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판소리 단가 [사철가] 중 봄을 노래한 첫대목이다. 이제 봄이 되어 매화꽃과 산수유가 피고, 목련·개나리·진달래·벚꽃·철쭉 등 봄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특히 우리네 봄철은 아름다운 궁궐을 찾아 꽃과 함께 계절을 맞고 역사도 학습하기 좋은 계절이다.

서울 중심부에 자리한 광화문과 경복궁에는 언제나 수많은 방문객이 드나든다. 흥미로운 광경은 많은 외국인이 각양각색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찾아 사진을 찍으며 문화 해설사에게서 역사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항상 인파가 북적이는 광화문 앞을 종종 지나다닐 때면 경복궁과 나의 인연을 생각하곤 한다. 어린 시절에는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이 지금 자리에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중앙청’이라고 불렀던,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키고 서 있었다. 중앙청이 경복궁을 가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요즘처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광화문과 경복궁,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멋진 풍경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청년 시절에는 경복궁 경내에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왕궁 안에 자리한 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은 지금 돌이켜도 참으로 특이한 경우다. 아침이면 기상해 경복궁 안에서 단체로 피티(PT) 체조를 하고 구보를 하며 체력을 단련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북악산 정상에서 근무하고 있던 어느 광복절 아침,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사건은 특별한 기억이다. 물론 지금은 당시 군부대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모든 흔적이 궁궐에서 사라졌다. 경복궁 안 군부대는 내 머릿속에만 남은 기억 속 역사의 현장일 뿐이다.

젊은 시절의 추억 때문인지 경복궁에 애착을 느낀다.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고 싶어 가끔 경복궁을 찾아 궁궐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기억을 더듬어본다. 주변의 청년들이나 임직원들과 광화문과 경복궁·창덕궁·창경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세월의 흐름을 깨닫기도 한다. 옛 중앙청 시절을 봤을 리가 만무한 요즘 세대는 지금의 광화문과 궁궐 모습이 예전부터 똑같은 모습으로 전해져 내려왔다고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학습하고 소중한 교훈으로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역사의 현장을 너무 가볍게 지나치는 듯해 안타깝다. 지난 반세기 이상 변천해온 모습을 직접 경험한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실제 관찰하고 체험한 경험과 더불어 역사적 자료에서 찾아낸 내용을 정리해봤다.

벚꽃 흐드러진 봄날의 궁궐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의 위용. 국보 223호이며 현존하는 한국 최대 목조 건축물이다.
지난겨울에 열린 ‘서울 빛초롱 축제’ 기간 동안 광화문(光化門)에 비친 조명쇼를 보며 광화문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광화문과 경복궁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역사적 시사점과 교훈을 안고 있다. 광화문은 경복궁(景福宮)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첫 번째 문이다. 광화문 석축부에는 홍예문(虹霓門,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아치 문) 세 개가 있다. 임금은 가운데 문, 신하들은 좌우 문으로 다녔다.

1392년 태조 시기에 경복궁과 함께 지은 광화문은 조선의 주요 관청이 밀집한 육조 거리의 기준점으로 자리 잡았다. 1592년 선조 때는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가 소실돼 함께 파괴됐고 한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다가, 273년 후인 1865년 흥선대원군이 추진한 경복궁 중건으로 복원됐다. 일제강점기에는 1926년 완공된 조선총독부 청사 조성 과정에서 총독부에 의해 철거가 계획됐으나, 각계 반발에 부딪혀 경복궁 동쪽 건춘문 쪽으로 이전했다.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으로 목조 부분이 소실돼 석축만 남았다가, 1968년 중앙청 앞 원래 자리에 철근콘크리트로 재건했다. 이후 2006년부터 목조로 복원해 고종대 모습으로 회귀하기 위해 기존 건물을 해체했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 공사가 완료돼 2010년 8월 15일에 공개됐다. 그리고 지난 2023년 10월 16일에는 월대와 해태상, 현판 복원이 완료됐다.

참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복원된 월대 앞에서 아름다운 광화문 사진을 찍어보았다. 얽히고설킨 그간의 광화문 사정도 생각해보았다. 이리도 오랜 기간 질곡의 세월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할까?


▎창덕궁 후원 연못과 부용정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며,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지은 궁궐이다. 그러니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이고,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까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복궁은 기하학적 공간 분할, 반듯한 축선상의 건물 배치, 정연한 대칭 구조로 설계됐다. 이궁인 창덕궁·창경궁과 양궐 체제를 갖췄는데, 임금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두 궁을 번갈아 사용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5년 동안 방치됐던 경복궁은 19세기 들어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됐다. 당시에는 7000여 칸을 갖춘 거대한 건축물이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각 수천 칸이 헐리고 매각되며 조선총독부 청사 같은 건물이 들어서는 등 궐내가 크게 훼손됐다. 현재도 계속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창덕궁(昌德宮)은 199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궁궐이다.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고 동쪽으로는 창경궁과 연결된다. 경복궁 동쪽에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특히 한국의 유일한 궁궐 정원인 후원(後苑)은 너무나 아름다운 구조와 분위기가 돋보인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종종 창덕궁을 거닐며 봄의 따사로움도 느끼고 궁궐에서 이루어졌던 역사의 흐름도 학습해본다.

많은 이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더 많이 사용된 궁궐이라는 역사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 역할을 대체해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바로 창덕궁이었기 때문이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덕궁은 정궁(법궁)의 지위를 상실했다. 일제강점기 들어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으나, 현재는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모교인 중앙중·고등학교 운동장의 일부가 창덕궁의 깊은 안쪽과 경계를 맞대고 있어서, 청소년 시절부터 당시 ‘비원’이라고 불리던 창덕궁과 친숙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방법


▎‘창경궁 달빛기행’에서 경험한 찬란한 전통문화 행사.
창경궁(昌慶宮)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한다. 창경궁의 본래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다. 성종 14년(1483년)에 대비 세 분을 모시기 위해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꿨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섰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었다.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이런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창경원으로 동물 구경을 가곤 했다. 1983년 들어서야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겼고 창경궁이라는 이름도 되찾았다.

조선 초기 세워진 광화문과 우리 궁궐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돼 275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 대 들어서야 중건됐지만, 일제강점기에 또다시 크게 훼손됐다. 6.25전쟁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원 사업을 통해 거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지금은 아름다운 궁궐을 자유로이 방문하지만, 이곳에서 무거운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두 번 다시 질곡의 역사를 갖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이다.

지난 2021년 1월 썼던 열세 번째 칼럼에서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세 가지 비결’을 이야기한 바 있다. 첫째, Self-Motivation(스스로 동기 부여하기), 둘째, Self-Learning(스스로 학습하기), 셋째, Self-Discipline(스스로 규율 갖기)이었다. 그리고 무림을 제패할 또 다른 성공 비결도 기회가 될 때마다 소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무너지고 소실됐다 다시 일어선 궁궐을 바라보며 세 가지 성공 비결을 보완해봤다.


▎근정전 중앙에 놓인 임금의 의자인 어좌와 병풍.
첫째,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아무리 외치고 과외까지 시켜도, 또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아무리 채근해도, 자신이 깨달아서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면 별 효험이 없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스스로의 인생사나 기업경영에서 확인하고 있다. 둘째, 스스로 평생학습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경쟁에서 이기거나 성공할 수 없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셋째, 자기 스스로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과욕·과음·과속 등 수많은 과오를 범함으로써 결코 성공에 이르지 못한다.

이번 칼럼에선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세 가지 비결, 두 번째‘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성공의 비결에서 ‘자신’이나 ‘스스로’를 뜻하는 ‘self-’를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성공은 자신이 이뤄내는 것이지 결코 남이 대신 이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self-’가 앞에 오는, 스스로 성공해내는 비결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첫째, 자기 인식(Self-Awareness)이다. 성공은 자신을 분명히 이해하는 단계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모르고 사회생활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즉, 자신의 강점을 알고, 부족한 점은 분석해 보완해야 한다. 나아가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자신이 사회생활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상대방을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가며 주변과 협력하고 협업하면서 시너지를 창출하고, 상호 이해하며 성공과 행복을 창출할 수 있다. 95%의 사람들이 자기 인식을 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직 심리학자 타샤 유리히(Tasha Eurich) 박사와 연구팀은 실제로 자기 인식을 이해하는 사람은 10~15%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과학적인 인성검사에서 자기 인식을 확인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거나 국가 행사를 열었던 경회루(慶會樓)의 측면.
둘째, 자신감(Self-Confidence)이다. 스스로를 믿고 자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감이 떨어지거나 결여되면 자기가 추구하는 성공 목표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말로만 자신감을 드러낼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실현해내는 현실적인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부단히 학습하고 연습해야만 진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손흥민 선수를 예로 들어보자. 부친인 손웅정 감독이 유소년 축구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하여 “세계의 벽, 절대 안 높아! 할 수 있어! 자신감이야!”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담긴 유튜브 영상을 봤다. 페널티킥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믿고 슛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가파른 스키 슬로프에서 두려움 없이 자신감을 갖고 멋지게 하강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선행돼야만 한다. 영업이나 기업경영에서도 자신감이 성공의 중요한 바탕이다.

셋째, 스스로를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긍심(self-esteem, self-respect)이다.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자존심은 성공을 위한 열쇠다. 자신, 가족, 회사, 회사의 기업 이념과 브랜드, 우리 사회와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에 진입해 수많은 외국인이 방문하고 싶어 하고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 이런 변화와 발전은 우리 한국인의 자긍심이 큰 바탕이 됐다고 생각한다. 70여 년 전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우리나라가 이제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Made in Korea’ 제품을 세계인들이 찾는다. 이런 기적은 우리 부모 세대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학습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품격 있는 한국인의 자긍심으로 지켜낸 결과다.

따스한 봄날, 아름다운 궁궐을 거닐며 ‘지금 내가 궁궐이 불타던 임진왜란 때 살고 있다면,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중에 살고 있다면 어떨까’를 자문해본다. 역사의 교훈을 이해하고 배우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다시금 깨닫고, 나아가 ‘성공의 비결’도 되뇌어본다.

※ 이강호 - PMG, 프런티어 코리아 회장. 세계 최대 펌프 제조기업인 덴마크 그런포스그룹의 한국 법인 창립 CEO 등 33년간 글로벌 기업 및 한국 기업의 CEO로 활동해왔고, 2014년 HR 컨설팅 회사인 PMG를 창립했다. 다국적기업 최고경영자협회(KCMC) 회장 및 연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다수 기업체와 2세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경영과 리더십을 컨설팅하고 있다. 은탑산업훈장과 덴마크왕실훈장을 수훈했다.

202404호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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