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우주의학 산업 개척자로 불리는 윤학순 스페이스린텍 대표는 우주 미세중력 환경에서 고품질 의약품을 개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지상에서 불가능한 일을 우주에서는 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도대체 그 일이 무엇인지, 또 스페이스린텍이 그리는 청사진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윤 대표를 만났다.
▎윤학순 스페이스린텍 대표는 미국 노퍽주립대 신경공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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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위성을 쏘아 올리고 우주정거장을 구축한 다음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주산업은 우주 경제(Space Economy)라는 개념을 앞세우며 무궁무진한 경제적 잠재력을 예고한다. 우주정거장에 도달한 인간이 그곳에서 어떤 경제적 가치를 발견할지 기대되는 대목이다.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2022년 6월에 발간한 보고서 [미세중력의 잠재력: 다양한 분야 기업의 우주 진출 방법(The potential of microgravity: How companies across sectors can venture into space)]에서 ‘전통적인 기업과 우주 기업은 긴밀하고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형성해 결과적으로 산업 생태계에 완전히 통합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전통산업 중에서도 제약산업(Pharmaceuticals)이 가장 빠른 기간 안에 가장 높은 수익을 창출할 것으로 내다봤다. 제약 다음으로는 뷰티·개인 관리(Beauty and personal care), 반도체(Semiconductors), 식품·영양소(Food and nutrients) 순이었다.굳이 우주에서 의약품을 개발하려는 이유는 미세중력 환경에서 고품질의 약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우주의학 스타트업 스페이스린텍(SpaceLiinTech)을 이끄는 윤학순(58) 대표는 “우주의 미세중력 환경에서는 약재의 침전 현상이나 대류 현상(물질의 이동 현상) 없이 균일한 제형을 만들 수 있다”며 “지상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우주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실제로 미국 제약사 머크(MSD)는 2017년 저궤도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의학 실험을 시작해 면역항암제 ‘키트루다’ 개발에 성공했다. 덕분에 머크는 연 매출 250억 달러(약 35조원)를 기록하고 있다. 2022년 말에는 미국 제약 스타트업 마이크로퀸(Microqueen)도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난소암과 유방암을 치료하는 신약 후보 물질을 발굴했다. 2024년 3월에는 미국 제약 스타트업 바르다 스페이스 인더스트리(Varda Space Industries)가 우주 캡슐 위네바고 1호에서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치료제 리토나비르 결정을 만들어 지구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제약사가 우주 캡슐을 활용한 최초의 사례다.국내에서도 지난 2021년 우주 스타트업 스페이스린텍이 우주의학(제약)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미세중력 환경을 활용할 수 있는 우주 궤도(위성·우주정거장)에서 의약품을 연구개발해 위탁생산(CMO) 사업을 구현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이른바 ‘글로벌 우주의학 연구·생산 플랫폼’을 꿈꾸고 있다. 우주 환경 기반의 제약 파운드리(Foundry·설계에 맞춰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로 우뚝 서겠다는 포부다.스페이스린텍을 이끄는 윤 대표는 미국 버지니아 노퍽주립대(Norfolk State University) 신경공학과(neural engineering) 정교수와 하버드의대 객원교수를 겸임하고 있다. 신경공학(뇌공학) 연구자이자 대학 교수인 그가 우주 스타트업 창업 전선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의 청사진과 기업 성장 로드맵은 무엇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지난 2024년 12월 13일 서울 중앙일보 사무실에서 윤 대표를 만났다.
국내 우주의학 산업의 개척자
▎윤학순 스페이스린텍 대표는 “국내 우주 생태계의 선순환을 위해서는 정부의 충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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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에 앞서 윤 대표는 미 항공우주국(NASA·나사), 하버드 의대(Harvard Medical School) 등과 우주의학을 연구할 기회가 많았다. 이때의 경험이 창업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우주산업과 의학(제약)이 만나면 산업적으로 파급효과가 클 뿐 아니라 사업 아이템의 시장성도 높을 것으로 판단했다”며 “난도 높은 기술이 필요한 우주의학 사업을 직접 주도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고 당시를 떠올렸다.윤 대표의 연구 이력은 화려하다. 그는 나사의 랭글리연구센터(LARC)와 존슨스페이스센터(JSC)에서 다양한 과제에 참여하며 우주의학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특히 JSC에서 진행한 연구는 방사선에 노출된 우주인의 뇌 건강에 방점을 뒀다. 그는 “우주의 미세중력 환경과 의학이 융합된 우주의학 산업의 성장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며 “다양한 우주의학 분야 중 상업성이 가장 높을 것으로 전망되는 제약업을 택했다”고 말했다.하지만 국내에서 우주의학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다. 창업 시점에는 더욱더 생소했을 터. 윤 대표는 당시 분위기에 대해 “우주산업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음에도 세상의 관심을 고르게 받지는 못했다”며 “하지만 2019년 나사에서 지구 저궤도 상업화 계획(NASA Plan for Commercial LEO Development)을 발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관련 기관·기업의 이목이 우주산업 전반에 고루 쏠리면서 우주의학도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스페이스린텍은 중소벤처기업부의 ‘초격차 스타트업 1000+ 프로젝트’와 딥테크 팁스(TIPS·민간투자 주도형 기술창업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며 성장 가도를 달리는 듯했다. 하지만 기업 성장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는 것이 윤 대표의 고백이다. 투자를 받기 위한 고난의 행군이 장기간 이어졌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놨다. 스페이스린텍은 우주의 미세중력 환경을 지상에서 구현하기 위해 드롭타워(Drop Tower)를 기획했기에 투자금 유치가 절실했다. 높은 곳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면 순간적으로 물체 내부에 미세중력 환경이 생기는데 이를 활용한 시설이 드롭타워다. 윤 대표는 “드롭타워를 이용하면 연구개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수많은 투자사를 찾아가 설득했습니다. 우주의학 분야는 향후 핫 토픽이 될 것이며, 따라서 스페이스린텍은 성장잠재력이 무한한 기업이라고 강조했죠. 그런데 설득한다 해도 막상 투자사에 사업 수익성을 검토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우주의학 기술과 시장성을 조사해야 투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데 이를 평가할 담당자가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2023년 마침내 시드 투자를 받았죠.”이후 2024년 스페이스린텍은 시리즈A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다. 이 투자 유치금으로 현재 확보한 드롭타워 기술을 고도화한다는 계획이다. 윤 대표는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기존 드롭타워는 상시적 사용이 어려운 상태”라며 “2025년 상반기 강원 태백시에 있는 장성광업소 수직 갱도에 또 다른 드롭타워를 착공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길이 900m에 달하는 태백 갱도가 완성되면 한국은 세계 최장거리 드롭타워를 가진 국가 반열에 오른다. 새로운 드롭타워는 미세중력 환경을 약 10초 동안 구현할 전망이다.
우주 의약품 위탁생산 파운드리로 우뚝사명 스페이스린텍(Space LiinTech)에서 린텍(LiinTech)은 라이프(Life)와 혁신(Innovation),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다. 이에 대해 윤 대표는 “인간의 삶에서 건강은 매우 중요한 화두”라며 “특히 항암 관련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연구개발이 필요한 분야”라고 설명했다. 이어 “스페이스린텍은 우선 면역항암제에 초점을 두고 신약을 개발할 것”이라며 “항암 치료에 혁신을 가져오는 것이 회사의 비전”이라고 강조했다. 우주 궤도에서 면역항암제 연구개발에 성공하면 또 다른 신약 개발의 가능성도 열린다. 스페이스린텍은 우주 환경에서 신약을 연구하면 개발 비용을 낮추고 기간도 단축할 수 있음을 입증하겠다는 포부다.윤 대표는 연구자 출신 창업가지만 “운이 좋게도”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우주의학은 융합학문이라 여러 분야가 협업하지 않으면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며 “사업적인 네트워킹을 통해 각 분야 간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좋아한다”고 미소 지었다. 하지만 우주의학 사업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다소 부족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우주산업에 들어가는 자금 대부분이 정부 지원금이다 보니 기업으로선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이에 신뢰성 있는, 다시 말해 우주 헤리티지가 있는 해외 기술과 제품이 각광받는 추세입니다. 결국 정부 지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셈이죠. 국내에서 우주기술이나 부품, 제품을 독자 개발하기엔 여력이 부족합니다. 한국도 뉴스페이스 시대에 진입하려면 국내 중소기업에 기회를 주는 ‘리스크 테이킹’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국내 독자 개발 기술·제품이 많아지고 우주 경제 생태계도 선순환할 수 있어요.”스페이스린텍의 성과는 빠르면 2027년에 나올 전망이다. 스페이스린텍은 드롭타워에서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함께 면역항암 약물이 세포에 침투하는 과정을 연구 중이다. 미세중력 환경에서 약물이 더 효과적으로 세포에 침투한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윤 대표는 “2027년에서 2028년쯤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내다본다”고 말했다. 또 스페이스린텍은 중력이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다양한 테스트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드롭타워에서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로 준궤도·저궤도에서 위성 플랫폼 실증 평가를 실행할 계획이다. 지상과 플랫폼, 두 곳에서 신약 연구개발을 진행해 신뢰성과 성공률을 모두 잡겠다는 복안이다.최근 스페이스린텍은 정부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할 기회를 얻었다. 2024년 12월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이 주관하는 ‘의료 난제 극복 우주의학 혁신의료기술개발’ 프로젝트에 스페이스린텍이 주관사로 선정됐다. 국가 보건의료 난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이번 프로젝트에는 인하대병원 항공우주의학센터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공동 연구기관으로 참여하며, 국내 바이오기업 앱티스(동아ST 자회사)와 하버드의과대학도 적극적으로 협력할 계획이다. 한국 우주의학 스타트업이 국내외 산학연을 총괄해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프로젝트 기간은 2029년 4월까지다. 4년 뒤 스페이스린텍이 내놓을 성과가 기대된다.-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_ 사진 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