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시대의 아픔 달래던 민중의 대변자들 

서정적 멜로디와 강한 호소력으로 인기 얻어… “향수에 그칠지라도 삶의 모습 담은 노래도 필요”
기획연재 한국이 낳은 불후의 대중가요 뮤지션 12인 - ⑥노래를 찾는 사람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1984년에 발매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앨범 재킷.

군사정권이 연장된 1980년. 잠시 해빙 무드가 찾아왔지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광주민중항쟁이다. 시대는 뜨거운 용광로 같았다.

1987년 6월. 민주화 열기가 용광로처럼 펄펄 끓던 그 시절 민중가요는 그야말로 감동의 노래였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손을 맞잡고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을 목 놓아 불렀다.

문화운동은 이전보다 변혁의 기운이 더욱 드세졌고, 조직적 체질개선을 이뤘다. 당시 서울대학교 노래패 ‘메아리’를 필두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수많은 대학 노래패가 그 증거다.

그 중 보컬그룹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주류와 민중가요의 경계에서 활발한 음악실험을 통해 시대를 증언하는 노래를 양산했고, 그 노래들은 당대 민중의 성나고 슬픈 정서를 위로했던 위대한 가락이었다.

조용필의 일인독재가 시작된 1980년대 대중음악은 몇 가지 흥미로운 기록을 잉태시켰다. 주류와 언더의 공존이다. 소위 ‘조동진사단’과 록밴드 ‘들국화’로 대변되는 언더 가수들의 약진과 더불어 김민기와 대학 노래패가 만나 결성한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로 대변되는 민중가요가 주류 대중음악에서까지 확실한 지분을 차지했다.

‘노찾사’는 진보적 노래운동 집단이다. 이들은 1980년대의 사회적 울분을 대변하고 삶의 현장을 민중가요를 통해 펼쳐내 강한 대중적 설득력을 획득했다. 잘 다듬은 가사, 건강한 정서를 바탕으로 한 서정적 멜로디, 맑고 강한 보컬이 담긴 그들의 노래에 당시의 대중은 강렬하게 반응했다.

단순한 가수나 보컬그룹이 아닌 ‘노래운동’을 지향한 노찾사의 음반은 1980년대가 배출한 훌륭한 대중문화유산이다. 노찾사를 주도했던 인물은 많다. 그 중 서울대학교 노래패 ‘메아리’ 때부터 참여했던 김보성 전 대표를 만나 노찾사의 역사를 들었다. 그는 1979년 서울대 농대 축산과 입학 전부터 노래동아리 ‘메아리’의 MT에 참가한 초창기 멤버다.

대학교 노래패가 잉태한 ‘노찾사’

1977년 태동한 ‘메아리’에는 두 가지 음악적 경향이 있었다. 한 쪽은 대학가요제 출전에 목표를 둔 순수 음악 애호 그룹이다. <젊은 연인들>로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했던 서울트리오의 이경호가 이 그룹에 속했던 창립 멤버다. 다른 한쪽은 문화야말로 가장 ‘정치적 무기’로 생각한 멤버들이다.

<사계>를 만든 문승현은 동아리를 의식화 쪽으로 몰고 간 음악적 중심이었다. 그는 1977년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했다 이듬해 진로를 바꿔 정치학과에 재입학한 특이한 인물이다. 성공회대 교수로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창남은 경영학과 78학번이다. 이처럼 초창기에는 이질적인 음악 경향의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동거했다.

1980년대 들면서 사회 분위기에 맞춰 모든 동아리가 의식화하며 사회교육학습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메아리의 정기 공연은 학교의 공개적 의식화 통로였다. 당시에는 서울대의 메아리와 이화여대의 ‘한소리’가 대학가 노래운동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1979년 고려대에서 ‘석화’가 생겼다.

김보성은 동아리 집행부 일원이 된 1981년 약대 출신 79학번 김재섭과 외부로 나가 서울 동숭동 가톨릭학생회관에서 연합 메아리 결성을 시도했다. 이때 김광석도 들어왔다. 78학번 문승현·김창남 등은 졸업반이 되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했다. 노래운동을 젊은 혈기로 끝낼 것인가, 사회운동으로 이어갈 것인가?

결국 졸업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노래운동진영의 정예 세력으로 진보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노래패 ‘새벽’이다. 이들은 새로운 음악의 흐름을 이끌었다. 대중음악사상 최초로 대중음악 학술 무크지 <노래>가 김창남 주도로 발간됐고, 음악 쪽은 문승현이 맡았다. 김보성 전 대표의 회고다.

“당시 대학가요제 출전을 원하는 것은 죄악시됐다. 단체로 부르는 ‘떼창’이 미덕이었고, 개인의 솔로 부각은 존중받지 않던 시대였다. 지금 생각하면 천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당시는 공동체적 유대감을 최고의 가치로 삼던 시대였다. 새로운 대중적 흐름이나 작업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7년 대학로에서 열렸던 노찾사 창립 30주년 기념 공연.

1982년 김보성은 농대 신입생환영회 사회를 보던 중 데모가 터져 잠정적 주동자로 찍혔다. 지도교수가 자발적으로 군에 가라고 해서 휴학하고 현역 군 입대 후 의가사제대를 했다. 노찾사의 탄생은 우연히 이뤄졌다. 해금 후 활동을 재개한 김민기는 1983년 노래극 <개똥이> 음반을 제작하고자 했다.

그러나 공연윤리위원회의 황당한 심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계약한 음반사에 다른 음반이라도 만들어줘야 할 처지가 됐다. 그래서 김민기의 요청으로 ‘개똥이’ 팀과 ‘새벽’을 중심으로 음반 준비팀이 모였다. 김민기는 ‘메아리’ 때 불렀던 노래로 음반을 하나 내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당시 흉흉했던 정국에서 합법 음반 발매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녹음을 결정했다. 김민기는 굉장히 꼼꼼한 성격의 완벽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음반에 참여한 멤버들의 기여도를 따져 1원짜리 하나까지 계산해 줬다고 한다. 이 대목은 완벽하게 김민기가 노찾사 1집의 제작자라는 증거다.

녹음은 서라벌레코드사 녹음실과 랩 스튜디오에서 병행해 밤늦게까지 진행됐다. 당시 첫 스튜디오 작업을 멤버들은 신기해 했다고 한다. 김보성은 <갈수 없는 고향> <산하> <그루터기> <기도>에서 테너 코러스파트로 녹음에 참여했다. 김광석은 하모니카를 불렀다. 연극반 출신으로 현역 치과의사인 이종우가 앨범 타이틀을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작명했다.

이 대목은 중요하다. ‘노찾사’는 앨범 타이틀이지 지금의 보컬그룹 이름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앨범 재킷 사진으로는 어느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구해 음영으로 디자인했다. 익명의 대중 누구나 무수한 군중 속에 숨어있는 하나의 노찾사라는 의미였다. 1984년 총 9곡이 수록된 노찾사 초반은 서라벌레코드에서 제작됐다.

하지만 김민기가 제작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심의가 통과되지 못했고, 군사정권의 탄압을 두려워한 서라벌레코드는 1집의 공식 배포를 포기하고 창고로 직행시켰다.

‘연행될라…’ 살얼음판 걷는 듯했던 첫 공연

1984년 1집 제작 후 서울 마포구 아현동 시장 어귀에 있는 애오개소극장에서 ‘한돌’의 노래를 타이틀로 한 <가지꽃> 공연을 열었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노래극이었다. 많은 노동자로 만석을 이룬 공연을 보러 성남에서 온 한돌은 정작 숫기가 없어 입장하지 못한 재미있는 사연을 지니고 있다.

이 공연은 후에 탄생할 민예총의 모태가 됐다. 시대는 더욱 격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에 김보성은 공연 후 노동현장으로 떠났고, ‘새벽’의 활동은 집회 참여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됐다. 음반만 있고 노래를 부르는 주체가 없던 노찾사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음악 중심인 문승현, 만물박사인 고려대 표신중(‘석화’의 창립자)이 주도해 서울 종로5가에 있는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 공식 공연을 준비했다. 1987년 10월. 1집의 참가자와 맥을 같이하는 서울대 ‘메아리’, 고려대 ‘노래얼(원래 석화)’, 연세대 ‘울림터’, 노래집단 ‘새벽’ 등 20여 명이 노찾사라는 이름 아래 뭉쳤다.

그곳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대중가수 김광석·안치환·권진원도 있었다. 노찾사의 첫 공식 공연이다. 김보성의 회고다. “문승현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정확하게 만들어내는 천재다. 노래운동을 이끌어온 사실상의 주인공이다. 팀을 모아 활동하면서 팀명이 필요했는데 1집 앨범 타이틀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민기 형과 협의하지 않았다. 만약 허락을 구했다면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대적 명분이 있었고, 그 이름은 민기 형의 사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노찾사’라는 이름으로 공연단이 생겨났다.”

한동헌 현 노찾사 대표는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의 첫 공연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당시 민주화운동 덕분에 노찾사의 노래가 힘을 얻었기에 그때의 시대정신을 돌아보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멤버 송숙환은 “그때는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 무사히 공연을 끝낼 수 있을까, 연행되지 않을까 싶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박수를 받았는지…. 모두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기억했다. 노찾사는 대중음악계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기존의 대중가요와 다른 민중가요가 당시의 대중에게 얼마나 강한 호소력으로 감동을 안겼는지는 그들의 공연 현장에서 확인됐다. 그런 점에서 1989년 발표된 노찾사 2집은 발매 이전에 이미 히트가 예고된 음반이다.

1990년 노찾사의 공연 당시 모습.

자연스럽게 1987년 서울음반에서 재발매된 1집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노찾사 2집은 1980년대의 진보적 민중가요의 진수를 담은 명반이다. 또한 노래운동이 처음으로 상업적 일반 대중가요시장 진입에 성공한 기념비적 음반이다. 타이틀곡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가 가요 차트 4위까지 올랐고, <광야에서>가 광고음악으로 사용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발매 1년 동안 음반은 50만 장 판매기록을 넘어섰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2집 재킷의 이미지는 의미심장하게 대중의 폐부를 찔렀다. 드문드문 모습이 지워진 초등학생들의 흑백졸업사진은 민주화운동으로 사라진 열사들의 상징으로, 의문사한 사람들로 사회적으로 재해석되며 의식 있는 음반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미 거리에서 수많은 민중에 의해 불린 이들 노래를 검열당국도 가위질하기 두려웠을까? 수록곡들은 당시의 검열 기준으로 보면 기존의 대중가요 어법과 다른 파격적 표현들로 가득 찼지만 어찌된 일인지 원안 그대로 통과됐다. 변혁의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노찾사 2집은 시대의 요구에 의해 잉태되고 출산한 명반으로 평가할 만하다.

노찾사 음악의 특징은 개인보다 그룹의 색깔에 충실한 점일 것이다. 하지만 <광야에서>와 <잠들지 않은 남도>를 부른 안치환과 <저 평등의 땅에> <사계> 솔로 부분의 권진원의 보컬은 확실히 차별적이었다. 이쯤에서 역대 노찾사 대표의 면면을 정리해 보자. 초대는 이경호가 대표를 맡았다.

나동민이 음악감독으로 팀을 운영할 때 사무국장을 맡았던 최병선이 2대 대표다. ‘배후 조종자’였던 문승현은 1992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김보성에게 대표직을 제안하며 노동현장에서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1집 음반 인세로 만든 큰빛기획(대표 최병선)으로 복귀한 김보성은 반년 정도 그곳에 있다 큰빛기획과 노찾사의 대표로 복귀했다. 행진곡·군가 풍의 3집까지 발매된 시점이었다.

이미 시대에 뒤처지기 시작한 노찾사의 그들답지 않은 음악성에 서사 일변도의 노래가 담긴 3집은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김보성은 대표로 복귀한 후 앉아서 기다리는 기획이 아닌 자발적 기획을 위해 조직을 개편했다. 우선 1년에 300회에 가까운 공연을 했다. 1994년 대도시 중심의 공연을 전국 중·소도시로 확대하며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추억으로 전락한 노찾사, 후배들 리메이크는 이어져

운동권 노찾사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개인가수들을 통합해 대중음악 전체를 풍성하게 하는 운동을 염두에 두었다. 권진원·노래마을·김광석·안치환·이정렬과 형제 같은 네트워킹으로 연결해 노찾사 기획을 다음기획으로 발전시키는 체질개선을 시도했다. 그 결과 음반 제작 전 ‘열린음악회’ 같은 무대에 노래를 발표하는 성과가 있었다.

그가 자부심을 느끼는 대목이다. 1994년 노찾사 창립 10주년을 맞아 기념 음반이 나왔고, 그 해 12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 공연을 열었다. ‘민예총’ 이름으로 첫 대박을 기록한 공연이었다. 이후 노찾사는 다양한 모색기로 들어간다. 누구도 음악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김보성은 “당시 음악감독을 영입하려고 노력했는데 힘들었다. 한동안 기획의 힘으로 유지해 왔는데 다음기획을 해보니 돈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 힘들었다. 그때 이 운동은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기획 대표 시절 보컬그룹 ‘종이연’ 멤버 윤도현을 솔로로 데뷔시킨 인물이다.

이처럼 경영적 수완을 발휘할 수도 있었지만 노래운동의 적자인 그는 노찾사를 포기하고 다른 가수들을 메인으로 키울 수는 없었다. 그는 민음협(한국민족음악인협회)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 1980년대에도 노찾사는 음악의 정체성 문제로 진통을 겪었다. 대중은 열광했지만 운동진영도 가요판도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들의 음악은 점차 힘을 잃어 1990년대 중반 이후 활동이 주춤했다. 2005년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21주년 기념 공연을 했다. 공연 후 그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들의 호평과 함께 노찾사의 음악이 7080류의 일개 ‘추억’으로 전락하는 분위기에 많은 이들이 우려감을 표명했다. 2007년에는 서울 대학로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에서 ‘6월항쟁 20주년 기념’ 공연을 통해 향후 민중가요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한동헌 대표는 “활동을 재개할 때도 잘 보존되고 있는 노찾사를 들춰내지 말자는 의견과 논쟁이 있었다. 노찾사가 요즘 음악시장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심하게 말해 향수나 노스텔지어에 그칠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의 시대적 소망을 노래에 담았듯, 현재의 삶의 모습과 아픔을 노래하는 음악은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최근 댄스그룹 거북이가 <사계>를, 래퍼 MC스나이퍼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리메이크해 10대들도 노찾사의 노래를 안다. 2007년 <한국일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6명이 6·10항쟁을 모른다’고 밝혀졌다. 하지만 노찾사의 노래는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1987년 6월항쟁의 정신을 기억하게 하는 흔치 않은 통로일 것이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전 <한국일보> 기자이자 프로 사진가. 7080 음악열풍을 주도한 공연기획자. 희귀 음반을 비롯한 대중문화자료 수집가.

KBS·SBS·CBS·교통방송 등에서 음악프로그램 진행.

현재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각종 신문·잡지·사보에 대중문화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200906호 (2009.06.01)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