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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만 ‘징역’ 사는 아동성범죄>> 형량만 高空행진, 처벌은 제자리걸음 

 

상습범으로 무기징역 받았으나 정신질환 판정에 15년 형으로 줄기도 어릴 때 피해당한 여고생 정아 미니홈피엔 ‘죽고 싶다’는 글뿐 4월부터 적용된 양형기준법에 따르면 조두순 같은 아동성범죄자는 이제 최대 50년 형 징역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제2의 조두순’이 그리 쉽게 잡힐지 의문이다. 아동성범죄자는 아예 법의 심판대에 오르지도 않고 빠져나가는 ‘사법누수현상’의 최대 수혜자다.

▎아동성폭력 상담치료센터를 찾은 한 아이. 지난해 이곳을 찾은 피해아동은 600여 명에 이른다.

열한 살 혜린(가명)이는 자전거를 좋아했다. 그날 오후에도 혜린이는 아파트단지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2005년 가을께였다. 그때 모자를 푹 눌러쓴 한 남자가 혜린이에게 다가와 1000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내 친구가 이 아파트에 사는데 같이 좀 찾아줄래?”

아이는 남자가 가리키는 아파트로 함께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남자가 15층을 눌렀다. ‘땡’ 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괴물로 돌변했다. 그는 혜린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세차게 때렸다. 그대로 고꾸라진 아이를 향해 그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목 졸라 죽이겠다”고 소리쳤다. 그때부터 혜린이는 괴물이 하자는 대로 해야 했다. 엄마에게 “자전거 조금만 타고 오겠다”던 아이는 귀가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생식기가 심하게 찢어져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혜린이는 ‘그 남자’의 여덟 번째 희생양이었다. 남자는 혜린이 말고도 11명의 또래아이들을 한 달여 간격으로 성폭행했다. 그는 이미 유사한 사건으로 5년간 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지 겨우 6개월 된 상습범이었다. 출소 후 그는 오히려 더 치밀해졌다. 사전에 강간 장소를 물색하고, 각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CCTV에 찍히지 않으려고 모자를 쓰고 다녔다. 2005년 초부터 재개한 남자의 범행 주기는 해를 넘기며 점차 짧아졌다. 2006년 초에 이르자 1주일 간격으로 피해자가 나왔다. 그는 13번째 아이를 물색하던 중 잠복했던 경찰에 잡혔다. 그해 5월, 남자는 법정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마땅한 죗값을 치르는 듯했다. 하지만 남자는 항소했다. 혜린이를 비롯해 초등학생 12명의 인생을 망가뜨린 남자의 형은 금세 징역 15년으로 줄었다. 아이들의 진술만 듣고 협박한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고, 정신질환 증세로 성적욕구를 참지 못하는 ‘심신미약 상태’라는 이유였다. 한 피해자 부모는 “15년이지만 가석방돼 금방 나올 것 같다”며 “우리 아이와 가족은 그 악몽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놈은 벌써 5년을 채웠다고 기뻐할 것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온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지난 10년간 공식 집계된 13세 미만 성폭력 피해아동은 전국적으로 5135명. 1년에 약 500명꼴로 피해자가 발생한 셈이다. 하지만 성폭력범에게 내려진 처벌은 생각보다 가볍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말 발표한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발생 추세와 동향분석’에 따르면 그중 61.6%가 집행유예나 벌금형 등으로 풀려났고, 37.5%만이 유기징역을 받았다. 유기징역형도 절반가량이 3년 미만의 가벼운 형이다. 무기징역을 받은 사례는 0.7%인 10건, 사형은 단 2건에 불과했다.

100건당 고소는 2~3건

전문가들은 아동성범죄자들이 ‘솜방망이 처벌’로 풀려나는 이유로 ‘증거불충분’을 들었다. 아동성범죄는 피해아동의 진술 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진술과정조차 어린아이의 언어능력과 발달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뤄진다. ‘조두순 사건’ 피해아동의 치료를 담당한 신의진 연세대 정신과 교수는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도 제대로 진술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그런 일을 겪고 사건 상황을 한 번에 명료하게 말하는 아이는 거의 없어요. 오히려 기억하기 싫은 것은 말하기를 꺼립니다. 충분한 치료 과정을 두고 자연스럽게 진술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우리 시스템은 아직 이를 잘 인정하지 않아요.”

특히 연령대가 낮을수록 언어능력이 떨어져 명확한 진술이 힘들다.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부모들의 사랑방(미모사)’ 곽희영 회장은 “범죄자들도 이를 알고 오히려 악용하는 듯하다”면서 “피해아동의 연령이 점점 낮아지는 추세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곽 회장의 아이도 겨우 다섯 살 때 피해를 봤다고 했다.


▎지난해 서울 영등포의 한 초등학교에서 여자아이를 납치해 성폭행한 김수철이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이제 막 세 돌, 네 돌 지난 아이들이 표현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예를 들어 무서운 상황에서 남자 성기를 봤다면 ‘도깨비방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잖아요? 갈색 옷을 ‘빵색’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런데 경찰이나 검사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아이보고 육하원칙을 지켜서 말하라고 하지 않나. 자기들이 못 알아들으면 아동심리전문가를 대동해 의견을 구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아요. 아이 시각에 맞는 전문가가 있어야지, 수사관 기준에 맞춘 전문가는 소용없어요.”

아동 진술만으로는 기소는커녕 고소까지 가기도 힘든 현실이다. 한 베테랑 수사관은 “아동성범죄는 증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고소되는 경우는 100건 중 2~3건에 불과하다”며 “2~3건 중에서도 기소돼 법정까지 가는 사건은 더 희박하다고 보면 된다”고 한다.

피해자 부모가 어렵게 신고해도 가해자의 협박에 시달려 고소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지영(가명) 씨는 아홉 살 난 딸의 피해 사실을 알고 가해자를 고소했다. 그러자 가해자는 물론 그 가족까지 집으로 찾아와 고소 취하를 요구했다.

“제가 지나가면 ‘저년이 아이 이용해 우리 돈 뜯어내려고 하는 짓’이라고 소리쳤어요.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당당하니 기막힐 노릇이죠. 동네 사람들은 또 그것을 듣고 집값 떨어지니 다른 데로 이사하라고 하고요. 저희 형편에 이사하는 것이 쉽지도 않은데 그런 식으로 해버리니 방법이 없더라고요. 저는 그렇다 쳐도 아이에게 못할 짓이잖아요?”

가해자는 딸의 학교까지 찾아가 난동을 부렸고, 결국 김씨는 고소를 취하할 수밖에 없었단다. 김씨는 “누가 나처럼 피해 사실을 신고한다고 하면 말리고 싶다”고 말했다.

경찰의 느긋한 초동수사도 가해자 검거와 고소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강미연(가명) 씨의 딸 예원(가명)이는 사건 당시 열한 살이었다. 오후 7시 학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맞은편에서 오던 한 남자는 양손에 동네 마트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예원이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갑자기 비닐봉지를 내팽개치더니 아이를 끌어안았다. 이어 한 손은 어깨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은 예원이 팔을 꺾어 단단히 잡았다. 어깨에 올린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에 점퍼를 뒤집어 씌워 입을 막았다. 그러나 남자의 키가 작고, 아이는 상대적으로 성숙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연인같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컴컴한 뒷골목으로 예원이를 끌고가 옷을 벗기고 욕망을 채우려 들었다.

“아이를 끌고 가던 길에 공원이 있었어요. 예원이 말이 그때 공원 벤치에 경찰 대여섯 명이 있는 것을 봤대요. 아이를 어색하게 끌고 가는데도 경찰이 어떻게 모를 수 있어요? 그나마 동네 사람이 이상해 따라갔다가 아이를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그분 아니었다면 우리 아이 지금 못 볼지도 몰라요.”

아동성추행은 살인미수

가해자에게서 풀려난 예원이는 집으로 오자마자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놨다. 그길로 강씨는 근처 지구대에 신고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증거가 있느냐”였다. 사건현장에라도 가보면 안 되겠느냐는 강씨에게 경찰은 “어차피 지금 가도 범인 못 잡는다”며 거절하더란다. 예원이는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나이였고 아이를 구한 목격자도 있었지만 참고인 진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고소해봐야 고생만 하고 처벌하기 힘들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라고 했다.

서울 모 경찰서 여성청소년계 담당 경찰관은 “아동성범죄는 증거 찾기가 어려워 잘 맡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판결받아 집행돼야 건수가 올라가는데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사건 처리 수로 인사고과를 정하는 성과제를 배제하지 않는 한 아동성범죄 수사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경찰관은 “우리에게 아동성범죄 문제는 안 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확 잡지도 못하는 뜨거운 감자와 같다”고 말했다.

초동수사가 잘 안 돼 고소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와 반대로 아동성범죄의 형량은 꾸준히 높아졌다. 13세 미만 아동 대상 강간상해·치상의 경우 처음에는 성인과 같은 수준인 3년 이상 징역형이었으나 조두순 사건과 김수철 사건을 거치며 10년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4월부터 적용되는 양형 기준도 높아졌다. 가중처벌 사유가 있을 때는 최대 50년의 유기징역이나 무기징역도 가능하다.

하지만 형량 강화만으로 아동성범죄가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이르다. 유죄판결을 하려면 형량이 높아질수록 그만큼 엄격한 증거가 필요하다. 아동성범죄는 그만한 증거를 찾기 어려워 강간죄가 성립하기 힘들다고 한다. 한 일선검사는 “형량이 높은 강간죄로 가져갔다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느니 차라리 좀 약한 형량인 강제추행을 적용해 유죄판결을 얻어내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9년 사건을 기준으로 봤을 때 강간으로 기소된 아동성범죄사건이 15.6%인 반면 강제추행은 84.4%에 달했다.

그러나 아동의 경우 성인 대상 성추행에 비해 피해 정도가 다르다. 신의진 교수는 “특히 아동성폭력은 성기 접촉이나 아동의 성기를 만지는 것, 생식기에 손가락 혹은 이물질을 삽입하거나 가해자의 성기를 만지도록 하는 등 성기추행이 많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주로 강간·임신 등의 피해 양상을 보이는 성인여성과 차이가 있다고 한다.

“아이들의 신체적 특성상 가해자의 성기 삽입이 어려워요. 그래서 손가락이나 도구를 사용하죠. 그 피해 정도는 성인이 추행당한 것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심각해요. 말이 강제추행이지 아이한테는 강간이나 살인미수로 봐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피해아동의 언어·발달능력을 고려해 치료와 병행한 진술과정이 필수”라고 말한다.

180시간 교육받고 전문가?

하지만 현행법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지 않은 모든 종류의 행위에 강제추행죄를 적용하도록 규정했다. 곽희영 미모사 회장은 “아동에게 이 같은 행위를 한 경우에는 강간죄와 동일하게 처벌하는 법안을 마련하라고 국회에 요구 중이지만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동성범죄는 낮은 신고율→낮은 기소율→낮은 유죄판결률로 이어지는 삼중고에 시달린다. 한 피해자 부모는 “아동성범죄의 특성을 파악하지 않은 채 형량만 강화한들 무슨 소용이냐”며 “지금 상태에서는 어차피 안 잡힐 텐데 100번 사형시키는 법을 만들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형량만 강화된 것은 아니다. 정부는 아동성범죄 피해자를 돕는 각종 ‘맞춤정책’을 쏟아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여성·아동폭력피해중앙지원단’을 발족했다. 동시에 서울·대구를 비롯한 전국 10개 지역에 성폭력 피해아동을 지원하는 해바라기아동센터를 설치했다. 지역별 거점병원과 연계한 아동·여성·학교폭력피해자 원스톱지원센터도 17곳이나 개소했다. 문제는 너무 급하게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서울해바라기아동센터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신의진 교수는 “면피용으로 숫자만 늘렸을 뿐 전문가 양성이나 아동 지원은 뒷전”이라며 현 정책을 꼬집었다.

여성가족부는 올 초 성폭력 피해아동·장애인의 진술조사 전문인력 양성 교육과정을 이수한 전문가 19명을 국내 처음 배출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지난해 10~12월 180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신 교수는 “겨우 두세 달 교육받고 피해아동의 심리상태를 파악해 안정적 진술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법무부도 9월부터 서울중앙지검에 ‘여성·아동범죄조사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법무부는 “여성검사와 전문수사관을 배치해 아동대상 범죄와 각종 여성대상 사건을 전담하도록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10여 년 전 도입한 ‘아동성폭력 전담검사제’도 ‘무늬만 전담’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지난 2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전담검사가 일반 사건의 체포·구속·기소 등 업무와 병행해 기소율이 떨어진다고 봤다. 또 경찰 단계에서 사건 접수가 일원화되지 않아 전담검사는 무용지물이라는 의견도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여성 대상 범죄를 모두 묶어놓은 새로운 담당부서가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의문이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주먹구구식으로 늘어나는 관련 정책을 두고 “현재 상태에서 급하게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총동원된 것은 사실이나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충격적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여론이 들끓었죠. 그에 맞춰 급하게 이런저런 정책을 많이 발표해 이제는 안전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도입된 제도가 조두순· 김수철 같은 사람을 막기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표 교수는 가장 효과적 예방책으로 가해자에게 장기간에 걸친 치료와 교육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서는 더 강력한 형 집행이 필수”라고 덧붙였다.

“아동성범죄는 욕구와 충동의 문제입니다. 일반인은 어지간해서는 행하지 않을 범죄죠. 대부분의 아동성범죄자는 소아기호증과 성도착 증세를 보입니다. 이런 병은 한 번 처벌받는다고 해서 고쳐지지 않아요. 국가 차원에서 이런 사람들을 수감 중에 치료해 내보내야 하는데, 현재까지는 별다른 노력이 없었어요. 현재 상태로는 범죄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가해자가 교도소 들어갔다 나와 다시 범행을 저지르게 놔두는 셈이죠.”

“재범 가능성 100%다”

여성가족부는 동종 전과를 가진 가해자는 강간 6.8%, 강제추행 2.2% 수준으로 본다. 하지만 표 교수는 “아동성범죄자의 재범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고 한다. 아동성범죄자의 경우에는 동종 전과뿐 아니라 이종 전과 재범률도 유심히 살펴야 한다고 표 교수는 말했다.

“이종 전과가 말해주는 것은 범죄자의 반사회성입니다. 그리고 반사회성이 남아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아동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요. 미국의 경우 재범률을 파악할 때 1년 단위로 보지 않습니다. 10년, 20년 단위로 추적하죠. 그러면 초기에는 10% 내외던 재범률이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져 20년 후에는 아동성범죄자의 60% 정도가 재범합니다. 처음 1년 동안은 조심하거나 수단을 교묘히 바꿔 재범률이 낮은 듯 보이는 거죠.”

이처럼 높은 재범 가능성에도 가해자는 비교적 쉽게 풀려난다. 반면 피해아동의 고통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에서 성추행당한 경험이 있는 정아(가명·17)도 마찬가지다. 그 일이 있기 전만 해도 정아는 평범한 아이였다. 반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성격도 활발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정아는 완전히 달라졌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면서 친구들은 정신병자라고 놀려댔다. 늘 고개를 숙이고 다니거나 혼자 구석에만 머무르다 보니 정아는 어느새 반에서 따돌림을 받는 신세가 됐다. 사건현장 근처의 중학교 진학도 포기했다. 얼마 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아의 미니홈피에는 온통 ‘죽고 싶다’는 글뿐이다.

그런 정아를 바라보는 엄마 이민주(가명) 씨의 마음은 이미 까맣게 탔다. 이씨 역시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 홀로 정아를 키워온 이씨는 딸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어 직장도 그만뒀다. 지금은 구청에서 주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지금도 저와 딸은 서로 조용하면 불안해져요. 아이가 혹시나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혼자 오래 두지 못해요. 새벽녘에도 가만히 방문을 열어 정아가 자는 모습을 봐야 잠들 수 있어요. 아이도 마찬가지라고 해요. 엄마가 자기 두고 죽을까 봐 두렵다고요. 처음 몇 년간은 ‘그냥 다 잊고 살자’고 마음먹고 노력도 해봤어요. 그런데 우리는 8년이 지난 지금도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아요.”

정아를 성추행한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사건 발생 직후 고소장을 제출했지만 수사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수사를 안 했으니 처벌할 대상도 없다. 정아 어머니는 “아동성범죄자에게 이제는 무기징역도 내려질 수 있다는 뉴스를 보고 쓴웃음만 나오더라”고 했다. 정아는 오늘도 가해자 대신 ‘감형 없는 옥살이’를 산다.

201105호 (201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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