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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46년 특별기획 - 정약전·약용 형제 혈루(血淚)의 정 

‘현산어보’를 아낀 다산, 제자 이청에게 보완을 요청하다 

글·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성균관대 석좌교수 사진·지미연 월간중앙 기자
1801년 유배길 나주 밤남정 주막거리서 헤어진 후 끝내 해후 못해…<현산어보>엔 유배 중 학문적 대업 이룬 형제의 동지애적 의리 각인돼 있어

▎정약용에게 함께 유배생활을 하는 형 정약전은 평생의 지기였다. 사진은 흑산도에 있는 정약전 유배공원. 정약전의 초상화가 없어 아우인 정약용의 영정을 그려넣은 것이 눈에 띈다.



200년 세월이 흘렀다. 1801년 음력 11월 22일 새벽, 나주읍에서 북쪽 5리 지점에 있던 ‘밤남정(栗亭)’ 주막거리에서 두 형제가 헤어진 때로 보면 214년의 긴긴 세월이다. 그들 형제는 지하에서 다시 만나 형제지기(兄弟知己)의 그리운 회포를 풀고 있을지는 모르나, 지상에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긴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현산어보(玆山魚譜)>라는 아주 작은 분량의 책한 권으로 세상에서 큰 이름을 전하는 다산 정약용의 중형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형 약전과 아우 약용은 아주 특별한 관계의 형제였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네 살 터울의 형과 아우, 천재적인 두뇌에 박학다식한 학자로서도 같은 수준이었고, 사회와 국가의 변혁을 꿈꾸고 세상의 개혁에 학문의 방향을 집중시켰던 진보적 마인드에서도 같은 수준이었다. 같은 의식과 뜻을 함께했다는 방증이라도 해주듯, 그들은 같은 날 함께 중국에서 갓 전래된 천주교 관계 서적도 읽었고, 같은 시기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한때 거기에 몰입했던 것도 비슷했다.


▎정약전·약용 형제는 한때 천주교에 빠졌고 또 그에 대한 장점을 발설했다는 이유로 함께 감옥에 갇히고, 국문을 당한 뒤 귀양살이를 해야했다.
하룻밤 정 나누고 영원한 이별 고해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에서 함께 빠져 나왔지만, 정적들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한때 천주교에 빠졌고 또 그에 대한 장점을 발설했다는 이유가 빌미가 되어, 그들은 함께 감옥에 갇히고, 함께 국문을 당했다.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밝혀져 감옥에서 나왔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함께 유배를 떠나야 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1801년 2월 초, 정약전은 전라도 완도의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포항 곁의 장기로 떠나야 했기에 출발부터 헤어져야 했다.

그해 10월, ‘황사영백서’ 사건이 터지자 그들은 귀양지에서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다시 감옥에 갇혀 또다시 함께 국문을 받아야 했다.

거듭 죄가 없음이 밝혀졌으나, 그들 형제는 귀양지가 바뀌어 함께 나란히 서울을 출발해 전라도의 나주까지 왔다. 나주읍 북쪽의 ‘밤남정’ 주막거리에 도착한 때가 1801년 11월 21일 저녁.

하룻밤을 한 방에서 잠을 자고 난 형제는 다음날 22일 새벽, 목포 쪽과 완도 쪽의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길고 긴, 영원한 이별이었다.

초가 주막 해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율정별(栗亭別)’이라는 다산이 지은 시의 도입 부분이다.

또 마치 바보스런 아이가/ 망연스럽게 무지개 붙잡으려는데/ 서쪽 언덕 바로 앞에/ 아침 무지개 또렷이 보이지만/ 아이가 쫓아가면 무지개는 더욱 멀어져/ 또 저 서쪽 언덕으로 쫓아가도 다시 서쪽이라네

‘율정별’은 이런 마지막 구절로 끝을 맺는다. 형제지기, 동급의 실학자, 같은 수준의 개혁의지를 지녔던 형제는 붙잡고 싶은 무지개처럼, 다가가면 갈수록 멀리 달아나고 말아, 끝내는 생시의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으니, 그들 형제의 한(恨)을 누가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

정약전의 호인 손암(巽庵, 들어가 버린 사람)이라는 글자의 뜻처럼, 흑산도로 들어간 정약전은 16년째에, 아우 약용의 손목을 붙잡아보지도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다산은 그 3년 뒤에 18년의 유배살이를 마치고 ‘율정점’을 거쳐 귀향했지만, 더 멀리 가버린 무지개처럼, 사라져버린 약전 형님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흑산도라는 절해의 고도로 들어가버린 정약전, 강진이라는 땅끝 바닷가에서 귀양살던 약용, 이들 형제는 만날 수야 없었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그리운 정을 달래고, 학문에 대한 토론을 계속했다. 약전에게 보낸 다산의 편지가 전해진다.

“책을 저술하는데 있어 한 가지는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으니, 반드시 십분 유의하심이 어떨까요. <해족도설(海族圖說)>은 무척 기이한 책이니, 그 책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도형(圖形)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로 쓰는 것이 그림으로 그려 색칠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학문의 종지(宗旨)에 대해 먼저 그 대강(大綱)을 정한 뒤에 저술하여야 유용한 책이 될 것입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전이 유배 생활을 했던 흑산도의 사촌서실



<현산어보>에 대한 다산의 견해

이 편지 내용으로 보면 <현산어보(玆山魚譜)> 저술의 처음 단계에는 ‘해족도설(海族圖說)’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물고기에 대해 도형으로 그려 색칠하고 설명도 첨부할 의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산은 그림보다는 글로 써서 저술해야 한다고 말했고, 다산 자신의 저술의 근본 목표인 학문의 종지(宗旨)를 설명했다.

‘해족도설(海族圖說)’이야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학문 종지의 여러 곳에 해당하는 책이니 매우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앞으로 이 책은 몇몇 연구자에게 절실하게 활용될 책”이라며 책의 가치를 아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런 아우의 충고를 받은 약전은 도형보다는 글로 표현한 책을 저술했다. 그 책은 1814년에 저술이 완료되었으니 올해로 책의 탄생 200주년을 맞았다.

1816년 정약전이 세상을 떠나자, <현산어보>라는 책이 다산의 손에 들어왔다. 정말로 기이하고 특별한 책으로, 3면이 바다로 싸여 바다의 물고기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조선 사람들에겐 매우 긴요한 책이었다. 그러나 바다 한가운데의 섬에서 저술한 책이어서 자료도 부족하고, 참고할 만한 책도 없어 아쉬움이 많았다.


▎정약전의 유배 생활을 그린 그림.
그래서 다산은 아끼던 제자 이청(李晴)으로 하여금 책을 보완하도록 요청했다. 오늘날 전하는 <현산어보>의 내용 중에서, ‘청안(晴案)’이라는 표시는 바로 이청이 자기의 견해로 책의 내용을 보완했음을 알게 해준다(현재 번역서에 이청의 견해를 정약전의 견해로 취급했음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흑산도로 나와 아우 기다린 정약전

1816년 음력 6월 6일, 아우 약용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던 정약전은 기다렸던 아우가 해배령의 취소로 찾아오지 못하자 눈을 감지도 못하고 운명하고 말았다.

흑산도는 육지에서 가까운 곳에 소흑산도(우이도)가 있고 그곳에서 더 큰 바다를 건너가야 대흑산도라는 오늘의 흑산도가 있다. 애초에 귀양살이는 소흑산도에서 시작했지만, 얼마 뒤 정약전은 대흑산도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나 약용이 유배가 풀리게 되었고, 풀리면 귀경할 때 형님을 만나러 섬으로 들어온다는 전갈이 왔다. 그래서 손암은 아우로 하여 두 개의 큰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다면서, 놓아주지 않던 대흑산도 사람들을 간곡히 달래서 소흑산도로 나와 아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파들의 드센 반발로 인해 해배 명령이 취소된 다산이 결국 형님을 뵈러 오지 못하자, 3년을 기다리던 끝에 약전은 끝내 아우를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형님의 부음을 들은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들 형제의 비통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6월 초엿샛날은 어지신 둘째형님(정약전)께서 세상을 떠나신 날이다. 슬프도다! 어지신 이께서 이처럼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원통한 그분의 죽음 앞에 나무나 돌멩이도 눈물을 흘릴 일인데 무슨 말을 더 하랴!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만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구나. 지금부터 학문을 연구하여 비록 얻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 상의라도 해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가 없다면 이미 죽은 목숨보다 못한 것이다. 네 어머니가 나를 제대로 알아주랴, 자식들이 이 아비를 제대로 알아주랴, 형제나 집안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랴, 나를 알아주는 분이 죽었으니 또한 슬프지 않겠느냐? 경서(經書)에 관한 240책의 내 저서를 새로 장정하여 책장 위에 보관해놓았는데 이제 그것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한 두 형제가 삶의 고달픔도 잊고 심도 깊게 고경(古經)에 대한 학문토론을 쉼 없이 계속했으며, 그 결과 얻어진 240여 권의 책이 완성되었으나, 이제는 함께 토론할 학문적 동지가 없으니, 책을 불태울 수밖에 없다는 아우의 형님 잃은 원통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내용이다. 편지는 계속 이어진다.


▎정약전이 지은 <현산어보>와 흑산도 고지도. 정약전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길 위대한 학술서적으로 꼽힌다.



아우가 쓴 형님의 전기 <묘지명>

“밤남정에서 헤어진 것이 이렇게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구나. 더더욱 슬프디 슬픈 일은 그 같은 큰 그릇, 큰 덕망, 심오한 학문과 정밀한 지식을 두루 갖춘 어른을 너희들이 알아 모시지 않은 점이다.…”라고 말하며, 큰 학자를 자질들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함을 한탄하고, 그런 큰 인물의 형님이 자신의 곁에 있지 못하고 영원히 떠나고 말았음을 애통하게 여겼다. 이 한 통의 편지에 정약전의 학문과 인품, 인격과 덕망의 대강은 기술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못다한 이야기는 정약전의 일대기인 <선 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이라는 글에서 본격적으로 기술하였다.

“오호라!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인 데다 겸하여 지기(知己)까지 되어준 것도 또 한 나라 안에서 한 사람이었다. 약용이 아무도 이해해주는 한 사람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며 모진 목숨으로 지금까지 7년이나 살았다.” 이 대목을 보면, 1816년 정약전 타계 뒤 7년째인 1822년 회갑 년을 맞은 정약용이 자신의 일대기인 <자찬묘지명> 2본을 짓고 이어서 중형인 약전의 일대기를 ‘묘지명’이라는 이름으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형님은 책을 편찬하거나 저술하는 데는 게을렀기 때문에 지은 책이 많지 않다. <논어란(論語難> 2권, <역간(易柬)>1권, <현산어보(玆山魚譜)> 2권, <송정사의(松政私議)> 1권이 있는데, 모두 귀양살던 바다 가운데서 지은 책이다”라고 했다. 부지런하고 재주 높던 자신은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그에 비하면 형님은 아주 초라한 양의 저술을 남겼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인 <현산어보>는 정약전의 이름을 영원히 전하게 한 위대한 학술서적이 되었다.

<묘지명>에는 게을러서 책이야 많이 남기지 않았으나, 귀양살던 외딴섬에서 정약전이 섬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존경을 받으며 살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약용이 해배되면 가는 길에 자신을 찾아오겠다는 소식을 듣고, 대흑산도에서 소흑산도로 옮겨 아우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하던 때의 일이다.

“‘내가 마땅히 우이도(소흑산도)에 나가서 기다려야지’ 하고는 우이도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흑산도 사람들 중에서 말깨나 하는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공을 붙들고 떠나지 못하게 하자, 공이 우이도 사람을 시켜서 야밤을 틈타 안개 낀 때에 돛대도 내리고 몰래 빠져나갔다. 안개가 걷히고 날이 밝자 흑산도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급히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까지 쫓아와 배를 빼앗아 돌아오니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없었다. 한 해가 넘도록 공이 섬사람들에게 약용과의 정리를 가지고 애걸하여 겨우 우이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얼마나 섬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존경을 받았으면, 그런 정약전의 딱한 사정에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았겠는가. 대단한 인품의 소유자였음을 그대로 증명해주는 내용이다.

“흑산이란 이름은 음침하고 두려운 어감”

이 책은 책이름 그대로 흑산(黑山)이라는 섬 이름을 어두침침하고 조금은 무서워 ‘흑산’이란 이름 대신 뜻이야 같지만 어감이 많이 다른 ‘현산(玆山)’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그 섬 연해의 수족(水族)을 취급한 어보(魚譜)이다. 그동안 ‘현산’을 ‘자산’으로 부른 것은 이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정약전 스스로 책의 이름이 ‘흑산어보’가 아니고 <현산어보>임을 애초에 밝혔다. 물론 다산도 정약전의 주장과 같이 ‘현산’으로 불렀음은 당연했다. 정약전은 “흑산이라는 이름은 음침하고 어두워 두려운 어감이어서 현산으로 바꿨다.”라고 했으니 현산이 옳은 발음임은 당연하다. 자(玆)는 ‘이것’이라 할 때는 ‘자’이지만, 검다고 할 때는 당연히 현(玄)의 발음이 나니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다.

총3권으로 구성된 <현산어보>는 1책의 아주 작은 책이다. 제1권은 인류(鱗類), 즉 비늘이 있는 물고기에 관한 부분이다. 제2권은 무인류(無鱗類), 즉 비늘이 없는 물고기의 종류에 대한 분류다. 거기에는 개류(介類)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껍질이 있는 물고기에 대한 부분이다. 제3권은 잡류(雜類)인데, 앞의 부류에 포함할 수 없는 기타 종류의 어족에 대한 설명이다.

인류 20항목, 무인류 19항목, 개류 12항목, 집류 4항목, 도합 55항목으로 분류하여 물고기를 분석해놓은 책이다. 지금의 생물학 수준에서는 아주 저급한 분석이지만, 당시 서양에서도 근대 과학적 동식물분류법이 확립되지 않은 때임을 감안하면, 정약전의 학문적 태도와 접근방법은 놀라운 수준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초인 1814년, 조선이라는 유교국가, 유교에서도 성리학(性理學)만을 존숭하여 모두가 관념론의 깊은 늪에 빠져있을 때, 형 정약전은 바다 가운데서 바다물고기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생물학 공부에 열중했다. 아우 정약용은 바닷가 강진의 산속인 ‘다산초당’에서 주자학(朱子學)의 성리학 체계를 해체, 새로운 실학사상을 가미한 ‘다산경학’을 이룩하여 사서육경(四書六經)에 관한 새로운 주해(注解)를 완성해냈다. 그러면서 정약용은 그런 새로운 경학이론을 토대로 세상을 건져낼 수 있는 경세학(經世學)의 대저인<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3대 저서를 완료하여 ‘다산학’이라는 경이로운 학문적 업적을 이룩했다. 그래서 그들은 탁월한 실학자가 되었다.

역시 형제는 지기였다. 서로를 제대로 알아주며, 서로의 외로움과 아픔을 달래주어 그만한 학문적 대업(大業)을 이룩하였으니, 우리 민족의 긍지이자 자랑이었다. 금전만능의 물신주의에 빠지고, 권력만능의 출세주의에 함몰한 오늘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학문다운 학문, 학자다운 학자가 많지 않은 오늘, 국가로부터 배척받은 두 유배인이 이룬 학문적 업적을 돌아보며, 금전과 권력이 학문 앞에 얼마나 왜소한 것인가를 현대인들이 깨달았으면 한다. <현산어보> 탄생 200주년, 정약전 선생을 기리고 또 현양하자.

201404호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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