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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 ‘제 2의 대우맨’ 육성 나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대우를 경제 망친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 말라”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사진 오상민 기자
■ 합당한 평가로 명예회복이 이뤄진다면 해외 브랜드 가치 보전과 활용에도 유리
■ GYBM같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사회에 기여하고 조금이라고 명예를 회복했으면
■ 앞으로 10~20년 유예기간 놓치면 대한민국은 굉장한 어려움에 처할 수도
■ 대기업 대신 업종 전문화된 중소·중견기업들이 경제의 중심이 될 것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남은 인생의 키워드를 ‘희생’과 ‘봉사’로 삼는다고 말했다.
“언론에 잘 써달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그저 내 진심을 말하는 거지….”


김우중 전 회장이 8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특별포럼’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우중과의 대화> 출판 후 첫 대중 연설이다. / 사진·뉴시스
78세의 백발이 성성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려던 기자의 귓전에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 내내 진지하고 친절하게 답을 주려고 노력한 그였지만 이렇게 마음속에 있는 말을 툭 던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날 인터뷰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당시의 대우그룹 해체라든가, 당시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같은 현안을 언급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가 생애 마지막 역작으로 추진하는 글로벌YBM(GYBMㆍGlobal Young Business Manager·글로벌 청년사업가) 육성사업에 국한된 얘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자고 했었다.

하지만, 어디 인터뷰가 그런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현실 세계에 대한 언급을 피해갈 수 없다. 그가 말한 진심은 한국의 기성 세대가 자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대우 해체에 관련된 얘기는 다 털고 미래세대 육성에 매진하겠다는 것 등등의 발언이었다.

지난 8월 출간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15년 전 대우그룹 해체 타당성에 관한 논쟁을 야기했다. 김 전 회장은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이 책에서 대우그룹 기획 해체 가능성을 제기했다. 심지어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는다”고도 말했다. 그가 세상을 향해 하고픈 주장은 지난 8월의 대화록에 다 망라됐다고 할 수 있다. 10월 15일 오전 서울 중구 퇴계로 대우재단빌딩 8층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서 만난 김 전 회장은 며칠 전부터 계속된 몸살감기로 대화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인터뷰는 서면 질의·답변에 대면 대담을 가미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10월 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상경대 각당헌에서 ‘자신만만하게 세계를 품자’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김우중 전 회장. / 사진·뉴시스
어제(14일) 예정돼 있던 지방 대학의 강연을 취소할 정도로 독감이 심하다고 들었다.

“어제 아침에 약을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콧물은 그쳤지만 기침은 한 번 터지면 대여섯 번씩 계속 된다. 불편해도 양해해달라.”

신장섭 교수와 함께 모교인 연세대에서 한 특강을 들었다. 나중에 눈시울이 붉어지던데, 어떤 기분이었나?

“학창시절에는 캠퍼스 안 백양로(정문에서 본관까지 이어지는 주(主)도로)가 참 좋았는데 이제 없어졌더라. 대신 건물도 늘어나면서 많이 발전했다. 1학년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송도국제캠퍼스 구상도 좋아 보였다. 졸업하고선 바빠 학교를 제대로 오지도 못했다. 오랜 세월 못 보던 옛 친구도 많이 왔다. 반갑고 뭉클하고 그랬다.”

전국 대학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고 있다. 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가?

“어느덧 나도 창업 1세대의 마지막 줄에 서게 됐다. 나라가 경제를 일으킬 때 동반자였고, 해외로 나가 세계를 누비며 시장을 개척하면서 다양한 협력을 체험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에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후배 세대인 대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세대의 경험을 전해주고 있다.”

대의 위해 제 멋을 포기하고 사는 삶

대학생들은 야망을 품고 있던가?

“일반적인 우려와 달리 밝고 건강한 생각들을 지니고 있었다. 부족한 내 강의도 잘 경청해주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도 많이 한다. 질문도 주로 그런 쪽으로 많이 해왔다. 우리 세대가 젊은이들에게 확고한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도록 이끌어준다면 그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성취의 길을 내달릴 수 있을 것 같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출간(1989년)하고 난 뒤 <김우중과 의 대화>가 나오기까지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첫 저서는 약 150만 부가 팔리는 등 독자의 반응이 뜨거웠다. 요즘 젊은이들의 기상과 야망을 그때와 비교한다면?

“25년 전 당시에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경제 성장률과 함께 그만큼 일자리 구하기도 쉬웠다. 또 ‘노력하면 된다’는 희망과 기대감도 있었다. 우리 세대도 경제발전의 중심 세대가 되어 후배 세대에게 자랑스러운 선진 한국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개발도상국인 한국의 마지막 세대가 될 테니 젊은이들은 선진한국의 첫 세대가 돼 달라’고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채근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선배 세대로서 이 점이 아쉽고 미안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의식 저변에 자리하는 그릇된 관념과 인식을 지적한다면 어떤 게 있을까?

“젊음, 청춘은 가능성 그 자체다. 그러나 가능성에 도취하기에 앞서 자기 철학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즘 한국의 교육이 지식을 전수하는 데는 능하지만 완성된 인격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서툴기만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세상에는 정보와 지식은 넘쳐난다. 하지만 스스로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 ‘판단은 내가 한다’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한 가지 더는 당장 자기의 이익과 안일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일을 위해 희생하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게 중요하다. 제 멋에 사는 것도 좋지만 대의를 위해 제 멋을 포기하고 사는 삶은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공전의 히트를 얻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당시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가고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라’고 다그쳤다. <김우중과의 대화>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청년들은 오히려 창업을 기피하고 대기업, 공기업 등 크고 안정된 직장에만 몰린다.

25년 동안 우리 청년들은 세상을 향한 도전에 인색했다고 말해야 할까?

“우선 국가 전반적인 경제활력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특히 제조업 분야가 IMF 한파 이후에 성장이 거의 멈춰 있다시피 하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게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릴 적부터 ‘취업난이다’, ‘고용불안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커왔다. 그 압박감으로 크고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창업 1세대라면 그로부터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창업 2세대, 3세대가 당연히 생겨났어야 하는 데, 아직 그런 용어가 귀에 생소하다.”

한국의 산업구조, 중소기업 중심으로 바뀐다

그래서 젊은 대학생들을 만나면 제 2의 창업세대가 되어달라고 당부하는 건가?

“앞으로 보다 많은 젊은이가 기업가정신을 가지고 창업의 꿈을 키워가면 좋겠다. 저는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나라에도 중소기업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대가 오면 모든 것을 하는 대기업보다 하나를 전문적으로 하는 중견기업들이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젊은이들에게 비전과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해 실질적으로 선배 세대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관심과 배려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10월 14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세계 지식포럼에서 “앞으로는 발명가가 곧 기업가가 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창의성을 경제 핵심 동력으로 해서 새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말이다. 공교롭게도 김 전 회장은 다음날인 15일 오후 같은 행사에서 연설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회장은 “인구와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에서 꿈을 펼칠 해외 청년사업가 양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오늘 오후에 세계지식포럼 연설이 예정돼 있다. 박 대통령이 어제 말한 ‘발명가가 기업가가 되는 세상’이 GYBM(글로벌청년사업가)과 맥을 같이하는 것 같다.

“나는 중소기업 시대의 도래를 얘기하고 싶다. 자동차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대기업이 모든 부품과 기술을 생산해내는 게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뒤를 받쳐주니까 자동차가 나오는 것이다. 알짜기술은 다 중소기업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금 그런 쪽으로 산업구조가 바뀌고 있다. 대기업은 그냥 설계를 하는 정도일 것이다. 또 중소기업은 돈을 벌면 딴 거 할 생각하지 않고 자기 분야를 깊이 판다. 그러니 기술수준이 점점 높아진다.”

전국 대학생·대학원생 3명을 선발,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의 경영현장을 함께 둘러보는 ‘세계경영 아이디어 공모전’이 진행 중이다. 김 전 회장이 이들의 해외 멘토링을 진행한다는데.

“올 연말까지 대학생들 중에서 제2의 창업세대를 꿈꾸는 학생을 선발한다. 내가 직접 해외에 데리고 나가 현장을 보여주고 경험을 전수해주는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베트남에서 진행해온 글로벌 YBM 현장에도 데려가 학생들과 교류하고, 미얀마·인도네시아 등 요즘 내가 주목하는 동남아를 중심으로 사람도 만나고 주요 사업현장도 방문한다”

김 전 회장도 과거에 장기 해외 출장길에 자주 접하기 힘든 여러분야 전문가와 동행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로 학자가 많았다. 김용옥 교수, 소설가 이문열 씨, 심지어는 진보인사인 장기표 씨도 모시고 출장을 다녔다.”

GYBM 사업은 어떤 일을 하나?

“2011년부터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가동하는 해외 취업 및 창업 교육 프로그램이다. 1년 동안 합숙으로 진행되는 교육 기간 중 모든 비용을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서 지원한다.”

그게 한국 청년실업 해소와 경제발전에 주는 시사점은?

“대학 졸업자는 매년 쏟아져 나오는데 국내의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어 청년실업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적극 해외로 나갈 필요가 있다. 신흥시장은 성장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그런 나라에 가면 기회가 많다. 우리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데 만약 우리가 모두 국내에서 활동한다면 서로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상대와 경쟁해야 한다는 얘기와도 같다. 이런 힘든 경쟁을 하지 말고 해외로 가면 더 많은 발전 기회를 얻을 수가 있다.”

어디를 권하고 싶나?

“경제적 측면에서는 동남아로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제대로 된 인력, 특히 우수한 젊은 인재 확보는 사업의 승패와 직결되는 문제다. 현지에서 승부를 보려는 젊은이가 많으면 아무래도 연관된 기업들에 큰 활력소가 되지 않겠나?”

GYBM 같은 사업은 청년 취업과 실업률 해소, 국가경쟁력 강화에 부심하는 정부가 권장하고 지원해야 하는 사업 아닌가?

“지난해부터 산업인력공단에서 하는 청년층 해외취업 지원사업 수행기관 모집에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사단법인의 자격으로 참여한다. 일부 자금을 지원받는다. 인원을 계속 키워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참 좋고 의미 있는 사업’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한다고 들었다. 최근에는 사회지도층에서도 베트남 연수생들에게 조언과 격려를 해주겠다는 사람이 늘어난다.”

이에 참여하자면 어떤 성향과 기질의 소유자가 바람직한가?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일을 배우는 성실함도 필요하지만, 언어·음식·기후·문화 모든 면이 새롭기에 도전을 해야 한다. 우리 청년들은 매우 우수하다. 해외 지향적인 기질과 해보겠다는 자세만 돼있으면 큰 어려움은 없다.”

김용완 회장 때의 전경련이 가장 좋았다


9월 21일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서 극기훈련을 마치고 사진촬영에 나선 YBM 4기 회원들. 김 전 회장은 YBM 사업에 많은 독지가가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신흥국 진출의 ‘50대 50(번 돈의 반만 회사 이익으로 남기고 나머지 반은 현지에 환원)’의 원칙이 경영철학의 한 핵심이다. 대우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성공한 중요한 동력이기도 하다. YBM 청년들에게도 이 원칙을 권유하는가?

“사업을 하는 데 있어 상대를 배려하고 이익을 나누는 게 처음에 돈을 적게 버는 것처럼 보여도 함께 사업을 키워나가다 보면 나중에 돈을 더 크게 버는 방법이 된다. 우리 연수생들에게도 그런 이치를 전해주고 있다. 사업은 신뢰가 중요하다. 혼자서 다 취하려고 하지 말고 같이 노력해서 같이 나누고, 그 관계로 평생을 가자는 마음가짐이 요구된다.”

GYBM사업에 드는 예산은 어떻게 충당하나?

“1인당 2천만 원 정도의 돈이 든다. 전액을 우리가 부담한다. 100명 정도만 해도 20억 원이 필요하다. 산업인력공단에서 60명에 대해 800만 원씩 지원을 해주기로 돼 있다. 나머지는 대우 임직원 출신들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통해 크고 작은 돈을 모아 진행한다. 개인 회비에다 사업을 하는 이들이 좀 크게 지원을 하는 것들이 합쳐지는 것이다. 일부 사람은 무보수로 강의도 해주고, 연수생들에게 멘토가 되어준다. 고마운 일은 요즘 들어 연수생들을 직접 데려다 쓴 기업들이 크고 작은 돈을 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현장서 구하기 힘든 인재들을 키워 보내줘서 고맙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큰 힘이 된다.”

GYBM 일과표를 보면 오전 5시30분 기상 및 점호, 오전 8시 교육 시작, 오후 5시 저녁식사, 오후 6~8시 자율학습, 오후 10시 취침 등으로 짜여 있다. 마치 군대 내무반 생활을 연상케 한다.

“군대는 국가를 위해 의무적으로 다녀오는 것이고 GYBM은 본인의 꿈을 이루는 준비를 하는 곳이다. 인생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교육을 받을 때 혹독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를 이길 수 있다. 선진국에서의 행복과 우리나라의 행복은 다르다.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하던 모든 습관을 버리고, 현지여건에 맞춰서 생각하면 다 된다. 철저히 현지화해서 생각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공동체 생활하면서 좋은 습관이 만들어지고, 졸업 후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더 잘 극복할 수 있다.”

GYBM 졸업생, 재학생 모두 멘토-멘티 관계로 관리하는 것으로 안다. 김 전 회장의 멘토는 누구인가?

“해마다 명절이면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김용완 경방그룹 회장,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께 세배를 다녔다. 그분들을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격려를 해주시면 큰 위안으로 삼았다. 나는 어릴 적 선친이 납북됐고, 서른의 나이에 대우를 창업하고 열심히 일할 때 우리나라 재계의 대표적 창업자들은 모두 제 아버지 세대였다. 그분들을 존중했기에 가급적 재계 선배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해보려고 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수출과 금융을 중심으로 회사를 키우게 됐다. 우리가 선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로 도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떻게 연결이 됐나?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선친인 홍진기 전 법무장관과 인연이 많았다. 한번은 찾아 뵀더니 이병철 회장에게 인사를 시켜주셨다. 이병철 회장은 재계의 선배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경방의 김용완 회장도 훌륭한 분으로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 전경련을 돌이켜보면 김용완 회장 그분이 할 때가 가장 좋았다.”

궁극적으로 베트남·인도네시아·태국·필리핀·미얀마에도 GYBM 과정을 만든다고 들었다.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신흥국의 세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도뿐만 아니라 동남아 국가들도 계속 성장한다. 전 세계의 경제 흐름으로 본다면 아세안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가능성도 눈여겨보고 있다. 그런 상황이 되고 나서 시작하려고 들면 늦다. 미국·일본·유럽·중국 등 강대국들이 먼저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우리가 선점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사람’을 키워서 우리와의 교류와 협력의 폭을 더 넓히도록 해나가야 한다.”

그때쯤이면 YBM의 규모가 총 2500명에 이르게 되고, 25년 뒤에는 100만 명의 성공사례를 만든다고 말했는데.

“지금의 노력으로도 10년 내에 2천~3천 명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조금 더 힘이 보태면 5천~1만 명이 되고, 초창기 멤버들이 현지에서 창업을 하기 시작하면 그 규모는 훨씬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20~30년 뒤에 100만 명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세안 국가에 ‘한상’ 같은 국제 네트워크를 키울 수도 있다.”

베트남 현지 정부와 기업의 반응은?

“많은 관심을 갖고 도와주는 편이다. 9월 말의 YBM 3기 수료식에는 베트남 교육부 차관이 외빈으로 참석했다. 뜻밖이었다. 그에 더해 하노이 문화대학교에서 성대한 축하 파티도 열어 줬다.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언어를 익힌 한국 젊은이들이 현지의 한국 기업에 취업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업 문화가 현지화 되면 생산성이 높아지고, 소득이 증가하며, 경제발전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대우는 사훈이 창조·도전·희생이다. 영리를 꾀하는 기업의 경영 철학으로 희생을 앞세운 배경은?

“개인 경험 때문이다. 나는 전쟁 당시 피란가서 굶기를 밥 먹듯 했다. 밥 한 그릇을 놓고서도 서로 먹었다며 양보하던 시절이다. 그 정도로 서로를 위하고 스스로가 희생하면서 가족이 뭉치던 때였다. 나는 정규 대학을 나온 첫 세대로 내가 희생 하더라도 나라가 잘돼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다. 우리 또래들은 다 그랬다. 게다가 내가 처음부터 사업가가 되려던 것도 아니었다. 대학 4년 동안 장학금을 대준 한성실업에서 나를 필요로 해서 일하다 보니 그 길로 간 것이다. 기업을 하면서도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일하다 보니 돈이 벌렸다. 지금도 우리 세대가 희생해야 다음 세대가 편하다고 믿는다.”

정체된 현(現) 상황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김우중 전 회장은 젊은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기 철학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은 아직도 선진국 진입 문턱에 서 있다. 뭘 해야 할까?

“앞으로 한 10년 정도를 놓치면 우리나라가 굉장히 어려워질 것 같다. 앞으로 10년이 참 중요한데…, 나이든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데 동의를 하고, 새롭게 다시 한 번 나라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다는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어렵다. (현 상황에 대해서는)기성세대가 50% 이상 책임이 있다.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아랫사람들이 따라 온다. 그래야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

왜 10년인가?

“지금부터 10년은 열심히 해야 우리나라의 틀이 제대로 잡힌다는 뜻이다. 빠르면 10년이고 어쩌면 한 20년이 바라보고 가야 한다. 누군가가 모범을 보이면 따라오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래야 사회가 바뀌고 희망이 보인다. 우리가 공을 들이는 GYBM도 그런 같은 맥락이다. 젊은이들이 과감하게 창업에 도전하는 그런 나라가 돼야 한다.”

50~60세 은퇴세대에게 세계로 나가라고 했다. ‘나는 늦은 게 아닌가’라고 좌절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주겠나?

“나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스스로를 ‘아직 젊다’고 ‘청춘’이라 여겼다. 지금은 건강이 좋아져서 70세 이후까지 아무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50 ~60대 장년층도 정부에만 의존하지 말라. 국내에서도 기대수준을 낮춰 오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해외로도 눈을 돌려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해외생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개발도상국에서 연봉 5만 달러에 할 일이 많다. 개발연대를 경험한 한국의 장년층은 해외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안다. 마케팅, 생산관리, 제품개발, 회계관리 등 자기 분야에서 30년 이상 일한 사람이라면 베트남 같은 신흥국가 기업에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한다. 중역이나 간부로 일할 수 있다면 제2의 인생이 열리는 것이다. 경험은 10년만 쓰지 않으면 다 없어진다.”

한때 절에 들어가려고도 했다


10월 1일 경기도 용인 소재 대우글로벌인재양성센터에서 열린 YBM 4기 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발언을 하는 김우중 전 회장. /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우중과의 대화>를 보면 “카지노에 빠지는 친구들이 당연히 돈은 날리지만 그런 사람들이 일을 벌일 줄 안다”고 했다. 어떤 유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도박만 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얘기가 아니다. 무언가에 미쳐서 도전하는 사람이면 절실히 원하는 일이나 도전할 만한 프로젝트가 있으면 모든 걸 바쳐 일을 잘 하더라는 말이다. 대우의 인재들을 본 결과론적인 얘기다. 무엇을 하든지 빠져서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고 하나를 잘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도 잘한다. 예전에 대우에서 운동권 출신 학생들을 적극 채용했다. 전 세계를 다니며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금새 몰입하고 정말 일도 잘했다.”

국제사회에서 인지도가 높은 ‘대우’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활용하자면 어떤 정책적 조치와 노력이 필요할까?

“지금도 ‘대우’의 브랜드가 강한 국가는 대체로 신흥국이다. ‘대우’가 진출할 당시 신흥국 지도자들을 만나 ‘당신 나라에 한국을 건설시켜주겠다’고 얘기하며 큰 사업을 따냈다. 신흥국은 아직 민간부문 개발이 더뎌 정부를 상대해야 하고, 그 나라 경제발전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면서 과실을 함께 나눠야 한다. 정치와 경제, 기업이 오케스트라와 같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지금은 ‘대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조선해양, 건설, 무역, 금융, 상용차가 각기 독립된 회사로 존재한다.

새 주인이 알아서 할 일인데 여기서 얘기한다는 건 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다만, 더 이상 대우를 ‘경제를 망친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일을 안 했으면 한다. 이런 일들이 대외적으로 자주 언급이 되고 역사에 정사(正史)로 남아 있는 한 ‘대우’의 브랜드 가치는 점점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대우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내려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면 해외에서의 브랜드 가치 보전과 활용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김우중과의 대화>를 읽어보면 인간과 경영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 엄청난 사건과 편견에 둘러싸인 김 전 회장은 어떻게 인간과 경영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유지할 수 있었나?

“처음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밥도 먹지 못하고 한때는 절에 들어가려고도 했었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다. 소유에 연연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나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지금이나 똑같다. 대신 나는 성취욕이 남달랐던 것 같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내가 하는 일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그 힘으로 앞만 보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어떤 문제로 고심하며 밤을 하얗게 새운 적이 있나?

“나는 뭐 바쁘게 살아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잠은 모자라서 난리지. 그리고 고민한다고 안 되는 게 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룬 적은 없었다.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게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인생이다. 그건 또 현실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고치면 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전경련회장으로 관료의 의견을 맞받아칠 때 나이가 62세였다. <김우중과의 대화>에서는 이때 나이를 ‘젊을 때’라고 했다. 김 전 회장에게 젊은이와 늙은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몰입해서 그것만 바라보면 시간이 멈춘다고들 한다. 열심히 살다 보면 시간을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20대, 30대의 시기를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그 이후까지 계속 이어가다보니 시간이 흐른 것을 잊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젊다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다. 나이가 드나 젊으나 꿈이 있고 열심히 하면 청춘인 것이지. 하지만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나이이기도 하다. 마음으로는 전보다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김 전회장은 “나에게는 더 큰 꿈이 따로 있다. 존경받는 기업인으로서 김우중이라는 이름이 기억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꿈”이라고 썼다. 4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꿈이 궁금했다. 그는 “성공한 기업인이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돈을 번 다음에 명예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저는 명예를 존중했습니다. 그런데 명예란 게 아흔아홉 번을 가졌어도 한 번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더군요. 꿈이라면… 제가 나이가 있는데 ‘꿈’이라기보다는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군요.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그게 국가와 사회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명예’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젠 ‘봉사’로 꿈과 명예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김우중, 김광석 그리고 방천시장


대우그룹 해체 전인 1997년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는 창문조명을 이용해 설치한 ‘레간자’ 신차 광고가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 사진·중앙포토
해외 사업을 하자면 현지에 정말 친한 사람은 한 사람씩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을 볼 때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나?

“내가 상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보다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방점을 찍는다. 비즈니스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 신뢰다. 접해보면 다 알게 된다. 거짓없이 진실된 모습으로 대하는지 아닌지를. ‘상대의 이익을 내 이익만큼 존중해주는 것’ 그것이 오래토록 신뢰를 쌓아가는 방법이다.”

6·25 전쟁 당시 대구로 피란가서 14세 소년가장이 됐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방천시장 신문배달 시장을 석권했다는데…. 대구는 김 전 회장의 출생지이도 하다. 대구에 대한 기억은?

“선친께서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있을 때 나와 낚시를 다니고 자전거도 태워주셨다. 대구는 가족과 행복하고 단란하게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피란 시절 아버지가 납북되고 형들은 다 군대 가고, 가장 힘들게 소년 가장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처음 사회를 경험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된 시기다. 그래서 대구는 각별한 추억이 마음에 서려 있다.”

선친은 어떤 분이셨나?

“사범학교 교편을 잡았지만 직접 가르치진 않았던 것 같다. 전공은 독일어와 철학이었고…. (대구사범에서 선친에게서 배운) 박정희 대통령과는 종종 만났는데 그런(아버지) 얘기를 안 해줬고, 아버님도 돌아가셨으니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직접 만나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박 대통령도 사실은 희생적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행정이고 뭐고 간에 자기희생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왔다고. 그런데 사람이 사람이니까 실수도 있고. 또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는 다 되는 게 아니니까…. 박 대통령은 사실 이게 나라가 잘 되는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지 자기가 권한을 잡겠다던가 그런(욕심 같은) 건 아니었다고 본다. 물러난 뒤에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거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 아무래도 가장 역사에 남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절한 가수 김광석도 어릴 적 방천시장에서 뛰어 놀았다. 김광석은 방천시장의 아이콘이다. 방천시장과 김 전 회장이 오버랩된다. 김광석의 노래를 즐겨 듣는지?

“노래를 들어본 적은 아직 없지만 김광석에 대해서는 들었다. 히든싱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김광석이라는 가수가 방천시장의 아이콘이 되었다고 누군가 얘기하던 걸 봤다. 사람이 지역의 상징성을 가지는 것은 좋은 현상인 것 같다. 내게도 익숙한 방천시장이 김광석의 방천시장이라 불린다고 하니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기회가 되면 노래를 들어보겠다.”

김 전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서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봉사하는 것이지 내가 잘 해서 뭘 챙길 생각은 없다”라고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대우 해체와 관련한 사연들도 다 털고 미래로 가느냐는 질문에 그는 “(말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지. 그러나 그 사람들 (대우 해체에 관계한 사람들)이 더 잘 알 텐데 내가 뭐…”라고 말을 아꼈다.

201411호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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