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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 초저금리시대의 이상 열풍 - 어디 더 큰 금고(金庫) 없소? 

‘차명거래금지법’ 시행 이후 금테크 늘고, 예금인출 늘면서 수요 폭발?… 탈세 위한 지하자금 늘어난다는 지적 일어 

우설아 월간중앙 인턴기자

▎저금리 시대가 지속되면서 금융권에서는 5만원권이 품귀현상을 빚는다. 일부 부유층에서는 골드바와 5만원권을 보관할 수 있는 개인 금고를 보유하는 가정이 늘어간다.
"출금을 하려고 농협에 갔더니 5만원권 지폐가 부족하다고 그냥 만원짜리 뽑아 가래요.” 인천에 사는 직장인 김모(32·여) 씨는 며칠 전 장례식 부의금으로 쓰려고 은행에 5만원 권 지폐를 구하러 갔다가 헛걸음을 했다. 마침 자동현금인출기(ATM)에는 ‘한국은행의 5만원권 배정 축소로 인해 지급을 제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김씨는 “5만원권은 경조사나 명절에 용돈 등으로 쓰는 것 말고는 딱히 쓸 일이 없는데 왜 이렇게 부족한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아마도 사라진 5만원권 지폐는 부잣집 금고에 다 들어갔나 보다”라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런 김씨의 넋두리가 허튼소리는 아닌 듯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만원권 회수율이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5만원권 발행 첫해인 2009년 7.3%에서 이듬해 41.4%, 2011년 59.7%, 2012년 61.7%로 회수율이 늘어가다가 2013년에 48.6%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2014년엔 8월까지 회수율이 22.7%에 그쳐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시중에 풀린 5만원권 규모는 46조171억원(2014년 7월 기준)으로 전체 화폐 잔액(68조387억원)의 67.6%를 차지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액권 지폐가 어딘가에 묻혀 잠자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들 행방불명된 5만원권 지폐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TV홈쇼핑 방송 한 번에 700개 ‘완판’


▎1 과거에는 천편일률적으로 우중충한 색깔의 철제 금고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화려하고 똑똑한 기능을 갖춘 금고가 다수 쏟아져 나온다. 일부 백화점에서는 유명화가의 그림과 스와로브스키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금고까지 등장했다. 2 화려한 크리스털로 장식한 터치스크린 방식의 고급형 인테리어 금고. 최근 출시되는 금고들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 연결돼 그때그때 상황을 알려주는 신개념 디지털 방식을 도입한 것들이 많다.
“개인금고를 찾는 손님이 올 들어 크게 늘었어요.” 서울 종로 3가역 주변에서 금고를 판매하는 J매장 관계자가 말했다. 주로 평창동과 삼성동 등 서울시내 부촌 거주자들이 주 고객층이다. 그는 “더러 허름한 행색으로 찾아오는 이들도 있는데 막상 배달을 가보면 으리으리한 집인 경우가 많다”며 “아마도 남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일부러 꾸미지 않고 찾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금고구입 열풍은 유행과 소비자의 구매 트렌드에 민감한 TV홈쇼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 6월 중순, 한 TV홈쇼핑 채널에서 가정용 개인금고 방송을 내보냈는데 방송 시작 몇 분 만에 250대 ‘완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해당 TV홈쇼핑 관계자는 “판매된 금고상품은 47만원 짜리로 화려한 색깔과 장식이 들어가 있어 인테리어 가구로도 손색 없어 고객들의 호응을 얻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금고 수요가 급증하자 제작업체들은 물량을 대느라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금고제조업체인 선일금고는 2009년부터 연평균 매출이 매년 50%씩 늘어났다. 2014년에만 1만 대의 금고가 팔려나갔다. TV홈쇼핑에서 한 번 방송에 700대가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회사 관계자는 1973년 회사가 설립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온라인쇼핑몰에서도 금고 판매량이 꾸준히 늘고 있다. 온라인쇼핑몰 11번가에 따르면 개인금고 판매량은 2011년 월평균 780대에서 2012년 950대, 2013년에는 1100대로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2014년에는 1월에 1150대, 10월에 1700대로 판매량이 더 늘었다. G마켓도 사정이 비슷해 지난 10월 금고 판매량이 1월보다 31%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2013년 롯데백화점의 개인금고 판매량도 상반기 114%, 하반기 93% 늘어나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2014년 상반기에도 52% 판매 증가율을 기록했다. 최고 500만원에 달하는 고가임에도 가구 겸용으로 화려한 장식을 한 금고가 더 잘 팔린다고 한다.

고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금고 디자인도 다양해졌다. 과거에는 철제로 된 육중하고 투박한 외양에다 색상도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색이 대부분이었다. 금고가 놓이는 장소도 안방이나 거실보다는 서재 구석 등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금고는 튼튼하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풍경이 이제는 옛말이 된 듯하다. 금고를 집에 들인 지 1년이 되어가는 사업가 홍모(56) 씨는 금고를 보란 듯이 거실에 두고 쓴다. 어른 허리춤에 조금 못 미치는 크기로 외양도 화려한 모습이어서 언뜻 봐선 금고라는 사실조차 알아채기 어렵다. 외부 손님들도 거실에서 한참을 머물러도 그것이 금고인 줄 모르는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홍씨는 “디자인이 화려해서 소형 냉장고나 가전제품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며 “도둑이 들어도 금고인 줄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이들 가정용 금고의 고객이 주로 여성들이라고 말한다. 가부장제가 사라지면서 가정의 경제권을 여성이 갖게 되는 경향과 맞물려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기리에 팔리는 금고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색상과 디자인을 입힌 것이 대종을 이룬다. 그중에는 클림트나 고흐 같은 유명화가의 그림을 입히거나 집안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디자인을 넣는 주문제작 금고도 많다고 한다. 선일금고 권영석 과장은 “냉장고 등 주방가전이나 가구에 쓰이는 광택 있는 하이그로시를 겉에 입히거나 꽃무늬와 감각적인 패턴을 넣은 것들도 인기를 끈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재산 보관용이라기보다 예쁜가구를 장만한다는 생각으로 금고를 선택하는 고객이 늘어난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금고의 기본성능은 뭐니뭐니해도 보안성에 있다. 영화에 나오듯 청진기를 대고 다이얼을 돌려 금고를 여는 수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금고는 정보통신 (IT) 기술에 힘입어 첨단기기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맞벌이가구가 43%에 달하는 시대에 금고는 빈 집을 지키는 역할까지 도맡아 한다. 인터넷과 연결된 스마트금고는 자체의 물리적인 잠금장치 외에도 전자식 보안 시스템을 갖춰 보안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동감지 센서, 충격 센서, 개폐 확인 센서 등을 장착한 것은 물론 무선통신 기능을 통해 이상이 감지되면 즉시 주인에게 알려준다. 금고에 동작감지 센서와 카메라를 장착해 집안에서 움직임을 감지하면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 상황을 알리는 기능도 있다. 금고문이 열리거나 닫힐 때 미리 입력해놓은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전송하는 기능도 있다. 이 밖에 터치스크린과 지문인식 스캐너가 결합된 디지털 도어록을 장착한 금고도 인기가 높다. 그래도 금고를 열 수 있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금고가 알아서 경찰이나 보안업체에 연락을 해주니 말이다.

스마트 모바일 기기에 익숙한 젊은 고객을 위해 금고를 휴대전화나 웹으로 원격 조종할 수 있게 하거나 모바일 인증 시스템을 갖춘 금고도 등장했다. 이와 더불어 각종 의약류의 보관·관리가 가능하도록 내부 슬라이딩 서랍을 스테인리스 재질을 사용해 약품 보관고를 설치하거나, 중요 정보 및 기록 자료를 분실하거나 소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데이터 보관고 등이 따로 설치된 특화된 제품이 등장해 시장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탈세’ 도구로 이용된다?

하지만 유례없는 금고 시장의 활황을 반가운 소식으로만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우리 사회에 탈세와 부정상속 등 지하자본이 더 은밀하게 확대되는 반증으로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은행 여신이자 2%의 저금리 시대가 낳은 불편한 진실이다. 세금과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은행에 자산을 예치하는 것이 오히려 손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부자들 사이에 금고를 장만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욱이 지난 11월에는 20년 만에 금융실명제 개정안이 시행돼 더 이상 차명금융거래를 할 수 없게 됐다. 강화된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자 은행에서 고액 예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나은행은 10억원 이상 돈을 맡긴 고액 예금자의 예금 총액이 2014년 4월 말 7조6천억원에서 10월 말 7조원으로 줄어들었다. 우리은행도 같은 기간 4조7천억원에서 4조2천억원으로 줄었다.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10개 은행의 잔액 1억원 이상 개인 계좌에서 인출된 돈은 무려 484조5천여 억원으로 2013년 같은 기간보다 89조원이 늘어났다. 반면 1㎏당 5천만원인 골드바 판매량은 지난해 1월 68㎏에서 10월 132㎏으로 훌쩍 뛰었다. 실버바 판매량도 늘어나 지난해 4월 470㎏에서 10월에는 980㎏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이 많은 현찰과 현물 자산이 안방의 금고 속으로 꼭꼭 숨어들었을 거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를 들어 25억원을 보유한 자산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40%의 증여세를 내야 한다. 그러나 이를 현물화해 금고째 물려준다면 과세당국이 탈세 혐의를 포착해 세무조사를 하지 않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다. 최근의 금융 환경이 금고의 소비를 부추긴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 시중은행의 프라이빗뱅커(PB)는 “본인 계좌에 돈을 넣어두자니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되고, 자식 계좌에 분산 예치하려니 불법 차명거래에다 증여세 문제까지 걸리니 아예 뭉칫돈을 빼가는 자산가가 늘어났다”고 전했다. PB들은 이렇게 빠져나간 돈의 상당액이 개인 금고로 들어갔을 것으로 본다. 과거의 부동산과 주식시장처럼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투자처를 찾기가 쉽지 않고, 차명거래금지법에 따른 골치아픈 법적인 문제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장롱 속에 보관하겠다는 자산가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추정이 상상에 그치지 않는다. 호화 주택에 살면서 거액의 세금을 내지 않고 버티던 부도덕한 자산가의 금고에서 거액의 뭉칫돈과 금품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시에만 이런 고액 체납자가 200명 가까이 된다.

지난 10월 21일 서울시가 38세금징수과 3개 조, 17명을 투입해 도곡동·대치동·한남동 등 부자동네에 사는 고액 체납자들의 아파트를 수색했다. 이 중 2억8700만원을 체납 중인 박모(55) 씨의 집에 있던 금고를 열자 1㎏ 골드바 3개와 4억원 어치의 현금과 수표, 5억원 어치의 주식이 쏟아져 나왔다. 박씨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체납한 지방세는 총 2억 8700만원. 그는 세금 추징을 피하기 위해 85평짜리 아파트를 배우자 명의로 돌리고 금고에 거액의 재산을 숨겨놓고 있었다. 이처럼 금고가 탈세를 위한 재산 은닉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는 일부에서만 드러날 뿐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서울시 관계자는 “1천만원 이상 지방세 체납자의 절반이 강남 3구에 몰려 있다”며 “대부분 재산을 현물로 보관하면서 금융당국의 추적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서울시가 지방세 3천만원 이상 고액·상습 체납자 6979명의 명단을 2014년 12월 15일 공개했다. 2014년 처음 명단에 오른 체납자는 1482명이다. 2013년에 이어 올해도 체납한 사람은 5497명으로, 2013년 공개 대상자(6139명)의 89.5%에 달한다. 이들의 은닉재산 규모는 총 1조1664억원에 이른다. 체납 기간이 2년에서 1년으로 단축되면서 신규 공개 대상자가 대폭 늘었다고 시는 설명했다.

일본의 ‘경고’ 귀 기울여야


▎‘실질금리 마이너스시대’가 현실화되면서 개인금고 시장이 활황을 맞는다. 서울 중구 을지로 4가 한 금고 판매점에서 관계자가 금고의 새로운 기능들을 소개하고 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역을 덮친 지진과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가정용 금고 수백 개가 수거됐다. 한달 뒤 이와테현의 한 경찰서 주차장에는 찌그러진 수백 개의 금고가 쌓여 있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가정용 금고 판매 붐이 일었다.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래서 최근의 금고 판매량 증가를 한국경제의 장기 침체의 시그널로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최근 들어 우리 경제가 일본식 장기침체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는 전망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일본은 1999년부터 지속된 초저금리정책과 금융 규제완화에 따라 자산을 은행에 저축하기보다 개인이 직접 자금을 운용하는 시대를 맞았다. 일본 내에서 금고에 현찰을 보관하는 ‘장롱예금’이 크게 늘어난 것도 이와 때를 같이한다.

지금의 우리 경제 상황과 금고 구입 열풍은 20년 전 일본의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한국 경제가 과거 일본의 장기 침체를 따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제전문가가 80%를 넘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나왔다.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잃어버린 20년’을 보내야 했던 일본의 전철을 우리가 답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본 정부가 뒤늦게 세금을 낮추고 저소득층에 상품권을 지급하는 등 내수 진작에 나섰지만 장기 불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본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금고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현금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금고가 많이 팔릴수록 나라 경제는 어려워진다.

201501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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