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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인터뷰 | 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 - “규제개혁과 사교육비 혁명에 한국경제 사활 걸려” 

내수와 수출 황금비율 균형점 찾고, 다자간 자유무역협정 가입 등 제2의 FTA 시대에 과감하게 진입해야 

한기홍 월간중앙 기자 사진 오상민 기자

▎한덕수 회장은 “중국이 아직 많은 국가와 FTA 체결을 하지 못한 만큼 우리로서는 하나의 큰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한덕수 무역협회 회장은 전형적인 수재다.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할 때는 단과대(상대) 수석을 차지해 대법원장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동창인 정운찬 서울대 명예교수, 정문수 인하대 교수와 절친하다. 노성태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고문과 이정우 경북대 교수와는 서울대-하버드대 동문이다.

상공부 산업정책국장,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통상산업담당 경제비서관, 특허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등을 거쳐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3월부터 2006년 7월까지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2007년 4월~2008년 2월까지는 국무총리, 2009년부터 약 3년 간은 주미대사를 맡기도 했다. 2012년 3월 무역협회 회장에 취임하며 진보, 보수 4대 정권을 관통해 중용되는 저력을 보였다. 사회적 저항이 치열했던 한·미 FTA는 한 회장이 밑그림을 그렸다. 당시는 매우 힘들었지만 한·미 FTA 체결은 한 회장의 강한 자부심의 원천이다. 2014년 12월 30일 오후 서울 삼성동 무역회관 그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2시간여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침체에 빠진 경제 이슈, 분발이 요구되는 무역 현안을 집중적으로 물었다.

커리어를 보면 진보, 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고 중용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박근혜 정부 때까지 청와대 경제비서관, 재정재정부 장관, 국무총리, 주미대사, 무역협회장을 역임했습니다. 하나같이 요직입니다. ‘관운이 좋다’는 평가도 있고, ‘처신과 사고에 균형을 갖췄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노선과 지향이 다른 역대 정부에서 잇따라 중용된 이유를 개인적으로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보수와 진보정책을 양분해서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특정 시기에 꼭 필요한 정책이 있는데 그걸 분류하다 보면 보수정책, 진보정책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세금을 깎아주는 정부고 진보는 세금을 더 걷어서 복지를 늘려주는 정부라고 분류하죠. 사실은 진보가 세금을 매겨도 무한정 매길 수는 없습니다. 국민의 담세 능력을 판단해야 하니까요. 보수의 세금감면도 마찬가지죠. 무조건 깎아줄 수는 없습니다. 재정의 건전성, 지속가능성 같은 가치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진보니까, 또는 보수니까 이런저런 정책을 펴야겠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거죠. 경제부총리 할 때 국회에서 여러번 답변한 적도 있는데, 구체적인 정책을 보수다, 진보다 미리 선험적으로 구분해버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때그때 시기에 따라 정책의 적합성이 있겠죠? 그 정책의 적합성을 나름 객관적으로 추구해온 것이 역대 정부에서 고루 기용된 배경이 아닌가 추정해봅니다.

“글쎄요. 그거 때문에 기용된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냥 주어진 자세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제 좌우명이라 할까, 하는 것이 ‘필사즉생’입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하면 반드시 그건 올바른 결과를 가져온다…. 오히려 일을 피하고 그러면 그 덫에 자기가 걸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지나고 보니 그런 태도를 견지한 것에 대하여 일정한 평가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프로필을 보니까 경력이 40개가 넘더군요. 행정고시 합격한 해가 1970년대 초반인데, 합격 후 바로 관직에 부임한 건가요?

“4학년 5월에 시험에 합격했고 12월 5일에 관세청으로 발령 받았죠. 1등은 경제기획원으로 갔고, 2등부터 5등까지가 관세청이었어요. 제가 2등을 했거든요.”

서울상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이 언론사 프로필에 나와 있더군요. 명문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공무원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대학 동기들은 대개 은행이나 기업으로 많이 갔죠. 1971년 졸업했는데, 그때 우리 연간 수출액이 30억 달러쯤 될 때였어요. 1인당 소득이 300달러 정도 됐고요. 67학번으로 서울 상대에 박희범 교수가 경제발전론 수업을 하셨는데, 이분이 후진국이 발전하려면 우수한 공무원이 많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죠. 안락한 생활만 탐하지 말고, 국가공무원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보라는 박 교수의 권유에도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그래서 3급 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을 봤죠. 지금으로 치면 5급이고, 그때 급수로는 3급을입니다. 그게 나중에 행정고시로 바뀐 겁니다.”

최고의 수출환경 만들었던 시대


▎2012년 12월 5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 등이 서울 강남구 삼성역 G20 광장에서 무역 1조 달러 조형물을 제막하고 있다
1971년이면 10월 유신 바로 직전이었군요? 10월 유신 캐치프레이즈에 ‘100억 달러 수출’이라는 게 있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관심은 거의 종교에 가까운 것이었죠? 그때 공직사회 분위기도 굉장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수출이다, 이러면 거의 무조건이었어요. 워낙 우리나라에 규제가 많고 지원수단이 없었지만 수출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사안을 국제 수준에 맞춰줬습니다. 수출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원자재 수입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았습니다. 외국 제품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라는 취지였어요. 환율도 수출업체가 이윤을 볼 수 있도록, 몇 년 지날 때마다 평가절하를 해줬습니다. 금융도 수출산업에 대해서는 무조건 우대해 줬죠. 수출을 위한 기계설비에 대한 관세 면제, 마산 수출자유구역 같은 보세단지 조성 등 모든 조건에서 외국 기업에 밀리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줬습니다. 당시 관세청도 완전 수출 위주로 돌아갔죠.”

부처끼리의 협업이랄까, 협력관계도 긴밀하게 이뤄지지 않았나요?

“그때는 대통령이 한 달에 두 번씩 회의를 했죠. 경제동향보고와 수출진흥확대회의라는 걸 했습니다. 매달 경제 동향을 대통령이 직접 파악하고 수출진흥확대회의를 통해 어떤 인센티브가 필요한지 그 자리에서 탁탁 바로 결정을 해버렸습니다. 물론 옆에서 보좌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박 대통령의 혜안은 평가해줄 만한 것 같아요. 대단했죠. 그때 해외의 전문가, 특히 일본 상사에서 일하는 부장급 간부를 직접 불러서 어떻게 하면 수출을 늘릴 수 있느냐 물을 정도였으니까요. 철저하게 목표 지향적인, 목표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통치권 차원의 결단이 매일 이뤄졌던 겁니다. 그러니까 관료들이 바쁘기도 했지만 신이 났어요. 매일 밤새웠죠. 야근을 밥 먹듯 했으니까요. 자정이 넘어 통금이 되면 사무실에서 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공무원들이 힘은 들었겠지만 뭔가 강한 자부심을 느낄 만한 그런 분위기가 조성됐던 것이죠?

“경제 부처 공무원의 자부심이 대단했죠. 관세청도 나름대로 수출에 기여한다는 프라이드가 셌습니다. 경제기획원으로 가보니 그 프라이드는 더 강했습니다. 한국경제를 끌고 간다는 프라이드죠. 기획원 처음 갔을 때 장관이 태완선 부총리였고, 그 다음이 남덕우 부총리가 왔죠. 그때 유명했던 장기영, 김학렬 이런 분들도 다 경제기획원을 거쳐간 걸물들이었습니다. 야사가 많죠. 윗사람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어떤 국장이 야단맞고 나가다가 정신이 혼미해져서 문을 연다는 것이 캐비닛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하고….”

“바닥까지 치도록 내버려둔다”


▎지난해 12월 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51회 무역의날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한덕수 무역협회장(왼쪽),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장관과 식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격세지감입니다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중국이란 존재가 있습니다만, 국가 경제의 파트너로서 미국과 일본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즘 미국 경제가 상당히 좋아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덩달아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율도 상당히 올라가고 있고, 이것이 구조적인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인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있습니다만.

“경제가 회복된다면 미국이 가장 빨리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미국 경제는 정부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하고, 회복기능을 하는 시장 매커니즘을 가장 잘 인정하고 활용하는 나라거든요. 2008년에 외환위기는 분명히 미국에서 시작했다고 봐야죠. 그런데 미국 자본주의가 문제였나? 그건 아니었다고 봐요. 당시 중동, 중국에서 흘러 들어온 돈이 너무 많아졌는데 은행들이 이 돈을 운영할 방법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신용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자꾸 돈을 꿔준 겁니다. 그러니까 소위 파생상품이 없었으면 그런 비극적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걸 어떻게 수습하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미국은 위기 과정에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은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것을 시장 매커니즘에 맡깁니다. 나쁜 것들을 바닥까지 치도록 내버려두죠. 자정 기능을 통해서 다시 올라올 때까지 그 작용을 방해하는 일들을 최대한 안 하는 나라 중의 하나다, 이렇게 봅니다. 아주 철저하게 미국식 회복 방식을 준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경제의 회복을 구조적인 원인에서 찾는 시각인가요?

“기업이 어려워져 고용을 할 수 없을 때 유럽은 일자리를 나누는 등 끌어안는 방법을 쓰죠. 미국은 전체가 망하기 전, 일부가 부담을 혹독하게 감수하는 방법을 씁니다. 그래서 먼저 구조조정을 한 다음 좋아지면 다시 그 사람들이 들어오는 거죠. 고통을 줄이기 위해 중앙은행도 엄청난 돈을 풀고 금리를 내리는 등 매크로한 일은 물론 하지만 정부가 나서서 기업에 고용정책을 좌지우지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오히려 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래서 일단 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거죠. 오바마 대통령이 처음 들어왔을 때 실업률이 10%였는데 지금은 5%대로 떨어졌습니다. 은행에 대해서도 결손이 나면 자본금을 확충하라고 합니다.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아요. 일정한 수준이 안 되면 은행은 문을 닫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을 ‘스트레스 테스트’라고 하는데, 그걸 가장 엄격하게 하는 게 미국이거든요. 500개 이상의 중소은행이 문을 닫았습니다. 반면 유럽은 그런 걸 훨씬 덜 적극적으로 하는 거죠. 은행의 스트레스 테스트도 충분하지 않고, 구조조정도 충분하지 않고, 노동시장은 경직되어 있죠. 최근 이탈리아 등이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일을 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경직되어 있습니다. 매우 유연한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곳이 미국이고, 이것이 미국경제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는 아직도 미국입니다. 규제는 적고 인센티브는 많습니다. 환경 이런 쪽은 엄격하지만 정책이 워낙 투명하니까 충분히 상쇄됩니다. 그리고 인력, 자본, 상품 이동 측면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제조업이 몰락하면서 미국의 경제패권이 사실상 종식되었다는 선언은 좀 성급한 것이었나요?

“미국의 경제가 몰락한 것이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의 경제력이 올라왔다고 봐야죠. 그런데 미국은 대학을 비롯한 ‘혁신의 생태계’가 어느 나라보다도 더 발달되어 있습니다. 엔젤펀드, 벤처 캐피탈, 벤처 기업이 활성화되어 있고요. 제조업을 하든 서비스업을 하든 기업에 맡겨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나라보다도 앞서갈 수 있는 거예요.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미국은 전 세계의 가장 뛰어난 인력을 들여와 자기들의 생산 시스템을 보완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젊은 나라죠. 출산율도 높고 수출, 수입 다 개방되어 있어요. 전 세계에서 제일 물가가 싼 데가 어디냐, 누가 뭐라 해도 미국 아닙니까? 미국의 100 달러는 굉장한 현금가치를 가집니다.”

지금 최경환 경제팀의 정책, 소위 ‘초이노믹스’에 대한 평가가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인 측면도 있고요. 경제부총리를 지낸 경험칙에 입각하여, 최 부총리의 정책 수행의 한계는 무엇에 기인한다고 봅니까?

“경제정책의 수행 환경이 과거보다 어려워진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상당히 많은 권한이 국회에 가 있기 때문에 국회가 법률과 예산을 통해 전폭적으로 뒷받침을 해주지 않으면 경제 총수가 본인의 의지대로 정책을 수행하기 상당히 어렵다는 거죠. 그래도 최근 여야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법안이 통과되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앞으로 이런 트렌드가 강화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규제 완화는 돈 안 드는 생산성 제고 정책


▎2011년 9월 11일 당시 한덕수 주미대사는 9·11테러 10주년을 맞아 워싱턴 D.C.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워싱턴 한인 심포니 오케스트라 주최 ‘평화 콘서트’에 깜짝 출연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초이노믹스의 방향이 근본부터 잘못됐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는데요.

“저는 최 부총리의 전체적인 경제정책 방향은 옳다고 봅니다. 지금 전 세계는 수요의 부족이란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소비의 수요 부족, 투자의 수요 부족, 수요의 부족을 다 겪고 있는데 이걸 보충하는 방법은 금융·재정 이런 것들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좀 더 해야 할지도 모르죠. 작년에 한 걸로는 충분치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고요. 수요와 공급 정책이 두부 자르듯 갈라지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원격 진료나 의료관광과 연계된 규제 철폐는 심지어 비자 까지도 연결되는 것이라서 그게 공급 쪽과 연결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우리의 수출 수요를 늘리는 거니까 공급정책이면서 수요정책일 수 있는 거죠. 교육·의료 시장의 개혁은 수요와 공급에 다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그런 개혁에는 국민적 공감대와 입법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죠. 또한 어려운 환경이지만 방향은 대충 맞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근로자의 소득이 늘지 않는다는 게 근본 문제 아닌가요? 소득이 있어야 소비를 할 텐데요.

“부총리가 하는 정책 중 하나가 소득정책이거든요. 소득을 기업으로부터 근로자 쪽으로 흐르게 해주자, 기업들이 유보금을 쓰지 않을 때 불이익을 준다, 이런 정책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지금 엔화가 3년 동안 50% 이상 절하됐습니다. 물론 엔저가 국제시장에서 가격으로 치고 나오는 데에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겁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치고 나온다고 봐야 할 겁니다. 우리나라 GDP는 1조2천억 달러인데 해외 수출시장은 74조 달러 규모입니다. 과연 우리가 내수만 갖고 꾸려나갈 수 있느냐, 그거는 절대로 힘들죠. 그래서 74조 달러 시장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경쟁력이 없는 분야는 힘들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의 경쟁력은 어디서 나와야 하느냐, 투자를 통한 더 큰 생산성에서 나와야 하는데 기업 입장에서 보면 역시 근로자의 교육비와 건강의료비 부담이 작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합리적이고 적정한 임금을 갖고서도 생활이 가능해야 그 임금이 유지될 거 아닙니까? 아주 절박합니다. 교육과 의료비 부담을 줄이지 못하면 임금 인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전체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이 임금을 올려 국민의 소득이 더 높아진다면 내수는 늘어나게 되지만 국제 경쟁력은 줄어들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밸런스, 즉 수출과 내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요즘 규제완화의 필요성을 자주, 강하게 거론했습니다. 수도권 지역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특히 강조했는데요, 규제완화는 이전 정권부터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임이 분명합니다. 규제완화를 어렵게 하는 DNA나 문화적 뿌리라도 있는 걸까요?

“규제 완화야말로 우리가 잘만 설계하면 돈을 들이지 않고도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입니다. 사회의 총체적인 생산성이 굉장히 올라갑니다. 전 세계 모든 정부가 몰두하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쌓인 규제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쪽은 원천적으로 적습니다. 유교문화 때문인지, 정부의 역할 부족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특히 규제가 많습니다. 국제적으로 봤을 때 아주 많아서 경쟁력이 현격히 떨어집니다. 아주 옛날 1970년대에 수출 드라이브 걸 때도 그런 규제를 다 없앴거든요. 지금은 그때보다도 경쟁이 더 힘들죠.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이 이걸 톱 어젠다로 설정한 건 올바른 방향이라고 봅니다.”

규제 완화의 부작용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하게 접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달라진 여건을 간과한 규제 존치론이 많습니다. 규제를 완화하면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걱정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시장에 맡기면 다 환경을 오염시킬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은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가 굉장히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기업이 환경문제에 둔감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순간 그 기업은 망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부가 일일이 규제를 안 해도 기업이 알아서 노력하게 된다는 겁니다. 100%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상황은 됐다 이거죠. 옛날처럼 정부가 규제 안 하면 100% 환경오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와 근거는 이제 사라졌다고 봅니다.”

규제 풀고, 기업의 자율 권유해야


▎2012년 5월 3일 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오른쪽)이 팻 게인스 암참 회장 겸 보잉코리아 사장(왼쪽), 에이미 잭슨 암참 대표와 함께 한·미 FTA 활용 세미나에 참석해 이야기하고 있다.
수도권 규제에도 그런 자율적 밸런스가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 보시는군요?

“수도권 규제도 마찬가지예요. 옛날 같으면 수도권에 공장 등을 못 세운다고 강제해야 안 들어갔지만 지금은 수도권 땅값을 보고 기업이 스스로 결정합니다. R&D라든가 고부가가치 산업 아니면 들어가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겁니다. 지역균형발전은 중요한 가치니까 정부가 지방에 좋은 교육기관, 문화시설, 인프라, 주택을 마련해주는 일은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도권을 규제해서 균형발전을 이룬다는 생각은 구태의연합니다. 수도권 규제는 철폐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균형은 이루되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는 거죠.”

규제완화에 가장 소극적인 세력이 관료집단이란 말도 있습니다.

“없다고 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의외로 많은 공무원이 불합리한 규제 혁파에 희열을 느낍니다. 제가 산업부에서 그런 일을 해봤습니다. 1980대 당시 7개 산업을 육성하는 법률이 있었어요. 기계공업육성법, 전자공업육성법, 석유화학공업 육성법, 섬유산업육성법, 비철금속육성법 등이 그것입니다. 육성한다는 취지로 법을 만들어놓고 실제로는 다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1985년 산업부에서 법을 통합하면서 신규 진입제한을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런 혁명적인 규제완화 조치가 이뤄진 후 삼성전자도 나오고, 포스코도 나오고, 현대자동차도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트랜스미션 하나 만들려고 해도 다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1985년 규제완화 조치가 좋은 모델이 될 수 있겠네요?

“규제완화는 오랜 기간의 설득과 조정이 필요한 일입니다. 산업정책과장 시절 그 일을 추진하면서 다양한 관련 집단과 논쟁을 참 많이 했어요. 당사자들을 설득하는 데 거의 1년이 걸렸습니다. 심지어 산업하고는 직접 관련 없는 KDI까지 가서 세미나를 하며 그 법을 설명해야 했죠. 업계와 국회를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습니다. 지금도 부서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책 핵심에 있는 대부분의 공무원은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대통령 의지는 강한데 실행 그룹의 역량이 따라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규제개혁이라는 게 손품, 발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사실 규제완화 문제에만 매달리기에는 각 부처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워낙 많아요. 지금 규제개혁위원회가 총리실에 있는데 그 구성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은퇴한 공무원들을 한 1천쯤 계약직으로 채용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봤습니다. 규제개혁위원회가 그들을 진두지휘하면서 규제완화의 실무를 처리하는 거죠. 지금 우리나라의 불필요한 규제가 1만3천 개 정도라는데 1인당 10개씩만 맡기면 1만 개 아닌가요? 그분들은 경험이 풍부하고 이해관계에도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사실 현직 공무원들도 대단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봅니다. 다만 내 권한이 적어지는 거 아닌가 걱정하는 정도일 겁니다. 규제완화의 저항세력이 공무원이라는 시각은 과장된 것입니다.”

한우의 가치, 떨어지지 않았다

‘한덕수’ 하면 떠오르는 게 FTA입니다. FTA 시대를 가장 열정적으로 주창했고, 가시적인 성과도 일궜습니다. 최근 FTA 1기 시대가 이제 끝났고 이제 2기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발언을 자주 했습니다. FTA 1기 시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1기 FTA는 큰 성공을 거뒀다고 봅니다. 전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개방해서 망한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일본을 보세요. 아베 총리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렇게 사람들이 좌절하고 우리가 이제 뒤처지는 거 아닌가 일본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베가 나와서 “Japanese Back!”을 외치면서 제일먼저 한 게 TPP 가입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베는 본능적으로 개방의 효용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FTA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습니다. 우선 2014년 1월부터 11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우리가 FTA 체결한 국가에 대해서는 수출이 6%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전 세계에 대한 수출은 2.3%밖에 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벌써 차이가 확연히 나는 거죠. 미국과 우리나라만 봐도 그래요. 1~9월까지 우리의 미국 수출액이 10.3% 늘었는데, 전 세계에 수출한 액수는 4.1% 증가에 그쳤습니다. 미국이 우리나라로 수출한 건 10.6% 늘었습니다만 미국이 전 세계에 수출한 액수는 3.3% 정도만 늘었습니다. FTA가 한미 양국에 ‘윈윈’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통계만 봐도 FTA는 필요하다, 이런 논리가 나오는 거죠. 관세 장벽, 비관세 장벽 없애고, 투자가 자유화 되고 제도가 투명화되고 하니까 나라 경제에 유익한 것은 당연하죠.”

FTA 처음 할 때 농업 부문이 다 망할 것이란 우려도 많았습니다.

“그건 아니었다는 게 이미 판명됐죠. 우리 쇠고기의 퀄리티는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한우의 가치는 절대 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한우를 찾습니다. 우리 국내 쇠고기는 여전히 45∼50%의 할당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국과의 FTA는 다른 측면이 있지 않나요? 다른 국면이 오는 게 아닌가 좀 걱정이 되거든요. 중국은 농업 대국이고 중국 농산품 중에는 질이 우수한 게 많다고 들었어요.

“물론 품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질이 우수한 건 우리나라에 다 있죠. 우리가 약하거나 강한 품목이 있긴 합니다. 중국은 워낙 땅이 넓고 임금도 싸니까요. 농산물만 이야기한다면 우리 농산물 최고의 장점은 좀 비싸더라도 질이 높고 안전하다는 것이죠. 중국에 가보면 우리나라 농산물을 사려고 줄을 서는 데가 많습니다. 우리 분유 같은 상품은 굉장한 인기죠. 대체적으로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가까이 있으면 작은 나라가 득을 보는 게 더 많습니다. 우리의 노동집약적인 공산품이 문제인데, 그것도 벌써 우리의 기업에 중국 기업이 투자를 합니다. 전남 완도 양식업에 5천만 달러를 투자한 장자도 그룹이 있어요. 굴을 양식해서 중국에 가져가는 사업이죠.

디샹그룹이라는 중국 패션기업이 있습니다. 이 회사가 우리나라 아비스타라는 패션기업 지분 36.9%를 1200만 달러에 인수했어요. 디샹그룹은 중국 내 유통조직이 큽니다. 아비스타는 기획력이 탁월해요. 둘이 합작해서 중국으로 가져 가면 아주 탄탄한 사업이 꾸려질 겁니다. 우리 수출액 전체의 26%를 중국이 수입합니다. 미국, 일본, 유럽 합친 것보다 많아요. 이미 중국은 우리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2024년이 되면 중국은 경제규모로 미국을 능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을 기회로 봐야 한다고 늘 주장합니다. 중국은 아직 많은 국가와 FTA 체결을 하지 못했거든요. 우리로서는 하나의 큰 기회가 온 겁니다. 중국 제품의 91%가 20년 내에 관세가 없어지거나 내려가거나 할 겁니다. 우리가 빨리 선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TPP를 포함한 제2기 FTA 시대의 방향은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 겁니까?

“TPP, RCEP, FTAAP, 한·중·일 등은 여러 나라가 맺는 ‘다자 FTA’라고 합니다. 다자 FTA는 나라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됩니다. 서로의 장점이 아주 다양하게 많기 때문에 다자간 FTA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최단 시일 내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160개 국이 회원으로 가입된 WTO에서 소위 말하는 TFA(Trade Facilitation Agreement)라는 걸 했어요. 그거 사실 우리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관세청에 있었습니다만 통관 절차를 투명하게 해주고 일정 시간 안에 통관하게 해주고 뭐 이런 거예요. TFA 효과를 예측해보면 무려 1조 달러의 무역액 증가입니다. 왜 1조 달러냐, 160개 국가가 들어가 있으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한·미 FTA 했을 때가 100억 달러였습니다. 1조 대(對) 100억 달러예요. 그러니 다자로 가야죠. 그런데 다자가 잘 안되니까 양자를 먼저 하고 다자로 가려고 하는 거예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의 예를 들어보면 미국이 주도하는 거니까 중국이 싫어해서 안 들어가고 RCEP(역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는 그 반대 아니냐고 하지만 다 허언 이에요. 경제는 그런 게 없습니다. 우선 중국은 미국이 언제라도 들어오라는 거예요. 저는 중국이 정치적으로 해결해서 TPP에만 들어가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가 될 거라고 봅니다. 제일 경쟁력 있는 국가에 기술이랑 투자가 들어가면 그 효과는 정말 대단하겠죠. 그리고 미국은 당장은 RCEP에는 안 들어갈 겁니다. 수준이 낮아서 말이지요. 미국은 이것을 장기적으로 FTAAP(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로 끌고 가서 합칠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TPP에 들어가야 할까요?

“지금 TPP는 전 세계 GDP의 40%예요. 그리고 자기네들끼리의 무역량이 9조 달러입니다. 원자재 오고 가는 게 2조 3천억 달러고요. 지금 12개 나라가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중 우리가 두 나라 빼고는 양자 FTA를 체결한 상태입니다.일본이랑 멕시코인데 이들 나라와도 협상을 하긴 했었죠. 그러면 우리가 TPP에 들어가면 이 두 나라하고 간접적으로 FTA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안 들어가고 12개국으로 되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우리가 미국하고는 FTA가 되어 있어서 한국의 부품을 미국이 쓰거나 미국이 우리 부품을 쓰면 이거는 역내산, 국산으로 봐요. 그런데 미국이 호주, 일본한테 자동차를 팔 때 우리나라 부품을 미국이 써봐야 국산으로 인정을 안 해버립니다. 그럼 그게 어디로 갑니까? 일본으로 가겠지요. 우리 정부가 그래서 빨리 TPP를 해야 하고, 입장을 빨리 정해서 11개국과 협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정부가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미국 입장에서 보면 마지막 단계에서 한국과 협상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죠. 그동안 미국에 가서 제가 민간업계의 입장에서 미국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했어요. 첫째는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점을 강조했지요. 그것 외에도 우리가 TPP에 가입했을 때 미국이 얻는 이익이 상당하다는 점을 설득했죠. 역시 마지막 단계라는 점에서 미국이 좀 망설이는 측면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미국이 반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가입의 시급성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흔쾌히 허락하지 않을 때, 이에 대한 정부의 걱정은 좀 있을 거예요.”

다자 FTA 시대 도래했다

수출이 많이 늘고 무역량은 늘어나는데 왜 그 열매가 국내 근로자들에게 잘 전달이 안 되는 건가요?

“그동안의 트렌드가 바뀌었기 때문이죠. 1990년엔 우리가 10억 달러를 수출하면 53.8명을 고용했습니다. 지금은 10억 달러 수출하면 7.7명밖에 고용이 창출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고용효과가 줄어든 거예요. 제일 고용효과가 큰 건 음식점이에요. 그럼 문제는 10억 명당 7.7명 늘었다 해서 수출 분야에서 고용이 줄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우리의 수출이 74조 달러 시장으로 나가기 때문에, 고용을 흡수하는 단위당 효과는 줄지만 전체 효과는 늘었다는 것입니다. 수출산업은 임금 수준이 내수산업보다 높습니다. 고용 효과도 늘리면서 국제수지 개선 효과를 내는 것은 오직 수출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외환보유고가 지금 3500억 달러에 도달했습니다. 1997년 말 우리 외환보유고는 제로였습니다. 그게 지금3500억 달러가 됐는데, 1998년부터 지금까지 무역수지 흑자가 누적된 총액이 3600억 달러 정도 됩니다. 그 누적 총액에서 350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가 나왔다고 봐야 합니다. 고용효과를 불문하고 우리가 수출을 해야 생존 할 수 있는 이유 이기도 합니다.”

- 글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사진 오상민 기자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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