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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의 한자 이야기 ⑤봄(春)] “누가 말했나, 한 줄기 풀잎 마음으로 봄날 햇볕의 큰 은덕을 갚는다고!” 

春은 ‘매일 자라나다’의 새김을 지닌 두 글자 요소가 합쳐져 탄생… 청춘, ‘아픈 세대’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나 본질은 싱그럽고 발랄한 것 

유광종 출판사 ‘책밭’ 고문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늘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설렘을 준다. 만개한 목련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젊은 여성들이 휴대폰 카메라에 꽃을 담고 있다.
얼었던 대지가 녹는다. 얼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물은 땅의 이곳 저곳을 적신다. 메말랐던 숲은 어딘가 모르게 싱그러운 기운을 띠면서 깨어난다. 이즈음이면 숲에서 풍기는 냄새도 다르다. 조금은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내음이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봄이어서 그렇다.

메마른 숲이 기지개 켜는 소리를 실제 듣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소생(蘇生)의 계절, 봄의 문턱에서 숲 사이를 걷노라면 어느덧 귀를 기울인다. 마른 풀, 앙상한 가지가 거듭 깨어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다 부질없는 일일까.

봄을 맞을 때면 개인적으로는 김소월의 시 ‘개여울’을 자주 떠올린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날마다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뭐, 그런 봄의 분위기가 그냥 좋다. 한자의 세계에서도 봄 빛은 늘 찬연하다. 우선 이른 봄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한자 단어가 바로 발생(發生)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마주할 때 사건과 사고 등의 ‘발생’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단어의 원래 출발점은 ‘움트다’에 가깝다. 일어나(發) 자란다(生) 식의 엮음이 본래의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쓰임새에서 이 단어는 직접적으로 겨울 끝에 다가오는 반가운 봄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봄을 가리키는 글자 春(춘)의 별칭이다. 봄을 지칭하는 ‘대표선수’ 격의 글자 春은 ‘매일 자라나다’의 새김을 지닌 두 글자 요소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四季)는 한자로 춘하추동(春夏秋冬)이다. 각 계절은 보통 석 달로 묶는다. 그 석 달의 첫째에는 孟(맹), 가운데에는 仲(중), 마지막에는 季(계)를 붙인다. 따라서 초봄은 맹춘(孟春), 중간의 봄은 중춘(仲春), 끝 달의 봄은 계춘(季春)이다.

孟仲季(맹중계)는 본래 형제자매의 첫째·중간·막내를 가리키는 글자다. 이 석 달의 봄을 묶어서 부를 때의 별칭이 三春(삼춘)이다. 한 달이 30일, 그래서 석 달이면 90일이다. 이를 강조할 때 봄의 별명은 九春(구춘)이다.

잊을 수 없는 어머님의 사랑과도 같아

봄을 석 달로 나눠 부르는 관행으로 인해 봄의 많은 별칭이 파생됐다. 우선 봄의 첫 달을 가리키는 한자 행렬이다. 맹양(孟陽)이 우선 눈에 띈다. 상춘(上春)도 마찬가지다. 이른 봄이라고 해서 초춘(初春)도 있다. 봄의 시작이라고 해서 개춘(開春)이라고도 부른다.

움이 돋는 봄이라고 해서 발춘(發春), 봄의 시작머리라는 뜻에서 수춘(首春)으로 적기도 한다. 새해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강조할 때는 수세(首歲), 또는 초세(初歲), 개세(開歲)다. 꽃이 피어남을 강조할 때는 방세(芳歲), 화세(華歲)다.

가운데 달의 봄은 별칭이 많지 않다. 그저 중양(仲陽)이라고 적는다. 떠나보내는 봄이 아쉬웠을 테다. 마지막 달의 봄은 흔히 모춘(暮春)이라고 한다. 우리 식으로 풀면 ‘저무는 봄’이라는 뜻이다. 어감이 제법 괜찮다. 끝을 의미하는 글자를 붙여서 말춘(末春)이라고도 한다. 늦봄이라고 해서 만춘(晩春)이라고 적는데, 귀에 제법 익숙하다.

봄이 오면 해는 동쪽 땅을 중심으로 운행한다고 봤다. 그래서 봄을 東陸(동륙)이라고도 한다. 새싹이 자라나는 계절이라고 해서 發節(발절)이라고도 적는다. 때로는 꽃이 피어나는 달이라는 뜻에서 花月(화월), 芳春(방춘) 또는 芳節(방절)이라고 표현한다.

젊음을 이르는 단어 청춘(靑春)도 사실은 봄의 별칭이다. 동서남북의 방위에서 봄에 해당하는 동쪽은 색깔을 입힐 경우 ‘푸르다’는 의미의 靑(청)이다. 그곳에 직접 봄의 한자를 붙여 청춘이라고 적었다. 그 봄처럼 싱그럽고 발랄한 연령이 바로 요즘 우리가 쓰는 ‘청춘’이다. ‘아픈 세대’로 그들을 통칭하지만 어디까지나 요즘의 일시적인 경향일 뿐이다.

봄바람은 따뜻함의 이미지 속에 차가움의 기운도 살짝 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만물을 깨어나도록 하는 부드러움이 먼저다. 그를 강조해서 봄을 부를 때는 연절(軟節)이라고 적는다. 부드러운 절기(節氣), 절후(節候)라는 의미다.

계절의 갈마듦은 보통 시서(時序)라는 단어로도 표현한다. 그런 맥락에서 봄을 적을 때는 춘서(春序)라고 적는다. 계절을 의미하는 글자를 직접 끌어내 춘계(春季)라고 적는 단어는 요즘에도 제법 많이 쓰인다. 춘일(春日)도 봄의 별칭이다. ‘봄날’이라고 순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단어다.

붉은 복사꽃, 오얏꽃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계절이 봄이다. 그래서 아예 봄을 도리월(桃李月)이라고도 적는데, 아무래도 화사한 꽃빛이 담겨 감성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봄의 기운은 아침에 가깝다. 생기(生氣)가 번지는 아침 무렵의 느낌을 담아 만든 봄의 별칭은 춘조(春朝)다.

그러나 봄은 밝고 따사로운 햇빛과 햇볕을 떠나 생각하기 힘들다. 봄볕의 따스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봄의 별칭이 陽春(양춘), 陽季(양계), 陽中(양중) 등이다. 봄에는 겨울의 혹심한 추위에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물이 흘러 만물이 깨어나는 기운을 띤다. 그 근원을 봄날의 따사로운 햇빛과 볕으로 간주하는 표현들이다.

맑고도 따뜻한 봄의 햇빛과 햇볕을 가리키는 한자 단어 중 눈에 띄는 것이 春暉(춘휘)다. 때로는 三春暉(삼춘휘)라고도 적는다. 暉(휘)라는 글자는 ‘빛’과 ‘광채’ 등을 가리킨다. 봄의 빛과 볕, 어디에 비유하면 좋을까?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대목이지만, 그래도 살아생전 잊을 수 없는 어머님의 사랑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그를 문학적으로 거룩하게 표현한 시가 있어서 여기에 옮긴다.

예전에 잠깐 언급했던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이다. ‘유자(遊子)’는 길을 떠나는 아들, 길을 떠도는 아들, 또는 흔히 우리가 쓰는 ‘탕자(蕩子)’, ‘탕아(蕩兒)’다. 그 아들이 길을 떠날 때의 정경이다.

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자모수중선 유가신상의)/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임행밀밀봉 의공지지귀)/ 誰言寸草心 報得三春暉(수언촌초심 보득삼춘휘)/ 자애로운 어머니 손에는 실, 떠나는 아들 몸에 걸친 옷./ 길을 나설 때 촘촘히 꿰맵니다, 늦게 돌아올까 걱정하면서…./ 누가 말했나, 한 줄기 풀잎 마음으로 봄날 햇볕의 큰 은덕을 갚는다고.

따지고 보면 나와 자라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어머님의 존재는 절대적이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먼저 떠올리며 찾아가 손등이라도 어루만져야 할 어머님이다. 돌아가셨더라도 어머님 은혜 한 번 떠올리면서 이 봄을 맞자. 따사로운 기운이 마음마저 휘감을 테니.

유광종 - <중앙일보> 베이징특파원, 중국연구소 부소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뒤 홍콩에서 중국 고대 문자학을 연구한 중국 전문가로 <중앙일보> ‘분수대’ 칼럼를 3년여 동안 집필했고, ‘한자로 보는 세상’도 1년 동안 썼다. 저서로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을 답하다> <장강의 뒷물결> <제너럴백-백선엽 평전> <지하철 한자여행 1호선> 등이 있다. 현재 출판사 ‘책밭’ 고문으로 일한다.

201505호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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