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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5)] 인목대비 김씨, 재물을 탐하다 

원래 친정은 큰 부자 아니었으나 입궁 후 재산 크게 불려 … 지도자는 인정·이익에 매몰되지 않는 ‘심치체(審治體)’ 지켜야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쳤지만 의모(義母)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도덕적으로 큰 결함을 남겼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배우 이병헌이 광해군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인목대비 김씨는 19세 되던 1602년(선조 35) 7월 13일 선조와 혼례식을 치르고 입궁했다. 당시 관행대로 친정에서 보내준 유모와 몸종이 인목대비와 함께 궁에 들어갔다. 아울러 친정 부모로부터 자기 몫의 재산도 상속받았다. 하지만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큰 부자가 아니었기에 상속 재산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입궁 후 큰 재산을 확보했다.

조선후기 왕비는 입궁 후 대략 1천 결(結) 정도의 왕실 토지를 받았다. 1결은 산출된 곡식이 지게로 약 100짐 정도 되는 규모의 토지로 평수로는 대략 5천 평, 쌀 수확량으로는 300말 정도로 추산된다. 따라서 1천 결이면 평수로 약 500만 평, 쌀 수확량으로 30만 말 정도 된다. 다만 왕비는 토지 소유권을 받는 것은 아니고 세금을 거두는 권한을 받았다.

<속대전>에 의하면 왕자나 왕녀 등에게 하사하는 궁방전(宮房田)에서 걷는 세금은 1결 당 쌀 23말을 넘지 못한다고 했다. 이에 준한다면 1천 결의 토지에서 거둘 수 있는 세금은 최대 2만3천 말에 달한다. 인목대비는 입궁 후 아무리 낮춰 잡아도 매년 쌀 1천여 가마 이상을 확보한 재력가가 됐던 것이다.

인목대비의 재산은 서제소(書題所)에서 관리했는데 그곳의 최고 책임자는 차지(次知) 또는 장무(掌務)라고 했다. 인목대비가 궁 밖에 거주했다면 서제소는 인목대비의 거처에 마련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궁 안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왕비 또는 대비의 서제소는 대체로 친정에 마련됐다. 인목대비 역시 서제소를 친정에 마련했다.

조선시대 왕비 또는 대비의 친정집은 본방(本房)·본궁(本宮)·신본궁(新本宮) 등으로 불렸다. 당시 인목대비의 친정이 명례동에 있었기에 그곳은 명례 본궁 또는 명례 신본궁 등으로 불렸다.

인목대비는 오윤남이라는 사람을 명례 본궁의 서제소 차지로 임명해 재산을 관리하게 했다. 따라서 오윤남이 차지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대비의 재산은 친정아버지 김제남 그리고 본궁차지 오윤남을 통해 관리됐다.

인목대비가 장악한 재산은 자녀를 출산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대비는 1603년(선조 36) 5월 19일 정명공주를 출산했고, 3년 후인 1606년(선조 39) 3월 6일에는 영창대군을 출산했다. 정명공주는 태어난 다음해 즉, 2세 되던 해에 공주에 책봉됐다.

조선시대 공주를 책봉하는 연령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관행적으로는 8세 전후였다. 그럼에도 정명공주가 2세 때 책봉된 것은 선조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공주에 책봉되면 대군과 마찬가지로 850결 규모의 궁방전을 받았다. 정명공주의 궁방전 역시 공주방의 서제소를 통해 관리됐는데 공주의 서제소는 인목대비의 친정에 마련됐다. 이는 정명공주의 궁방전은 사실상 인목대비가 관리했음을 의미한다.

제안대군의 재산까지 물려받은 영창대군


▎인목대비가 병 치료에 관해 쓴 서한.
선조는 1608년(선조 41) 2월 1일 승하했는데 당시 영창대군은 3세에 불과한 터라 대군에 책봉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의 지극한 사랑 덕에 책봉되기 이전부터 거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됐다. 선조는 영창대군이 태어난 지 3개월여 만인 1606년(선조 39) 6월 15일 경중의 노비 30명, 외방의 노비 170명 합 200명과 전답 100여 결을 하사했다. 이어 다음해 3월 15일에는 경중의 노비 50명, 외방의 노비 200명 합 250명과 전답 200여 결을 하사했다. 이 재산은 소유권이 영창대군에 귀속된 명실상부한 재산이었다. 2세의 영창대군은 이미 노비 450명, 전답 300여 결을 확보한 재산가였다. 이 재산 역시 사실상 인목대비가 관리했다.

게다가 선조는 영창대군을 제안대군의 후계자로 정함으로써 영창대군을 상상을 뛰어넘는 재산가로 만들었다. 예종의 큰 아들인 제안대군은 평원대군의 후계자가 됨으로써 본인의 재산에 더해 평안대군의 재산까지 확보했다.

제안대군의 신도비명에 의하면 대군은 살아 있었을 때 “나는 평원대군의 후사(後嗣)가 됐으니 나 또한 반드시 대군으로 후사를 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예종의 큰아들로 태어나 성종·연산군·중종까지 4대에 걸쳐 60년 인생을 산 제안대군은 역대의 국왕으로부터 수많은 재산을 받음으로써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제안대군은 1525년(중종 20)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제안대군의 재산은 주인 없는 상태가 됐다. 원래 조선전기에는 대군의 생활비 명목으로 직전(職田)·월급·장리(長利)에 쓸 자본금 등을 지급했다. 전체적인 규모는 조선후기 대군에게 지급하는 850결과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직전과 월급, 장리 자본금 등에서 나오는 수입은 생활비를 쓰고도 많이 남으므로 재산 확대에 투자됐다. 이렇게 형성된 대군의 재산 중 직전을 제외한 부분은 사후에도 자녀에게 상속됐다. 직전 중에서 3분의 2 정도는 국가에 반납되고 나머지 3분의 1정도는 제사비용으로 사용되다가 4대가 넘으면 그것도 국가에 반납하게 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아들이 있는 경우였다.

문제는 아들이 없는 경우였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양자를 들여 대를 잇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를 잇지 못하거나 혼인 전에 죽은 경우에는 국가에서 재산을 환수하고 제사 역시 국가가 맡아 치러줬다. 따라서 제안대군이 아들 없이 죽었을 때 그의 재산은 국가로 환수돼야 했지만 부인이 살아 있어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제안대군의 부인은 남편 사후 4년이 지난 1529년(중종 24) 세상을 떠났다. 당시 제안대군의 재산과 제사를 국가에서 환수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을 때 “나는 평원대군의 후사가 됐으니 나 또한 반드시 대군으로 후사를 삼겠다”고 했던 제안대군의 말 때문에 환수되지 않았다. 이후 제안대군의 방은 수진궁(壽進宮)으로 불렸는데 재산관리는 수진궁에 설치된 서제소에서 맡았다.

수진궁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광해군일기>에 “제안대군 방에 재산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후기 수진궁에 1천 결의 토지가 소속됐던 사실을 생각하면 수진궁에 적어도 전답 1천 결 이상, 노비 수백 명 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거대한 재산을 선조는 영창대군에게 줬던 것이다.

광해군의 불안감은 고조돼가고


▎영창대군이 형인 광해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경기 강화군 살창리.
영창대군은 6세 되던 광해군 3년(1611) 12월 26일 대군으로 봉작됐다. 당연히 대군에게 지급되는 850결 내외의 토지를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창대군은 광해군 3년 12월 당시 6세에 불과했지만 이미 노비 450명, 전답 500여 결에 더해 제안대군의 유산 그리고 대군 궁방전까지 장악한 거대한 재산가였다. 이 재산 역시 대군방의 서제소를 통해 관리됐는데 그 서제소는 인목대비의 친정집에 마련됐다. 이 또한 영창대군의 재산을 관리한 사람은 사실상 인목대비 였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목대비는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정명공주의 재산, 영창대군의 재산 그리고 수진궁의 재산 전부를 친정아버지 김제남에게 맡겨 관리하게 했다. 비록 김제남 본인은 큰 재산가가 아니었지만 인목대비로부터 재산관리를 위임받으면서 그의 손아귀에 들어간 재산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다.

그 규모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노비 1천 명 이상, 전답 4천 결 이상은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재산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매년 늘어나는 재산도 무시무시했다.

이런 상황이므로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재산을 불안한 마음으로 주시했을 것은 쉬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불안감을 해소하려면 재산이 지나치게 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영창대군의 재산이 너무 늘지 않도록 주의했어야 했다.

<태천집(苔泉集)>에 의하면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영창대군에게 창진(瘡疹)이 생기자 서경주가 김제남에게 편지를 보내 “크게 역병을 앓는 아이에게 아무혈에 침을 놓으면 죽지 않고 소경이 된다고 하니 반드시 그 법에 따라 침을 놓으십시오”라고 권했다 한다.

그때 김제남이 웃으면서 “나는 서경주를 지혜롭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구나. 죄도 없는 대군을 어찌 소경으로 만든단 말인가?”라며 무시했다 한다. 이는 서경주가 당시 영창대군 때문에 불안해 하는 광해군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음에 비해 김제남과 인목대비는 그렇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냥 무시했음을 암시한다.

설상가상으로 인목대비와 김제남은 영창대군을 위해 재산을 크게 늘렸다. 그것이 영창대군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실록에는 “인목대비는 재산을 모두 김제남에게 부탁해 영창대군을 위해 관리하게 했는데 김제남은 사양하지 않고 도리어 재물을 긁어 모으고 이자를 불렸으며 집을 짓고 전원을 넓혀 자신의 몸을 살찌게 했다”고 실려 있다. 당연히 영창대군의 재산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광해군의 불안감도 커졌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광해군은 선조가 승하한 1608년 초까지만 해도 인목대비전(殿)의 내인들에게 매우 잘했는데, 3년 후인 1611년(광해군 3)부터 조금씩 냉랭하게 대하더니 나중에는 본체만체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1611년 10월 광해군의 세자가 혼인했는데 뒤이어 12월에 영창대군이 대군에 책봉되면서 세자와 대군이 본격적으로 대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세자에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비록이 궁전에 열 명의 대군이 있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너와 조카지간이 아니냐? 예전에 세조께서는 단종이신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나는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렵구나. 내 반드시 영창대군을 없애고 너를 편안하게 살게 하리라”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광해군의 측근 궁녀인 김개시는 “영창대군의 세간이나 수진궁의 물건들이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야”라고 말했다 한다. 이런 말은 광해군과 측근들이 영창대군의 존재 자체뿐만 아니라 영창대군의 막대한 재산에 불안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광해군의 불안감을 해소시키려면 영창대군이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 돼야 했다. 서경주가 영창대군을 소경으로 만들자고 한 의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단순 살인강도사건이 역모죄로 둔갑

만약 인목대비와 김제남이 차마 영창대군을 소경으로 만들 수 없었다면 재산이라도 없애야 했다. 예컨대 광해군의 세자가 혼인할 때 영창대군의 재산을 선물 명목으로 모두 헌납하고 대군을 거지같은 왕자로 만들었다면 광해군의 불안감은 크게 해소됐을 것이다. 그러나 인목대비와 김제남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재산을 불렸다.

인목대비와 김제남의 입장에서는 어린 영창대군이 무슨 죄가 있다고 소경을 만들거나 거지로 만들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영창대군의 재산은 불법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모두 정당한 절차로 얻은 것이었다. 광해군이 제대로 된 왕이라면 당연히 인목대비에게 효도해야 하고 또 영창대군과 우애로운 형제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기대하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이런 기대와 주장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은 광해군의 입장과 불안감을 전혀 헤아리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일방적인 기대와 주장 그리고 광해군의 일방적인 불안감은 화해되지 못한 채 비극으로 치달았다.

광해군 5년(1613) 3월 어느 날, 거금을 지닌 행상인이 조령에서 은자 수백 냥을 빼앗기고 살해당했다. 살인강도들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여 증거를 없앴다고 생각했지만 실수를 했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춘상이라는 사람이 몰래 살인강도들의 뒤를 밟아 은신처를 알아낸 후 포도청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현장을 급습한 포졸들은 혐의자 몇 명을 체포했다. 그중에 덕남이라는 노비가 있었다. 고문이 두려웠던 그는 매를 맞기 전 아는 대로 자백했다. 그에 따르면 살인강도는 박응서·서양갑·심우영 등으로 그들은 모두 명문대가의 서자였다. 덕남의 진술에 따라 4월 25일 박응서가 체포됐다. 그는 당일로 “저희들은 천한 도적이 아니라 은자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 했습니다”는 취지의 고변서를 올렸다. 이 고변서로 박응서는 단순 살인강도에서 모반대역 죄인으로 돌변했다.

그날 저녁 광해군은 박응서를 직접 조사했다. 박응서는 자신을 비롯한 서양갑 등이 서자차별에 불만을 품어 역모를 꾸몄다고 했다. “서양갑을 우두머리로 해 장차 군사 300여 명을 모아 대궐을 습격해 옥새를 탈취한 후 곧바로 대비전에 나가 수렴청정을 요청한다.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후 서양갑이 영의정이 되는 등 서자들이 권력을 잡으려 음모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역모 주모자는 단연 서양갑이었다.

4월 28일 체포된 서양갑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날에는 서양갑과 박응서의 대질심문이 있었다. 실록에 의하면 이때 앞뒤 말이 어긋난 사람은 서양갑이 아니라 박응서였다고 하는데 이는 박응서의 고변이 무고라는 의미였다.

만약 그때 광해군이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사건은 무고로 처리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됐다면 박응서는 무고죄로 사형되고 서양갑·인목대비·영창대군 등은 무혐의로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한 광해군의 신뢰가 있어야 했다. 불행히도 광해군에게는 신뢰가 없었다. 광해군에게 의심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게 재산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했다.

대질심문 이후 며칠간 계속된 모진 고문에도 서양갑은 역모 사실이 전혀 없다며 버텼다. 그러자 광해군은 그의 생모·친형·친누나 등까지 체포하게 했다. 그의 눈앞에서 생모와 친형을 고문해 자백을 받아내려는 심산이었다.

‘덫’이 돼버린 서양갑의 ‘허위자백’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광해군의 묘.
5월 2일 서양갑의 생모 사경(思敬)이 체포됐다. “만약 바른대로 자백하면 네 어미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광해군의 회유에 서양갑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격노한 광해군이 그의 생모를 고문하게 하자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네가 역모를 도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승복할 경우 너는 죽더라도 나는 살 것이니 어째서 승복하지 않느냐?”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서양갑은 “군사부일체거늘 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승복한단 말입니까?”라고 버텼다. 대가는 참혹했다. 서양갑은 자신의 눈앞에서 생모가 모진 고문에 몸부림치는 참상을 바라봐야 했다. 3일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고 하루건너 5일에 또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날 그의 생모와 친형이 고문을 받다 죽었다. 하지만 모진 고문에도 서양갑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5월 6일 아침 심문을 앞둔 서양갑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별일 아닌 듯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기까지 했다. 이날 몇 차례 고문을 받던 그는 갑자기 자백하겠다며 박응서와의 대질을 요구했다.

서양갑은 “박응서가 자금을 얻고자 상인을 죽였다고 했지만 그 일은 그가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박응서 등은 김 부원군(김제남)의 집에서 은화를 많이 얻은 후 격문을 붙여 소동을 일으키고자 계획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역모를 가장 먼저 창도(唱導) 한 사람은 바로 김 부원군이며, 역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원 역시 김제남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동안 역모의 주모자를 서양갑이라 했던 박응서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서양갑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본궁차지 오윤남과 그의 처를 끌어들였다. 광해군이 그토록 불안해하던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재산관리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서양갑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사실상 김제남은 물론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운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양갑의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광해군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인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그리고 그 불안을 증폭시키는 영창대군의 재산을 한 번에 처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록에 따르면 서양갑은 생모와 친형이 자신의 눈앞에서 고문을 받고 죽던 날 저녁에 “내가 앞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어 어미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했다고 한다. 광해군이 자신의 어미와 형을 죽였으니 자신도 광해군의 어미와 형제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서양갑은 광해군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고문하는지 눈치챘을 듯하다. 즉 광해군은 서얼들이 단독으로 역모를 도모했다고 믿지 않고 누군가 배후가 있다고 의심했음을 눈치챘던 것이다. 이런 의심의 심연(深淵)에는 물론 인목대비와 영창대군 그리고 그들의 재산이 있었다. 이를 눈치챈 서양갑은 확실한 복수를 위해 본궁차지 오윤남과 그의 처를 끌어 들였던 것이다.

서양갑은 오윤남이 자신과 박응서의 먼 친척이라 평상시 잘 알았으며, 자신이 김제남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 김제남이 동작정(銅雀亭)에 머물 때 오윤남을 통해서라고 했다. 결국 서양갑은 지난 2년 동안 오윤남을 매개로 김제남의 지휘를 받아 역모를 도모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나아가 역모를 도모하게 된 동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이렇게 진술했다.

“오윤남의 처가 늘 신에게 말하기를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보전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인목대비가 이 때문에 항상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때 만약 누군가가 구해준다면 어찌 이를 우연으로만 돌리겠습니까?’라고 하고, 또 그녀가 말하기를 ‘김 부원군은 졸렬해서 제대로 생각을 밝히지도 못한 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여러 친구와 결탁하고 만에 하나라도 이 일을 성사시킨다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김 부원군께서 만약 거둬 쓰시고자 한다면 사람 얻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지금 같은 때 돈만 있으면 사람을 사귀기가 매우 쉬우니 돈만 있으면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오윤남이 말하기를 ‘김 부원군은 이름만 거창하지 실제로 비축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돈을 얻고자 하면 인목대비가 개인적으로 간직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혹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인목대비의 도량은 김 부원군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광해군일기> 권66, 5년(1613) 5월 6일]

비참한 말로(末路) 면치 못한 모자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역모의 진짜 주모자는 김제남이 아니라 인목대비였다. 오윤남의 처에 따르면 김제남은 역모에 필요한 자금도 없고 배짱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김제남이 역모를 도모하게 된 것은 인목대비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서양갑의 진술은 거짓일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도 은밀해야 할 역모를 도모하는 김제남이 서양갑을 만나보지도 않고 진행했다는 진술은 신빙성이 크지 않았다. 서양갑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오직 오윤남의 말만으로 서양갑을 믿고 역모를 도모했다면 김제남은 아주 무모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양갑은 김제남이 자신들에게 역모를 사주한 사실을 박응서도 알고 있다고 했다. 이에 광해군이 “서양갑의 말이 이러한데 너는 어찌하여 대두목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는가?”라고 심문하자 박응서는 “지금 김제남과 역모를 통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신을 얽어 넣으려 끄집어낸 말입니다. 오윤남은 신과 지극히 소원한 친척인데 신이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광해군은 5월 6일 당일로 김제남·오윤남과 오윤남의 처 등을 체포해 조사했다. 서양갑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중에서 결정적인 증인은 오윤남이었다. 왜냐하면 서양갑이 김제남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 김제남이 동작정에 머물 때 오윤남을 통해서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윤남은 2년 전 동작정에 왕래한 일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이미 몇 년 전 본궁차지에서 쫓겨났으며 그 후로는 동작정은 물론 김제남 집에도 출입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같은 오윤남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윤남이 본궁차지였을 때는 분명 김제남의 은밀한 측근이었지만 본궁차지가 아니라면 측근일 가능성이 작았다. 오윤남 이외의 증인들도 모두 혐의를 부인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서양갑의 주장은 거짓일 확률이 훨씬 높았다.

실제로 박응서를 비롯해 김제남·오윤남 등이 모두 서양갑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 이후 광해군은 영창대군방의 차지, 수진궁의 차지 등을 체포해 고문했지만 그들 역시 모두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서양갑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고 김제남·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당연히 영창대군의 재산은 몰수돼 광해군 차지가 됐다. 인목대비 역시 후궁으로 강등돼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유폐됐다. 이것이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아들이 어머니를 유폐했다고 하는 서궁 유폐였다.

물론 서궁 유폐를 자행한 광해군의 의심과 잔인함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와 함께 광해군을 의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인목대비의 처신과 재물 욕심 역시 비난받아 마땅하다. 자신의 친아들만 귀히 여기고 이복아들은 멀리하는 것이 친모의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나라의 웃어른이라면 좀 더 사려 깊고 분별력이 있어야 했다.

<대학연의>에서는 지도자가 인정과 이익에 매몰되지 않을 덕목으로 ‘심치체(審治體)’를 제시한다. 의리를 깊이 살펴 인정과 이익을 넘어서는 것, 그것이 ‘심치체’이다. ‘심치체’가 잘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이자 위인임은 고금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505호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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