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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특별 인터뷰] ‘위기 전문가’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한국경제 진단 

“경제당국이 환율·금리·조세 등 정책수단 지나치게 아낀다”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사진 오상민 기자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 한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현 경제팀의 ‘초이노믹스’ 성과는 새해까지 결과 지켜봐야 평가 가능

■ 한국 대외 지급능력 세계 최고, 1997년 외환위기 같은 파국은 오지 않을 것

■ ‘반짝’ 경제성장률 상승은 수출부진 국면에선 특별한 의미 없어

■ 내리막길 걷는 수출 진작 위해 원화 평가절하 등 특단의 대책 강구해야

■ 미국의 금리인상은 환율 경쟁력의 강화 측면에선 플러스 요인 될 것


1997년 재정경제부 차관으로 외환위기를 겪고, 2008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서 글로벌 경제위기와 마주했던 관료. 한국경제에 밀어닥친 두 번의 커다란 외부 충격을 장·차관으로 몸소 맞섰던 유일한 이가 강만수(70)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이던 1970년대에 재무부에 들어가 부가가치세 신설, 부실기업 정리, 금융실명제 도입, 금융시장 개방 등 우리 경제사의 획을 그은 주요 재정·금융정책 입안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좌절과 상처, 승리와 영광의 기억이 한데 어우러진 한국경제는 시련과 위기 속에서 꽃을 피운 도전의 역사라고 그는 진단한다. 위기는 항상 있어왔고 반복된다는 게 지론이다. 이기심과 탐욕, 책임 전가가 만들어낸 거품과 파열의 반복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존재형식이라고도 했다. 결국 “어떻게 도전하고 대처하느냐가 남은 이들의 과제”라고 그는 강조한다.

새해 한국경제는 올해보다 더 어렵다고들 난리다. 대기업들이 연말 승진 인사를 최소화하면서 긴축 경영에 나서는 등 사회 분위기가 태풍 전야의 고요를 연상케 한다. 경제성장률 저하, 정부의 경기부양 카드 소진, 청년 고용절벽 가속화, 가계부채 증가 등 부정적 요인이 세계 경제 불황과 맞물리면서 한국경제에 위기 경보가 울린다는 얘기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시기다.

과연 새해에 한국은 경제 한파에 내몰리게 될까? 위기에 이골이 난 까닭인지 강 전 장관은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지 않았다. 경제 기초체력이 탄탄한 까닭에 웬만한 외부 충격은 이겨낼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세계 경제 침체 기조와 맞물려 한국경제도 2015년을 정점으로 해 새해에는 내리막 길을 걸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대응책을 구사한다면 반전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는 12월 9일 서울 강남 영동대로에 있는 개인사무실에서 3시간 남짓 진행됐다.

환율은 우리 경제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2009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강만수 장관(왼쪽 둘째)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삼성그룹이 7년 만에 최저 폭의 임원 승진인사를 단행하면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삼성은 외환위기 1년 전부터 인력감축 등 선제적 대응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삼성 인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1997년 당시는 금융과 외환 분야에서 한국이 유달리 취약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그런 부도의 위기는 없다. 외환보유고가 대외 단기채무를 훨씬 넘는 3천억 달러에 이른다. 한국의 대외 지급 능력의 건전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지금은 IMF 위기 때와 다르다.”

그런데도 왜 기업들은 저마다 허리띠를 졸라 매는 걸까?

“세계 경제침체가 당분간은 계속될 것이라는 상황판단과 관련이 있지 않겠나?”

2015년에 펴낸 저서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에서 ‘대한민국 경제가 2015년 정점에 오를지도 모른다. 그 다음부터 내리막을 걷는다’고 예견했다. 2016년은 한국경제의 갈림길이 될 거라고 보나?

“지금 세계 경제와 우리 경제의 흐름을 보면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대응책이 없으면 내리막길로 갈 위험이 크다.”

항간에는 박근혜 정부 임기 말인 2017년을 겨냥한 한국경제 위기론이 회자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10년 이상 갈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고, 어쩌면 더 오래 가리라는 비관론도 고개를 들었다. 최근까지 유럽중앙은행과 일본은행의 양적완화가 지속되면서 더욱 그렇다. 세계 경제 침체가 장기화하면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2017년 위기론이 나오는 것 같다.”

그 위기의 강도와 수위를 어떻게 예측하나?

“한국도 청년실업이 계속 증가하고, 수출은 11개월째 줄어드는가 하면 경기침체도 계속된다. 수출 진작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확장적 재정정책은 기본, 더 과감한 정책 필요

환율을 올려 수출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말로 들린다.

“나는 환율을 최우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한국과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에서 경상수지 적자는 결국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달러를 벌지 못하면 부도가 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다른 경제 정책을 제 아무리 잘 구사한들 환율정책 하나를 실패하면 한국경제는 벼랑끝으로 몰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고환율 정책에 대해 대통령만 찬성했고 많은 이가 물가상승 등을 우려해 반대했다. 나는 기재부장관으로서 입장을 명확히 했다. 물가는 잘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이지만 환율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계 경제는 왜 이렇게 비틀거리며 맥을 못 추나?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의 마틴 울프가 갈파했듯이 미국, 영국, 스페인 등 너무 많이 노는 ‘베짱이’ 국가와 독일, 일본, 중국처럼 너무 일만 하는 ‘개미’ 국가가 만든 소비, 투자, 국제수지의 불균형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이는 풍요 속에서 나태해진 인간의 본성과 연결되므로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세계 경제의 위기는 결코 회복되거나 과거로 돌아갈 성질이 아니다. 한국의 정책 당국도 세계 경제 흐름을 읽는 통찰력이 요구되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결단력과 추진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는 4대 개혁은 적절하다.”

공공·금융·노동·교육 개혁이 즉각적이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인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할 과제들이다. 충분히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건 국회선진화법 등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4대 개혁이 조속히 처리된다고 해도 경제상황이 만만치 않은데 지금은 ‘폭탄돌리기’를 하는 식으로 미룬다. 우리 경제는 앞으로 더 어렵고 심각해진다. 박 대통령의 노동개혁 관련 발언(인터뷰 전날인 8일 박 대통령은 노동개혁법안 등 처리 지연과 관련해 ‘국회가 명분과 이념의 프레임에 갇힌 채 기득권 집단의 대리인이 돼 청년들의 희망을 볼모로 잡고 있는 동안 청년들의 고통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며 법안 통과를 호소했다)은 정치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주 적절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는 관료의 책임이 가장 컸지만 정치와 기득권 집단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4대 개혁법안 처리를 지연하는 정치권에 조언한다면?

“한국에서 민주주의 제도는 확립되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자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꼭 벼랑끝에 가서야 정신을 차리는 경우가 많았다.”

올 3분기(7∼9월) 성장률이 5년 만에 최고인 1.3%까지 올랐다. 정부는 추가경정예산 편성, 주택시장 정상화대책,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 실시 등의 효과라는 평가를 내린다.

“세계 경제의 침체가 지속되고 있고,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50%를 넘기 때문에 수출이 부진한 이상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

그가 보는 한국경제는 세계 경제와 긴밀하게 연동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세계 경제의 침체 트렌드를 벗어나자면 한국만의 ‘특별한 뭔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율·금리·조세·재정 같은 분야에서 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도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거나 특정인의 공과를 다루기보다 참고할 점을 제시하고 조언하는 기회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곧 물러난다. ‘확장적 재정 및 통화정책’을 요체로 하는 ‘초이노믹스’ 1년 5개월의 성과를 진단한다면?

“경제정책의 효과는 1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 내년(2016년)까지 결과를 봐야 평가할 수 있다.”

경제 성적표를 매긴다면 A~F 중 어디에 위치할까?

“아직 평가는 이르다. 그러나 존재감 있는 정책이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새 경제수장, 국제경제 흐름에 정통한 인물이라야


▎수출용 차량으로 가득 찬 울산 선적 부두. 유가 하락과 세계 경제 침체로 한국의 수출도 줄어들었다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돈을 풀고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는 등 총력전에 가까운 재정정책을 구사하지 않았나?

“그건 정책당국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우면 특단의 대책을 세워 돈을 풀거나, 감세를 하거나, 환율을 올리거나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환율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도 느릿느릿했다. 그렇다고 감세를 한 것도 아니고. 새 정책을 구사한 것도 없다. 딱 부러지게 잘했다, 못했다 언급할 거리가 별로 없다.”

최 부총리가 들으면 좀 서운하겠는데.

“(웃음) 아! 그렇긴 하네. 어쨌거나 내년을 지켜봐야지. 지금은 뭐라 할 수 없다.”

후임 기획재정부 장관의 자격과 역할을 든다면.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제경제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 요구된다. 이명박 정부 당시 우리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의장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관료들이 미국, 중국, 일본 등 국제무대를 쉼 없이 뛰어다녀 성취한 결과물이다. 이런 글로벌 플레이어로서 활동 가능한 이가 다음 경제 수장이 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언론 기고문에서 ‘세계 경제가 어려운 지금 정책 여력을 갖고 있는 우리가 아낄 이유가 없다. 환율·금리·조세와 재정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할 때”라고 했다. 우리 정부는 이런 수단을 동원하는 데 인색하다는 것인가?

“다른 선진국들, 신흥국들과 비교하면 환율·금리·조세와 지출 등 정책 수단이 너무 아껴진 게 아닌가?”

정책 당국이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벌써 가계부채가 1조2천억원에 육박한다. 이런 경제 환경이 부담을 준 건가?

“부채는 갚는 게 아니라 관리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부채를 갚는 유일한 방법은 소득이다. 절약한다고 부채를 상환하진 못한다. 결국 성장과 일자리가 없으면 해결할 수 없다. 부채를 해결할 딱 부러지는 대책은 없다는 말이다.”

새해 경제성장률이 2%대로 내려앉는다는 전망이다. 일자리 창출도 제자리걸음이다. 가계부채라는 폭탄이 터져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겠나?

“외국에서는 그런 얘기를 하는가 본데 한국과 외국의 경제구조는 좀 다르다. 가계부채의 대부분이 주택 매입자금이다. 외국같이 급성으로 표출되는 게 아니라 만성병마냥 서서히 악화된다. 집값이 떨어지면 가계가 대출금 상환 압박을 받는다. 파산하는 가계도 생긴다. 그만큼 소비도 줄고 은행의 부실로도 이어진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에 들어갈 때와 같은 양상이다.

“당시 일본의 부동산과 은행이 파산 상태로 갔다. 그나마 일본의 가계는 재무구조가 건전한 편이었다.”

새해에는 집값도 다시 떨어진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한국은 가구 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PIR)이 너무 높다. 부동산 가격이 높으면 근로자들의 삶이 피곤해진다. 부동산 가격은 당위론적으로 내려야 한다. 그렇다고 빨리 떨어져서는 곤란하다. 보폭을 조절하면서 떨어져야 가계도 살고 은행도 버틴다. 장기적으로는 계속 떨어질 것이다. 부동산 주요 수요층이던 45~55세 인구가 줄어드는 데다 결혼마저 늦어지면서 수요는 더 감소하게 된다. 부풀려진 가격에 수요마저 위축되는 부동산 시장은 더는 올라갈 수 없는 구조다. 부동산의 폭락을 막고자 취한 최경환 장관의 규제완화 정책은 적절한 대증요법이라고 본다.”

부동산 폭락 막은 규제완화 정책은 적절했다


▎1. 3천억 달러에 달하는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대외 지급 능력을 상징한다. / 2. 몇 년 사이 일본 엔화 환율이 40% 오르면서 일본은 해외 관광객들의 쇼핑 천국이 됐다.
수출을 진작하고 경기를 부양해도 일자리 창출은 잘 안 되고 내수 또한 바닥이다. 고용과 내수와 같은 낙수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어떻게 보나?

“수출과 경기부양의 낙수효과는 줄기는 했어도 나타나지 않은 건 아니다. 수출이 부진했다면 경기를 지금처럼 유지할 수 있었겠나? 앞으로도 성장이 가져올 고용효과는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이고 이는 불가피한 뉴 노멀(New normal, 새 기준)이기도 하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는 내수 진작에 한계가 있다. 내수 진작을 너무 과도하게 해버리면 경상수지 적자를 불러온다. 외환위기도 그래서 일어났다. 수출과 내수는 동시에 추진해야 할 과제이지 선후의 문제는 아니다.”

기업이 수출로 번 돈을 재투자나 수출 경쟁력에 직결되는 연구·개발(R&D)에 쓰지 않고 유보금으로 재워둔다. ‘돈맥경화증’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봐야 할까?

“세계 경기가 활황 국면이라면 사내 유보금을 재투자와 R&D에 적극 활용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세계 경제 침체가 오래간다면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현금을 쌓아두게 된다. 기업의 유보금은 한국같이 경영권 보장 장치가 부실한 나라에서는 해외로부터의 적대적 인수합병(M&A) 대비책이기도 하다. 포스코와 같이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는 경우 적대적 M&A에 특히 취약하다. 유일한 방어책이 자사주 매입에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을 보유하는 길이다.”

수출은 올 들어 11개월 연속 감소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나?

“경기 침체와 유가 하락 때문에 세계 교역량이 줄어든 게 근본 원인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 몇 년 사이 브라질·인도·중국 등 신흥국의 환율이 10~20% 정도 올랐다. 일본 엔화 환율도 40% 뛰었다. 우리 원화가 달러당 1150원 전후에 머물고 있어 상대적으로 고평가된 것도 한몫했다. 우리 정부가 이런 흐름을 통찰해야 한다.”

외환 기준의 국민소득 목표가 제기돼 환율정책을 옥죈 결과인가? 경제관료들이 꿋꿋하게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는데 정치논리에 순응하여 환율정책을 수행하다 보니 동일한 실패가 반복된다는 지적도 있다.

“환율은 소규모 개방경제가 살아남는 유일한 수단이고, 국가경영의 기본이자 주권행사다. 다른 모든 정책 수단에 우선해야 한다.

세계금융의 중심은 기축통화국인 미국이다. 안보든 경제든 위기 관리를 하자면 미국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한미관계는 순항하고 있다고 보나?

“과거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했을 때 우리는 식민지로 전락했고, 6·25 전쟁의 참화를 입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1960년대부터 30년 동안의 경제 기적은 미국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중국에 있어 한국의 외교·안보적 가치는 한미동맹에서 나온다는 말을 유념해야 한다.”

미국 때문에 환율 주권 행사 망설여선 곤란


▎11월 12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주재로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미국 재무당국이 한국의 환율정책에 제동을 걸거나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미국은 그들의 통상법에 따라 항상 교역상대국의 환율을 검토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부터 수시로 다투어왔다. 일본의 절하에 대해 말이 없다. 미국·일본·유럽연합(EU)이 제로금리로 돈을 마구 찍어내는 양적완화(QE)가 환율전쟁이다. 미국 때문에 우리의 주권행사를 망설일 일이 아니다.”

1997년 재경부 차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10년 뒤인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복귀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공직사회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외환위기 전만 해도 의욕에 넘친 사무관, 국장들이 민감한 정책을 너무 세게 밀어붙여 장·차관이 다독이며 완급을 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런데 2008년 정부로 돌아와보니 부하 직원들이 ‘이거는 언론이 시끄러울 거고, 저거는 야당이 반대하므로…’라며 알아서 자기 검열을 하더라. 실무자와 장·차관의 역할이 10년 새 뒤바뀐 것 같았다.” 장관 재임시절 그는 늘 ‘여론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관료는 무력하고 방관적인 관료로 전락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일하는 관료는 비판받기 마련이다. 일해서 비판받는 것은 관료의 숙명이라는 게 그의 공직관이다. 옳다고 여기면 밀어붙이는 게 애국하는 길이라고 다그쳤다는 것이다. “관료는 대중의 비판과 비난에 굴하지 않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요즘 그런 관료가 얼마나 될까?

관료 입장에서는 미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게 없다고 여길 텐데.

“미국과 영국인들의 기본적인 심성, 철학으로 식민지 철학(Colonial philosophy)을 드는 이들이 있다. 그 핵심은 따지고 자기주장을 분명히 하는 사람의 말은 인정하고 경청하는데 말 없이 묵묵히 추종하는 사람은 경멸하고 더 깔본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인들은 합리적인 주장을 펴고 논쟁을 불사하는 사람을 더 의식한다.”

미국의 정책금리 인상이 한국경제에 타격을 주리라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그 여파를 어떻게 보나?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3천억 달러를 넘고 있어 미국의 금리 인상이 주는 직접적인 타격은 크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게다가 한국은 달러(자본) 수출국이다. 금리가 오르면 그만큼 이익을 보기도 한다. 또 달러가 빠져나가면 우리에게 플러스 요인이 생긴다. 환율이 올라가는 효과 말이다. 다만 미국 금리 인상은 세계 경제 특히 신흥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게 되고, 이들 시장에 대한 한국의 수출이 줄어드는 건 피할 수 없는 파장이다.”

미국 금리가 오르면 국내 금리도 덩달아 올라 부채가 많은 가계에 큰 주름살을 안긴다는데.

“미국 금리는 보통 0.25% 단위로 움직인다. 많이 올라야 0.5%가 고작이다. 현재 미국 정책금리가 0.25%이므로 기껏해야 0.75%에 오르는 데 그친다. 한국 정책금리 1.25%와는 격차가 여전하다. 미국이 금리를 올려도 국내 금리는 내려야 한다고 보는 이유다. 양국간 금리 격차는 비교적 큰 폭으로 유지된다. 한국의 높은 금리를 보고 유입된 달러로 인해 환율이 낮게 책정되고 수출에 악영향을 줘왔다. 그래서 미국 금리가 올라 설령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더라도 그 자체로 한국에는 플러스가 되는 것이다.”

중국 경제가 전반적으로 둔화된 모양새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 경제의 하락세와 관련해 한국의 수출전략에 어떤 수정이 필요한가?

“대(對)중국 수출의 감소는 불가피한 현실 아닌가. 중국 이외의 아세안 등 타 지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개인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자면 ‘산업 수출’을 들고 싶다. 기존의 상품 수출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역 전략인데 필리핀의 예를 보자. 이곳에서 재배하는 코코넛에서 나오는 주스, 과육, 껍질 등 부산물을 각기 용도에 맞는 상품으로 각각 제작하는 공장들을 세워 하나의 코코넛 산업단지화하는 전략이다. 한국 정부가 동남아 국가에 필요한 공단을 지어주고 한국 기업이 진출하는 방식이다.”

북한 김정은 체제가 경제특구를 증설하고 외자 유치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북한 경제가 개방으로 나올까?

“최근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북한의 ‘장마당 경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성장해버렸다고 한다. 장마당이 커지면 당과 정부의 힘이 약화된다. 배급제도 역시 여의치 않은 것 같고 정부 통제가 안 먹힌다는 증거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우리에게는 좋은 뉴스다. 정치적인 통일은 어렵다 해도 적어도 경제적인 통일로 가는 길은 열린다고 예상해본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의 진짜 수혜자는 일본 은행


▎1. 2015년 1월과 11월 각각 펴낸 강만수 전 장관의 저서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과 그 영문판 <살아남으면 강자가 된다(Survivors become the strong)>. / 2. 강만수 전 장관은 일하는 데서 오는 비판을 감내할 줄 아는 게 관료의 본령이라고 말한다.
강 전 장관은 올 들어 두 권의 저서를 펴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의 극복 과정을 담은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아시아 금융위기에서 글로벌 경제위기까지>(삼성경제연구소)가 2015년 1월 출판됐다. 한국경제의 최대 격변기를 거쳐온 그의 관료 생활의 체험과 교훈을 담은 역작이다. 지난 11월에는 이 책의 영문판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 <살아남으면 강자가 된다(Survivors become the strong)>라는 제목이다. 강 전 장관은 경남고 재학 시절에는 문학도의 길을 걷고자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글쓰기 공부에 매달렸을 만큼 문필가로서의 감각도 갖췄다. 530여 쪽에 이르는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 어디에도 문장을 잇는 접속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고교 시절 읽은 문장론에 나온 ‘시에 접속사가 있느냐’는 대목이 평생 뇌리에 새겨져 있다”면서 “훌륭한 목수는 못을 안 쓰고, 훌륭한 문장은 접속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자신만의 글쓰기 원칙을 소개했다. 그만큼 꼼꼼하게 문장을 다듬고 교열을 거듭한다. 그래서 상상을 뛰어넘는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는 후일담이다.

영문판을 낸 동기는?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는 지구촌에 많은 상처와 함께 교훈을 남겼다. 제로 금리로 기축통화를 아무런 규제 없이 찍어내는 국제금융질서에 대한 불편한 진실도 노출했다. 기존 경제학에 대한 반성도 제기됐다. 내 경험에서 얻은 진실과 교훈을 지구촌 사람들 특히 기축통화국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영문판을 펴냈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 등의 기축통화국과 국제통화기금 등 국제금융기구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영문판을 전자책으로 발행해 중국을 비롯한 보다 많은 나라의 독자와 정책 담당자들이 참고점으로 삼도록 했으면 한다.”

세계 통화시장을 주무르는 국가의 정책 담당자들이 그 책을 봐야 할 이유는 뭔가?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에 직면해보니 그건 영 아니었다. 미국 당신네들을 위해서도, 세계 경제를 위해서도 불합리한 건 고쳐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일본은 자기 마음대로 환율 올리고 돈을 쉽게 찍어내면서 한국에는 엄한 잣대를 들이대 옴짝달싹 못하게 한 게 바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즉, 한국 외환위기의 본질 아닌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의 구제금융으로 누가 누구를 구제했나? 당시 아시아 금융위기의 진앙은 일본이었다. 그게 아시아권으로 퍼져 한국에 직격탄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지원된 IMF 구제금융도 결국 일본을 구제하는 데 쓰였다. IMF로부터 받은 구제금융 500억 달러가 일본 등 선진국 민간은행 부채를 갚는 데 흘러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IMF가 우리를 거쳐 선진국 민간은행을 구제해준 셈이다. 빌려준 돈을 떼인 은행은 스스로가 그 리스크를 떠안아야 한다. 그럼에도 IMF는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 돈 빌려준 선진국 은행을 구제하고자 한국 공적자금을 경유해 선진국에 구제금융을 준 것과 같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지난해 8월 펴낸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기억하는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IMF의 과도한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국내 기업 등 산업자본이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을 폈다.

“나는 외환위기 초기 재경부 차관직에서 물러났기에 외환위기 이후의 정부 대응 과정을 잘 모른다. 다만 2011년 11월 산은금융 회장 시절 영국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우즈베키스탄 법인 인수식에 참석차 현지를 찾은 적이 있다. 바로 직전 우즈베키스탄 대우자동차가 GM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고 하더라. 그 현장을 지나치면서 한국의 대표적 기업이 무너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참 아려왔다. 김우중이라는 걸출한 기업인을 죽이는 건 좀…. 우리에게는 너무나 뼈아픈 상처 아닌가. 저서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을 쓰면서 신장섭 교수와는 여러 번 만나 의견을 나눴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과도 만나보았나?

“수차례 만났다. 언젠가는 김 전 회장측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가 키운 대우조선, 대우건설, 대우증권을 모두 산업은행이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은금융 회장으로 있던 내가 이들 회사 간부를 만나 ‘주인 없는 회사라고 기죽지 말고 세계 1등이 되도록 노력해라. 모든 지원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힘을 실어준 적이 있다. 그 일이 자못 고마웠던지 먼저 연락해 와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감성적 저항의 시대 넘어서야”

8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실은 칼럼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위하여’는 격문, 호소문과도 같은 울림을 줬다. 광복 70년의 대한민국의 여정과 70년의 인생 여정을 나란히 대비해놓은 이 글에서 ‘증오와 저항과 자학의 슬픈 역사 유산에서 벗어나 포용과 법치와 긍정으로 함께 가자’고 했던데.

“40여 년의 공직 여정에서 항상 부닥치는 난관이 논리가 아닌 감성에 기초한 저항이었다. 부가가치세와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고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체제를 개편할 때도 그랬고,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와 싸울 때도 그랬다. 필요한 대책과 논리적인 설득은 항상 야당과 시민단체의 저항과 반대에 고전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럴까’라는 의문을 갖고 많은 고민을 했다. 결론은 우리의 ‘슬픈 역사’에서 찾았다.”

지금 우리가 겪는 혼돈이 불행한 한국 역사의 잔해라는 말인가?

“무능한 왕조가 나라를 빼앗겨 식민통치를 받는 과정에서 동학혁명,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광복 후에는 독재정권 아래서 학생들과 재야단체의 민주화 투쟁이 정의이고 애국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반면 공권력은 불의와 악의 편으로 취급됐다. 대통령이 헌법을 주로 위반했다. 이제는 변해야 한다. 선거로 선택한 민주정부에서는 타협과 다수결, 준법이 선(善)이다. 그래야 문제를 풀 수 있다. 이런 가치관의 전환 없이는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 민주적 제도라는 하드웨어는 쟁취했지만 그 제도를 작동시키는 토론과 다수결에 의한 대의정치의 소프트웨어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일견 투박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직접 만나보면 다정다감하다. 중간에 자르지 않으면 하나의 주제에 한없이 몰입하는 스타일이라 인터뷰 도중 말을 끊는 일이 잦았다. 정책과 소신을 말할 때는 눈빛에 묘한 격정의 불꽃이 이는 듯했다. ‘로 고스’(이성)를 말할 때조차 ‘파토스(열정)’가 느껴지는 관료 의식이라고 하겠다. ‘관료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항간의 얘기를 입에 올렸다가는 무슨 된서리를 맞을지 모를 일이다.

- 글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 사진 오상민 기자 / 녹취 정리 김벼리 인턴기자

201601호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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