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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서울시 전 도시계획국장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한남대교·경부고속도로 착공은 박정희의 강남 개발의지가 담긴 작품” 

글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ins.com
1966년 강북 인구가 포화상태에 달하자 남서울(강남)을 개발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거세져… 개발계획 따라 대형도로 건설, 지하철 2호선 개통, 명문고 이전 후 15년 만에 땅값 2000배 폭등

‘초가집만 몇 채 있고 채소밭이 무성했던….’ 강남 개발의 ‘산 증인’ 손정목(88)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회상한 1960년대의 강남은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 그 땅 위에 지금은 고급 아파트 단지와 빌딩이 가득 들어차 있다. 무엇이 강남을 부촌으로 만들었을까?

200원. 손정목(88)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기억하는 50년 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땅값(3.3㎡ 기준)이다. 그는 1970년대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등을 지내며 강남 개발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초가집만 몇 채 있고 채소밭이 무성했던…”이라며 손 교수는 1960년대의 강남을 돌이켰다. 말 그대로 허허벌판 위에 지금은 고급 아파트 단지와 빌딩이 가득 들어차 있다. 강남을 가로지르는 지하철 2·3호선, ‘강남 3구’로 꼽히는 송파구 잠실부지 개발 모두 그가 재직 시절에 일궈낸 것이다.

2월 3일 서울시립대 중앙도서관 2층 한켠에 마련된 20평 남짓한 그의 사무실에서 서울 강남이 어떻게 부자동네로 탈바꿈했는지 생생한 뒷얘기를 들어보았다.

요즘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오전 9시쯤 전농동 자택을 나선다. 매일 사무실까지 걸어온다. 딱 30분 걸린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하루 종일 책과 신문을 읽는다. 점심은 두유와 모닝 빵으로 해결한다.” 손 교수의 사무실 책장에는 그가 학교에 기증한 1만여 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내년이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그는 그동안 많은 책을 쓰기도 했다.

그동안 출간한 책이 30여 권에 달한다고 들었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 지방제도·자치사 연구>에서 시작해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까지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책을 줄기차게 써왔다. 지난해에는 3·15부정선거를 다룬 <손정목이 쓴 한국 근대화>를 출간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못 낼 것 같다. 내년이면 벌써 아흔 나이다. 더 쓸 여력이 될까 싶다. 다만 세상 돌아가는 데는 여전히 관심이 많다. 일제강점기 시절 다닌 중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는데 아침마다 배달 오는 요미우리 신문도 꼼꼼히 읽는다.”

1966년엔 압구정동 땅 한 평이 ‘짜장면 10그릇 값’


▎1970년대 초 강남의 모습. 강북의 대표적인 고급 주택가인 신당동은 3.3㎡(평)당 가격이 3만원이었던데 비해 당시 압구정동과 신사동은 400원에 불과했다.(좌) / 강남 개발초기인 40년 전만 해도 강남은 주거지로 인기가 없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논현동에 공무원아파트를 지어 공무원이라도 이주시키려고 노력했을 정도였다.
강남개발 구상이 처음 나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1966년 남서울, 그러니까 지금의 강남을 개발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강북이 인구나 토지나 모두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지휘 아래 그해 1월 중순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착공됐다. 2년 뒤엔 이 다리와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가 공사에 들어갔다. 이 두 사업이 강남 개발의 출발점이었다. 땅값이 폭등한 계기이기도 했다.”

누구 아이디어였나?

“고 박 전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 한강 아래에 고속도로를 만들 생각은 그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못했을 것이다. 1970년만 해도 자동차 수가 2만 대도 채 안 됐다. 단 한 대도 등록이 안 된 동네가 수두룩했다. 이런 상황에 고속도로를 만들 생각을 누가 했겠나?”

고속도로 건설을 강남 개발용으로 봐도 되나?

“그렇다. 고속도로와 같은 대규모 교통 인프라가 들어서면 주위에 주택과 상가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서울 인구가 6·25 때보다 두 배가량인 300만 명이 넘었는데 다리는 제1한강교(한강대교)와 광진교 두 개뿐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군대나 피란민을 어떻게 옮길지 고민이 컸다. 그 결과가 1966년 1월 19일 한남대교 착공이다.”

한남대교는 지금 기준으로도 규모가 크다. 피란이나 군사 이동을 감안해 그렇게 설계한 건가?

“그건 아니다. 원래 4차선, 20m 너비로 설계됐다. 그런데 기초공사까지 마친 상태에서 육군대령 출신인 서정우 건설부 국토보전국장이 6차선, 26m로 넓히라고 지시했다. 그 무렵 북한에서 평양 대동강에 너비 25m짜리 교량을 건설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1m라도 더 넓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들 ‘비경제적이며 오히려 폭격이 집중될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때는 북한과의 경쟁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결과적으로 이때 확장한 덕분에 훗날 경부고속도로 교통량을 감당할 수 있게 됐다.”

강남 땅값도 그때부터 오르기 시작한 건가?

“그렇다. 한남대교 착공 당시 신사동 땅값은 3.3㎡(평)당 200원 정도였다. 당시 강북의 대표적인 고급 주택가는 신당동이었는데 거긴 3.3㎡(평)당 가격이 3만원이었다. 압구정동과 신사동은 각각 400원쯤 했고. 이때가 짜장면 한 그릇에 40원 하던 시절이다. 그러니까 짜장면 열 그릇이면 압구정동에 땅 한 평을 살 수 있었던 거다. 착공 후 1년이 지나자 압구정동이 3.3㎡(평)당 3000원으로 뛰더라. 말죽거리(양재) 일대는 약 4000~5000원에 거래됐다.

압구정동은 홍수 때마다 침수되는 지역이라 그때만 해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양재동이 그래서 더 비쌌다. 압구정동 땅값은 2000원~3000원대로 양재동의 절반 가격이었는데도 아무도 안 샀다. 강남 개발이 거의 마무리된 1979년 신당동은 3.3㎡(평)당 50만원, 압구정동은 35만원, 신사동은 40만원 하더라. 그러다 1980년 들어 강남 땅값이 역전했다. 15년간 강북 땅값이 15배 뛰었는데 강남은 2000배 뛴 거다.”

서울시 고위공무원이 ‘땅투기’로 정치자금 마련


▎손정목 교수는 강남 개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인에 대해 “지하철 2호선이 강남 개발의 촉매제가 됐다. 지하철이 생기면서 강남의 대중교통망이 연결됐다”고 평가했다.
1970년대도 땅투기가 심했나?

“1960년대 초반에 이미 땅 수십만 평을 사 모은 사람이 있었다. 종로구에 사는 김형목과 조봉구라는 사람이었다. 김형목은 주로 선릉을 중심으로 청담·삼성·대치동 땅을 3.3㎡(평)당 90~120원씩 40만 평(※이하는 당시 통용되던 평으로 단위를 표기함) 구입했다. 주로 구(舊) 왕실 재산이었다. 조봉구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주로 샀는데 역삼·도곡동에 집중했다. 등기로는 37만7400평이 등록돼 있었는데 실제로는 60만평 정도 된다고 들었다.

김형목이 누군가 하면 훗날 영동백화점과 영동고등학교를 설립한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 강남구청 자리도 그가 서울시에 기증한 땅이다. 강남교육청·강남도서관·구 영동백화점 주변의 논현동 일대, 강남구청 뒤 해청아파트, 청담동 청실·홍실 아파트 자리 등이 전부 김형목의 땅이었다. 조봉구는 건설회사 삼호를 창업했다. 역삼역 근처 삼호아파트, 개나리아파트, 삼호쇼핑센터 등을 지었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현금이 제일 많은 사람으로 1~2위를 다퉜다. 소위 ‘복부인’도 이때 나타났다. 하지만 진짜 큰손은 따로 있었다.”

그게 누군가?

“윤진우. 내 직전의 도시계획국장이었다. 그가 수십만 평 단위로 땅을 사면 나머지 자투리땅 수백~수천 평을 복부인들이 사는 식이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 땅투기를 했다는 말인가?

“정치적 사정이 있었다. 1970년 초 그가 강남 일대 땅을 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박종규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였다. 그때 24만 평을 구입한 뒤 18만 평을 다시 팔았다. 윤 국장이 땅을 싸게 사들였다가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식이었다. 그렇게 20억원, 지금으로 치면 5000억원 넘는 돈을 마련했다.

이 자금이 1971년 대선과 총선 정치자금으로 쓰였다고 하더라. 안 팔고 남은 땅 6만2000평은 김성곤(쌍용 설립자)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에게 줬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대치동 쌍용아파트 자리다.”

여권 실세에게 좋은 땅을 상납한 건가?

“청와대가 땅 살 돈을 넉넉하게 준 건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땅 살 때 김성곤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은 땅을 준 것 아닐까? 물론 이건 내 추측일 뿐이다. 그런데 그 땅이 좋은 땅은 아니었다. 2000평은 테헤란로 1급지였지만 나머지 6만평은 대치동 돌산이었다. 당시엔 ‘저 땅을 쓸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구제불능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심각한 골재(자갈·모래) 부족현상이 벌어졌다. 그때 대치동 돌산을 중장비로 깨서 1급 골재로 썼다. 그리고 이 터에 쌍용아파트를 지은 거다. 요즘도 대치동 지나가면 그때 생각이 많이 난다.”

전임자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나?

“나와 동향(경주) 사람인 데다 모교 선후배 관계다. 1995년에 그가 서류 한 보따리를 갖고 나를 찾아왔다. 그가 사고판 땅 매매 서류더라. 거기에 모든 비밀이 담겨 있었다.”

본인은 그런 일은 안 했나?

“1974년 유신개헌 후 민심이 뒤숭숭하고 사회 불만이 높아지니 정부가 국민 관심을 돌리려고 고급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을 했다. 윤 국장은 이때 퇴출됐다. 본인은 큰 상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대단히 서운했을 거다. 윤 국장 퇴출 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게 나다. 윤 국장 이후로는 청와대에서 더 이상 그런 주문이 없었다.”

공무원으로 한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잠실 개발이다. 1972년 섬이었던 잠실에 쓰레기를 매립해 육지와 연결하고 택지와 종합운동장 부지로 만들었다. 당시 건축부지를 최소면적 50평, 건폐율을 40%로 제한했다. 50평 가진 사람이 집 지을 때 집 면적이 20평이고 나머지 30평은 정원 만들거나 차고로 이용하게 한 것이다.

오늘날 강남 건물이 다른 구에 비해 여유가 있는 데다 고급주택으로 채워진 건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당시 비난도 많았다. 당시 1인당 소득이 310달러에 불과했고 주택난이 심각했다. 1가구당 주거 평균 면적이 10평 남짓할 때다. 경제 실정을 모르는 조치라고 욕을 많이 먹었다.”

“지하철 9호선, 2·3호선과 상당한 보완관계”

처음부터 고급 단지로 조성했으니 부자들이 너도나도 강남에 입주했겠다.

“아니다. 다들 강남에 안 오려고 해서 고생했다. 오죽했으면 논현동에 공무원아파트를 지어 공무원이라도 이주시키려 했겠나. 강남을 개발해 사람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 1972년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이 학군 이동 아이디어를 냈다. 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 등 5개 공립고와 중앙·양정·배재·휘문·보성 5대 사립고가 당시 명문이다. 여학교로는 경기·이화·숙명·창덕·진명·정신을 알아줬고. 모두 종로구나 중구에 있었다. 이 학교들을 모두 강남으로 이전시키는 구상이었다. 그러면 인구가 이동하며 강남 개발이 빨라질 것으로 보았다.”

저항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여론 주도층이 모두 동문이라 어려움이 많았다. 지배층의 추억과 향수가 배어있지 않나. 그들의 부인도 다들 그곳 출신이었다. 한국의 동문과 재학생은 물론 재외동문까지 나서서 반대했다. 엄청난 파워였다.

경기고의 저항이 가장 심했는데 결국 화동(이전 전의 위치)의 교사(校舍)는 허물지 않고 말끔하게 개수해 도서관으로 쓰고 교정도 단장해 도서관 뜰로 남긴다는 확약을 해주고서야 1972년 10월 삼성동 이전을 발표했다. 당시 경기고 땅은 1만1000평이었는데 이걸 3만2250평으로 보상해주고 새 건물을 지어준다는 조건도 추가했다. 아마 유신시절 중앙 정부의 유일한 패배였을 거다.”

강남 개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뭔가?

“지하철 2호선이다. 2호선이 생기면서 강남의 대중교통망이 연결됐다. 2호선 탄생 과정을 보면 지금 생각해봐도 당황스러울 정도다. 당시 구자춘 시장이 어느 날 각 국·과장을 모아 놓고는 갑자기 2호선 착공을 지시했다. 서울시 지도를 펼쳐 놓더니 서울시청에서 시작해서 큰 타원형의 지하철 노선을 그리더라. ‘영등포도 들어가야겠지, 여기도 들어가야지’ 하면서…. 굉장히 즉흥적이었다.”

즉흥적이긴 했지만 성공한 것 아닌가?

“군 출신이라 그런지 추진력이 있었다. 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나는 그때 반대했다. 순환선은 시기상 이르다고 생각했다. 2호선이 강남 고속터미널을 안 지나가지 않나. 너무 빨리 만들어서 그렇게 된 거다. 그걸 3호선이 뒤집어 썼다. 압구정동에서 바로 양재 쪽으로 빠지는 직선 코스를 놔두고 엉뚱하게 신사·잠원·반포를 거쳐 가는 곡선형이 됐다.”

강서와 강남을 잇는 지하철 9호선의 2단계(언주역~종합운동장역)가 지난해 만들어졌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옛날에 워낙 즉흥적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엔 지하철을 수요에 맞게 굉장히 체계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지하철 9호선을 직접 타보진 않았지만 (교통수단으로서) 2·3호선과 상당한 보완관계에 있는 것 같다.”

강남 개발로 돈 번 사람이 많다. 손 교수도 온갖 정보를 쥐고 있지 않았나?

“난 평소에도 강직한 성격이다. 게다가 공무원 신분으로 터득한 정보를 이용해 돈을 버는 건 부당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추후라도 들켰다면 아마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물론 돈 가방을 싸 들고 와서 정보를 알려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직접 땅을 사지도 정보를 돈 받고 팔지도 않았다. 돈벼락 맞으면 반드시 결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강남의 대표적 땅부자들도 그렇게 행복한 노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김형목은 자식 문제로 속을 썩였고, 조봉구도 삼호가 파산한 뒤 미국의 작은 원룸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하더라. 인생이 그런 거다.”

- 글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ins.com

201603호 (201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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