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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의 파.스.텔. 인생②] 괴테와 연암 박지원 

중장년 나이, 길 위에서 만난 ‘새로운 인생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
인생의 변곡점에 선 그대, 가방을 들어라! 익숙함과 이별해야 자기만의 색채 가질 수 있다

▎괴테와 연암 박지원은 닮은 점이 많다. 동시대(18세기)를 살았으며, ‘북위 40도’ 지역에서 살았다. 한 사람은 남으로, 한 사람은 북쪽으로 꿈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의 전형이다. / 사진제공·손관승
나는 요즘 가방과 함께 다닌다. 제 2의 인생을 살면서 확실히 바뀐 것 가운데 하나다. 강연을 위해 출장이 잦은 나에게 가방은 나의 숨은 비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친구이다. 최근 작고한 헝가리 작가 케르테스 임레(헝가리는 한국처럼 성이 앞에 온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늘 가방을 옆에 두고 있어야 하는 나의 삶이 그리 유감스럽지는 않다.”

나치 시대 유대인들이 그러했듯 그는 이방민족의 후예로 쫓기듯 어디론가 이동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그의 문학의 탯줄이었고, 가방은 그의 문학을 상징하는 주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다. 나에게도 가방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휴대품과 노트북 컴퓨터 등을 넣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다. 강연을 위해 떠날 때 강연 내용을 파워포인트에 담아 넣어가지만, 돌아올 때는 그보다 훨씬 색다른 이야기가 가방 안에는 채워져 있다. 가방은 스토리텔러에게 어쩔 수 없는 플랫폼인 셈이다.

전설적인 독일의 여배우이자 가수였던 마를렌 디트리히(1901~1992)는 생전에 “나는 베를린에 가방을 하나 두고 왔다(Ich habe noch einen Koffer in Berlin)”라는 유명한 노래를 남겼다. 여기서 말하는 가방이란 추억과 사랑, 열정, 비밀, 애절함 같은 것을 의미하는 하나의 메타포다. 두고 온 가방을 찾으러 간다는 핑계로 다시금 그 도시를 찾게 만드는 동력, 가방이란 그런 매력이 있다.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나는 함께 일하던 직원들로부터 하나의 배낭 가방을 작별 선물로 받았다. 그동안 에너지가 완전 소진되었을 테니 이 가방을 갖고 훌훌 떠나서 여행을 한 뒤 그 안에 새로운 스토리를 가득 담아와 달라는 의미였다. 그 가방을 들고 어디로 갈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두 사람의 가방과 행장이 떠올랐다. 괴테와 연암 박지원의 여행 가방이었다.

새로움과 배움을 담아내는 인생 여행의 동반자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하우스 내부. 괴테는 숨을 거둘 때까지 이곳에서 글을 쓰며 지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 사진제공·손관승
인생이 막막한가? 그러면 우선 독일의 바이마르로 가봐야 한다. 하나뿐인 인생, 완전연소하고 싶은가? 그러하다면 역시 바이마르로 떠나야 한다. 그곳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친구 괴테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괴테는 세상 그 누구보다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스스로의 약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도무지 약점을 보여주지 않고 실패해본 적이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금방 지루해진다. 감동도 없다. 혼자 잘났다는 원맨쇼일 뿐,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공감이란 실수와 실패,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기 마련인 고통과 상처, 인간적 외로움 같은 것들을 솔직히 보여주고 공유함으로써 생기지 않던가. 늘 성공가도를 달리기만 하는 사람 주변에는 그의 후광과 영향력에 기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친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해관계에서 해방된 사이, 약점도 보여줄 때 비로소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괴테를 가리켜 좋은 친구라고 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솔직하게 약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 배우기를 멈추지 않고, 성장하기를 중단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괴테였다.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일이다. 우선 솔직해야 배울 수 있다. 많은 분야에 걸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천재소리를 듣던 그였지만, 만년의 그는 이렇게 항변한다.

“사람들은 나를 특별히 운이 좋은 행운아라고 추켜세워주고는 했네. 나 또한 불평할 생각은 없고, 내 인생 역정을 탓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의 삶은 힘들게 노력하고 일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네. 그것은 바위를 끊임없이 굴리면서 계속해서 밀어 올리려는 시도였네.”

괴테만큼 유명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잘못 알려진 작가가 세상에 또 있을까? 독일문화원의 이름을 ‘괴테 인스티튜트’라 명명할 정도로 독일을 대표하는 얼굴이지만 우리가 아는 괴테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이름은 잘 알고 있지만 정작 그의 작품은 별로 읽어본 적이 없는 작가, <파우스트>처럼 어렵고 머리만 잔뜩 아프게 만드는 작가가 바로 괴테다. 조금 더 안다는 사람들조차 연애박사, 혹은 여러 방면에 걸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천재로 알 뿐이다.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독일에서 공부도 하고 특파원으로 근무도 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 오랫동안 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괴테가 아니라 죽어있는 괴테만 알고 있던 것이다.

괴테가 매력적인 것은 천재여서도 아니고, 성공한 인간이어서도 아니다. 그는 마치 자전거 타는 사람이 두 발을 열심히 저어 앞으로 향하는 것처럼 평생 자기학습을 멈추지 않았다. 만년에 접어든 괴테는 자신을 찾아온 제자 에커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항상 깨닫게 되는 것인데, 뭔가를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네.”

괴테와 달리 많은 사람은 언젠가부터 학습과 배움을 멈췄다. 가방 들고 다니기를 멈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인이 무엇을 모르는지 둔감하다. 분명히 옛날에는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만나보니 전혀 매력 없는 인간으로 변해 있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사회적 잣대로는 분명 성공한 사람인데, 정신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않고 발전도 없다. 단지 오래된 명문학교 졸업장이나 자격증 한 장의 후광에 기대어 평생 의존하는 삶이다. 노력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특히 갑(甲)의 위치에 있다 보면 더욱 그러하게 된다. 두 명 이상의 갑을 만나면 나는 ‘갑갑(甲甲)하다’고 말한다. 두 겹의 갑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답답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명함이 멋지고 타이틀이 훌륭해도 전혀 부럽지 않다.

쇼윈도를 깨고 괴테의 꿈을 좇아간 여행


▎괴테의 집 입구 바닥에는 ‘살베’, 환영한다는 뜻의 라틴어 목판이 붙어 있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직후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 사진제공·손관승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쩌면 그것은 오랫동안 나의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주류 언론사의 기자로, 또 CEO로 재직했다는 것은 한국에서 대표적인 갑의 모습으로 인식되지 않던가. 자유인이 되는 데 가장 큰 적은 급변하는 경제 환경이나 기술이나 자본 부족이 아니다. 갑에 익숙해진 태도다. 어느새 스스로 문제 해결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갑의 위치를 박차고 나오기란 여간 쉽지 않다. 남에 의해 강제로 떠밀려 나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기 발로 걸어 나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인생의 길을 찾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대부분 결국은 명함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지 못한다. 남이 인정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쇼윈도(Show window) 행복’, 즉 보여주기 위한 삶이다. 솔직히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익숙해진 탓이다.

반면에 갑의 위치를 반납해 스스로 인생의 변곡점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 그런 희귀하고도 신선한 영혼과 감성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나는 ‘파스텔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괴테가 바로 그런 경우다. 내가 그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가 쓴 <이탈리아 기행> 한 권을 들고 먼 길을 떠나면서부터였다. 바이마르 괴테 하우스에 유명한 문구가 있다. 유념하지 않으면 자칫 놓치기 쉽다. 그 문구는 괴테가 거주하던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신발을 터는 곳에 놓여 있으니까.


▎1년 8개월간의 여행은 괴테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괴테가 쓴 <이탈리아 여행> 영문판 표지.
“Salve!”

‘환영합니다!’, 혹은 ‘어서 오세요!’란 뜻의 라틴어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직후 걸어놓은 글이다. 1년 8개월에 걸친 그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 개인에게 그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중요한 여행이었고, 서양문화사적으로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위대한 여행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자기학습의 여행이었다. 명성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그는 굳이 그런 모험을 감행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25세의 나이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써서 서양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그 유명세에 힘입어 바이마르 공국의 고위직에 발탁되었으며, 10년 이상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니까. 군주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었으니 평생 탄탄대로가 보장되었던 괴테였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의 전환점을 스스로 만들었다.

“새벽 3시, 아무도 모르게 칼스바트를 빠져나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내가 떠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이렇게 시작되는 저 유명한 <이탈리아 기행>은 세계 최고의 기행문이다. 스토리텔링의 전형을 보여주는 멋진 문장이다. 스토리텔링이란 흥미진진 몰입하게 만드는 이야기 서술 방식이다. 지루하면 곤란하다. 마치 남녀가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에 크게 좌우되듯, 문장도 그러하다.

대표이사 임기가 끝나고 거리로 나섰을 때, 몇 가지 제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 제안들을 뿌리치고 괴테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자칫 영원한 실업자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미쳤다고 했다. 그래, 나는 미쳐 있었다. 로마를 향해 떠났던 괴테도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던가!

“너는 옛날에 미쳤거나 아니면 지금 미쳐 있다.”

오랜 기자생활과 대표이사를 재임하는 동안 나는 일에 미쳐, 성공에 미쳐 있었다. 주말도 없고, 가족들과의 시간도 잊었다. 세상에는 중독이 많지만 약물중독,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실 성공 중독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모임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넘치면 독이 된다. 이른바 사회독(社會毒)이다. 뭔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혼자가 되어보아야 한다. 홀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괴테는 과감히 길을 떠났다. 가명과 익명을 사용했다. 로마에서 괴테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나는 로마에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괴테는 남으로, 연암은 북으로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괴테의 집’.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 중 머물렀던 곳이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중 첫 관문인 말체시네(Malcesine)에는 1786년에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한 괴테의 흉상이 서 있다. / 사진제공·손관승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과 그 흐름이 완벽하게 바뀌게 되는 지점을 가리켜 인생의 변곡점이라 부른다. 괴테에게 그것은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그 이전과 이후, before와 after로 나뉘는 여행, 괴테처럼 나도 그런 인생의 변곡점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그런 마음으로 괴테의 발자취를 따라 떠났던 여행이었다.

바로 그때 내가 괴테와 함께 만난 인물이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괴테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제목은 유명해도 <열하일기>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단지 북학파의 일원, 시대의 비극적 지식인 정도로 이해할 뿐이다. 그가 왜 서울을 떠나 황해도의 궁색한 계곡마을 ‘연암’이란 곳에 살았는지, 그래서 결국은 연암이란 호가 바로 그 동네에서 연유되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위기는 말없이 찾아온다. 진정한 위기는 잘나갈 때 오히려 찾아온다. 자기 확신이 가장 무섭다. ‘중년의 위기(Middle Age Crisis)’라 부르는 위기는 어느 날 불쑥 출근하는 내 집 앞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한다. 갑자기 의욕이 없어지고 활력을 잃는다. 그것을 가리켜 번아웃(Burn-Out)이라 부른다.

괴테(1749~1832)와 연암(1737~1805), 그들은 동시대의 인간이다. 그들은 같은 시기 먼 길을 떠났다. 한 사람은 37세의 나이에 서양 문화의 중심인 로마를 향해 남행(南行),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44세 나이에 동양 문화의 핵심인 베이징을 향해 북행(北行)하고 있었다. 각각 Go South, Go North로 방향은 달랐지만 중년의 위기와 정신적 번아웃 상태에 있었다는 점에서 같았다.

마흔네 살의 남자 연암은 6년이란 시차를 두고 북위 40도에서 괴테처럼 글을 쓰고 있었다. 이미 동시대 자기 주변의 인물들보다 탁월한 지식과 문장으로 유명했지만, 벼슬을 거부했다. 조선의 양반들, 갑(甲)들의 행태에 좌절하고 있었다. 갑갑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 형님이 이끄는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춘추절(황제의 70세 생일) 축하 사절단에 끼게 된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그는 마치 가뭄 뒤의 비를 만난 나무처럼 마음껏 세상을 빨아들이고자 하였다. 잠시 연암이 꾸렸던 행장(行裝)을 살펴볼까.

“마부 창대는 앞에서 견마를 잡고, 하인 장복은 뒤에서 분부를 받들었다. 말안장에 달린 두 개의 주머니에 왼쪽은 벼루, 오른쪽은 거울, 붓 두 자루, 먹 하나, 작은 공책 네 권, 이정(里程, 거리)을 기록한 두루마리가 들었다. 행장이 이렇게도 가벼우니 국경의 짐 검사가 제아무리 까다롭다 하더라도 염려할 것이 없었다.”

연암과 괴테는 참으로 공통점이 많은 인물이다. 괴테 역시 출발할 때 마차에 실린 것이라고는 여행 가방 하나와 오소리 배낭 하나, 몹시 단출했다.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문장력을 갖춘 데다, 호기심이 남달랐고,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할 줄 알았다. 요즘 우스개로 말하는 ‘적자생존’, 즉 적어야 살아남는다는 정신에 투철한 작가들이었다. 뛰어난 머리보다 짧은 몽당 연필 한 자루가 낫다는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다. 평생에 걸쳐 매일 평균 두 병의 와인을 즐겼다던 괴테처럼 연암 역시 대단한 애주가였다. 조선 돈 스물여섯 푼으로 작은 호리병에 술을 사오게 한 뒤, 먼 길을 떠나는 안전을 기원하며 홀로 쓸쓸하게 술을 마시는 연암의 모습은 처연하기만 하다.

자아를 찾아 목숨을 걸고 떠난 여행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왼쪽)는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기행문으로 꼽힌다. 그는 청나라 황제 건륭제(그림 가운데)의 70회 생일잔치 축하 사절단으로 북경을 다녀오면서 조선 사대부들의 편협함을 비판했다. / 사진제공·손관승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여행길은 지금과 달리 낭만적인 그런 풍경이 아니었다. 괴테가 알프스를 넘어 남쪽 나라로 갈 때 만약을 대비해 호신용 권총을 늘 휴대할 정도로 산적과 강도가 출몰하던 시대다. 훗날 괴테의 아들이 아버지처럼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가 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를 다쳤으며, 결국 그 후유증의 여파로 낯선 도시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당했다. 그 정도로 당시의 도로사정과 교통수단은 열악했다. 틈만 나면 마부의 행패에 웃돈을 줘야 했고, 새로운 곳에 들어갈 때마다 통관 명목으로 담뱃값을 요구하는 세관원과 지루한 신경전을 펼쳐야 했다. 숙소와 화장실 같은 것도 현대의 호텔 수준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때로는 거의 자연수준으로 해결해야 했다.

연암 시대의 사절단의 여행 역시 반 목숨을 건다고 할 정도로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수도를 향해 떠났던 조선의 사신단 가운데 몇 명은 사고 혹은 병으로 객사하곤 했다. 조선 중기 무렵의 문신이었던 안경(1564~?)이란 사람은 오죽했으면 유언을 통해 이런 말을 남겼을까.

“후손들에게 문과 급제를 시키지 말라!”

문과 급제로 벼슬을 해보았자 목숨을 걸고 중국의 수도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에 다녀올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괴테가 이탈리아를 향해 알프스를 넘을 때 언제나 허리춤에 호신용 권총을 숨기고 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이처럼 고난의 연속인 여행이었지만, 그들은 떠났다. 그만큼 호기심에 불탔고 단 한번뿐인 인생, 세상을 보고 싶었다. 단순히 즐기러 간 관광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진 필생의 자기학습 여행이었다. 연암은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이국의 풍경과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범상치 않은 시선과 붓끝으로 담아냈다.

“나는 말 위에서 패도(佩刀)를 뽑아 갈대 하나를 베었다. 껍질이 단단하고 속살은 두터워 화살을 만들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지만, 붓의 대롱으로 쓰기에는 적합했다.”

패도란 휴대용 작은 칼이다. 그는 당시 조선인의 눈으로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있다. 답답한 조선의 현실에서 벗어나 세계를 호흡하려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친구들이 연암에 앞서 북행(北行)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기 때문에 그의 호기심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피를 토하듯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의 지독한 가난은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이 전적으로 선비가 제 역할을 못한 데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선비란 당대의 갑(甲)들을 말한다.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고, 자기들만의 리그에 둘러싸인, 갑갑한 사람들이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보이지 않는 카르텔 속에 그들은 익숙해지고 있었다. 남에게는 대단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과 그 안에 속한 이너서클(inner circle)에는 너무도 너그럽고 너무도 관대한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었다. 고무줄처럼 아주 편리한 규칙이다.

연암이 지적한 선비의 역할, 그것은 지금의 지식인, 공직, 각 분야의 리더일 수도 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수의 갑과 대화하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그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그 자리를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다. 왜? 달콤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콤한 사탕과 초콜릿을 즐기다 보면 치아가 서서히 상하듯이, 정신과 영혼이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채 조금씩 썩어 들어간다. 갑갑해지는 것이다.

만약 연암 박지원이 없는 18세기 후반의 역사를 읽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허전하고 답답할까? 마흔네 살의 남자는 그토록 외로웠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술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연암은 자기와 함께 떠난 사절단의 선비들, 즉 갑들에 대해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옷이 승복(僧服)같다 하여, 조선 사람만 보면 걸승(乞僧)이라고 조롱하는 것을 모르며, 또한 겨울에 찬바람이 드는 갓을 쓰고, 눈발이 들이치는데도 부채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비웃는 것도 모른다.”

괴테와 연암의 자유정신

연암이 후세의 존경을 받는 것은 편협한 국수주의자가 아니었고 타자(他者)의 시선으로 나와 우리를 바라볼 줄 알았기 때문이다. 객관이란 이름의 눈이다. 진정한 의미의 국제주의자,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괴테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인은 독수리와 같네. 독수리는 온 지방을 자유롭게 내려다보며 날아다니는데, 붙잡으려고 하는 토끼가 프로이센 지방에서 뛰놀건 작센 지방에서 뛰놀건 독수리에겐 마찬가지라네. 그런데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이고 애국적 활동이란 또 무슨 의미일까? 시인이 평생토록 해로운 편견과 싸우고 편협한 견해를 제거하고 국민정신을 계몽하고 국민의 취향을 순화시키고 국민의 성향과 사고방식을 고상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면 그 이상 어떻게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괴테는 ‘세계문학’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다. 짧은 잠언으로 이뤄진 아포리즘의 대가다. 글과 말이 직업인 나에게도 그는 진정 어린 충고를 잊지 않는다.

“대작에는 손을 대지 말도록 유의하게. 바로 그것 때문에 대가들도 고생하는 거네. 그리고 더없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각고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도 고생하는 거라네. 나 역시도 그것 때문에 고생했고, 그것이 나 자신에게 손실을 가져왔다는 것도 깨달았지. 대작에 몰두하느라 얼마나 많은 일이 수포로 돌아가버렸던가! 만일 내가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만 했더라면 아마 백 권의 책도 모자랄 정도였을 걸세.”

연암과 괴테는 세상의 그 누구 못지않게 탁월한 능력을 가졌고,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뻔하고 고리타분한 인생의 경로를 거부했다. 그들은 왜 편안한 갑의 입장을 버렸을까. 창조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남과 같은 삶, 규격화된 인생은 창조적 사고의 적이었다. 그들이 매력적인 것은 여기에 있다. 에커만은 1823년 6월 10일 바이마르에서 괴테를 만난 뒤 감격에 벅차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

회사를 나와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괴테와 연암을 만났다. 많은 것과 작별해야 했지만, 소중한 것을 얻었다. 모두 두 사람 덕분이다.

갑갑한 인생이 싫은가? 그러면 괴테와 연암 박지원을 만나자. 그들은 우리가 궁금했던 것을 먼저 궁금해하고 있었고, 우리가 간절해하는 것들을 이미 원하고 있었으며, 길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린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진짜 승부는 시작된다. 조직에서 나와 춥고 냉혹한 툰드라 같은 사회의 한복판에 홀로 서야 한 인간의 진짜 실력과 능력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이때의 실력이란 한마디로 “자기의 삶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능력”을 말한다. 조직이 정하고 상사가 지시한 일을 수행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할 수 있는 때이니까. 내 스타일, 나의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는 때다.

파스텔 인생이란 스스로 운명의 변곡점을 마련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의 멋은 가방으로 완성된다고 하던가. 남다른 가방을 의미한다. 찬란한 봄이다. 나만의 색, 나만의 스토리로 가득한 가방을 들고 훌쩍 떠나보면 어떨까.

손관승 - 세한대학교 교수. MBC 기자와 베를린특파원, 국제 부장 등을 거쳐, iM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중앙대학교에서도 미디어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괴테와 함께 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ceonomad@gmail.com

201605호 (20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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