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유럽의 해방자 나폴레옹과 그의 문화 홍위병 다비드 

공화국 이념의 중핵이던 국민화가가 황제 일대기를 그린 역사의 아이러니... 루브르 75호실은 황제와 화가, 밤의 여왕, 바티칸 교황이 공존하는 성찰의 공간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왼쪽). 들라크루와의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인기 순위 넘버 5 안에 들어간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세상에 비쳐지는 나의 모습은 어떻고, 나의 언행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세월이 흘러갈수록 잦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던지는 자문(自問)이다. 열심히 살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세상에서 노력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름대로의 명분과 이유를 통해 세상이란 무대 위에서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답을 구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스스로를 주장하는 시기를 청년기라고 할 때,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순간은 장년기 어디쯤에 해당되지 않을까? 말하고 보여주기에 주목한다면 청년기, 듣고 관찰하기에 주력한다면 장년기다. 언제부턴가 청년기와 장년기는 나이를 초월하고 있다. 밖으로 외치는 목소리가 있는 한 여든 살이 넘어도 청년기다. 안으로 삼키고 채우는 세계관이라면 20대라도 장년기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세상을 보면 장년기보다 청년기에 머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자신감 넘치게 살지만, 불만을 터뜨리고 세상을 탓하는 분위기도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유아기 어디쯤에 있는 환갑 노인도 등장하는 판이다. 시류는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이다.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인터넷은 그 같은 천동설 세계관을 지지하는 중요한 도구로 전락해가고 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어디로…’ 같은 자문은 쓸데없는 시간낭비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객관으로서의 자아(自我)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라는 경구를 통해 하늘을 무서워하고 의식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독백으로 읊조려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다. 부딪치며 살아가는 동안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정신적·육체적·공간적으로 혼자가 되는 순간 자아탐색에 대한 노력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와 갈릴레오를 믿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안식처가 하나 있다.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면, 영혼의 장소(Spiritual Spot)다. 종교적 차원으로 보자면, 성지 순례지인 이스라엘 예루살렘이나 스페인 산티아고와 통하는 곳이다. 유럽에 갈 경우 한 번쯤 들르게 되는 이탈리아 베니스가 주인공이다.

베니스의 중심은 산 마르코(St. Marco) 광장이다. 이슬람·인도·중국과 유럽을 엮은 해상대국 베니스의 1000년 역사가 산 마르코 광장 주변에 집중돼 있다.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라고 말한 곳이 산 마르코 광장이다. 그 자체가 유럽 역사의 축소판이다. 건물·벽화·조각·종소리 그 모든 곳에 역사와 문명 그리고 문화가 새겨져 있다. 산 마르코 광장 한가운데 서서 천년왕국의 흔적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찰’당한다는 느낌을 주는 산 마르코 광장


▎노트르담 성당에서 이뤄진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모습. 다비드의 1805년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산 조르지오 마기오레 (San Giorgio Maggiore, 이하 산 조르지오)는 산 마르코 광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 객관적 차원의 나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산 마르코 광장에 대한 이해는 산 조르지오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지에 달려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산 조르지오는 산 마르코 광장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베니스에 들르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하루 종일 산 마르코 주변을 맴돌다가 떠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정작 산 조르지오를 기억하거나 체험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바다를 사이에 둔 섬이기 때문이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남쪽으로 약 300m 정도 떨어진 작은 섬의 이름이 산 조르지오다.

항상 느끼지만, 산 마르코 광장에 서 있으면 반대편의 산 조르지오의 누군가로부터 ‘관찰’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듯하다. 섬에 머문 사람, 섬의 한가운데에 ‘떠 있는’ 산 조르지오 교회, 섬과 교회를 지키는 신(神)…. 누군지 모르지만 나를 지켜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20여 년 전 산 조르지오에 처음으로 간 이유는 바로 그 같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광장 바로 앞의 2번 보트를 타고 2분 거리의 산 조르지오로 향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손을 뻗치면 바로 닿을 수 있도록 바로 옆에 두고 평생 감싸 안으려는 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맞은편 정면에서 지켜보는 방식이다. 대부분은 바로 옆에 두려고 할 것이다. 사랑하기에 가까이 둔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가까울수록 스스로의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산 조르지오는 ‘맞은편 정면의 존재’에 무게중심을 두려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의 가면축제나 곤돌라 시승은 청년기의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다. 산 조르지오에서 보면 산 마르코 광장이 180도 파노라마로 들어온다. 유럽과 비잔틴 대제국을 연결한 천년왕국으로서의 청년기가 산 마르코 광장이라고 할 때, 산 조르지오는 어제의 번영과 영광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장년기의 무대처럼 느껴진다.

복잡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인파 속의 산 마르코 광장과 달리 300m 떨어진 산 조르지오는 침묵 그 자체의 무대다. 조금 과장하자면 속(俗)으로의 산 마르코와 성(聖)으로서의 산 조르지오로 대별될 듯하다. 갈매기의 울음소리조차도 너무도 선명하게 와 닿는다. 여름 한철에 사용될 요트와 작은 보트들도 파도에 출렁거리며 고도(孤島)의 외로움을 한층 더 자극한다. 산 마르코가 견(見, See)의 공간인데 비해, 산 조르지오는 관(觀, Watch)의 무대처럼 다가선다. 300m 떨어진, 보트로 2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이토록 전혀 다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명상은 바깥이 아닌, 안에서 시작돼 안에서 끝난다고 한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을 그냥 비우는 것이 명상의 출발이다. 정신적·육체적 무(無)와 무위(無爲)의 자세가 명상의 핵심이다. 성철(性徹) 스님이 생전에 인터뷰에서 밝혔던, 너무도 당연한 진리가 하나 생각난다. 방송기자가 절 주변 산책에 나서는 성철스님을 따라가면서 물었다. “스님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이 길을 매일 걸으십니까?” “생각은 무슨… 아무 생각 안 해요.”

조각, 초상화, 셀피의 시대와 인간의 영혼


▎1. 안톤 그로스가 그린 27세 청년장교 나폴레옹. 긴 머리와 자신감 넘치는 정열이 그림에 드리워져 있다. 2. 다비드가 그린 28세 나폴레옹. 인간성 추락을 복구해줄 구원자로서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성철의 작은 미소는 3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무와 무위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옳고 그르고, 흑백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무와 무위의 세계관에 입각해 그냥 서서 지켜보면 산 마르코 광장이라는 속의 세계, 나아가 청년기 모습의 의미를 알 듯하다. 더불어 스스로를 객관화하면서 현재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아날로그 시대의 잔영(殘影)에 해당할 듯하지만, 객관화된 개인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초상(肖像) 만큼 유효한 것이 있을지 의문이다. 초상화나 조각에 나타난 모습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을지 추정 가능하다. 조잡한 작품의 경우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시간을 갖고 만들어진 아날로그 시대의 초상과 조각이라면 인간 탐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유럽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이집트 파라오 조각 이래 20세기 초까지 계속된 초상의 역사를 통해 인류 문화와 문명의 흔적을 재발견할 수 있다.

1인만이 아니라, 수십~수백 명씩 무리지어 찍는 디지털 셀피(Selfi) 시대로 접어든 것이 21세기다. 그러나 초상화와 조각처럼 내면을 객관화한 사진은 극히 찾아보기 어렵다. 사진으로 나타난 모습은 내면이 아니라 외면을 ‘현상(現象)’한 것에 불과하다. 의미 유무를 떠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낸 것일 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기술은 외면적인 부분을 보강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통해 인간의 내면까지 파고드는 업적을 창조해냈다고 하지만 지나친 수식어에 불과하다. 편하고 빠르고 능률적인 것은 사실이다. 아이폰이나 알파고가 있다고 해서 인간의 품격·도덕·윤리 나아가 영혼의 투명도가 더 올라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어두운 면을 교묘하게 숨기고 지능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카메라 자동셔터를 통해 아름다운 셀피를 수십~수백 장씩 매일 찍어낼 수 있지만 그건 카메라 주인의 기준에 맞는 ‘당신의 취미’에 불과하다.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아름다움, 품격이나 영혼의 울림과 무관하다. 타원형 얼굴로 전부 뜯어고치고, 거의 벗은 차림으로 세상에 비칠 때 사람들은 환호한다. 고대로마 당시의 원형경기장에 들어선 글레디에이터에 대한 순간적 유희와 똑같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원형경기장에 안 가도, 한순간에 엄청난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며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물거품이다. 아무리 천하무적 글레디에이터라도 25세를 넘긴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요즘은 개량 성형과 인조 근육을 통한 ‘+알파’ 미녀와 글레디에이터가 속속 등장한다.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무한정 셀피에 비해 20세기 흑백 사진이 인간탐구에 보다 더 알맞을 듯하기는 하다. 그러나 최하 몇 개월에서부터 최고 수십 년이 필요한 고전적 의미의 초상화나 조각과는 격이 다르다. 21세기 전위 예술가가 3D 프린터로 요술을 부린다고 해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넘어서는 영혼의 울림은 앞으로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자크 루이 다비드는 내면과 영혼으로서의 초상화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들이다. 자신의 생각과 세계관을 드러내는 초상화 주인공으로서의 나폴레옹과 그 같은 인물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 화폭에 정확히 옮기는 화가로서의 다비드다. 20세기 이후를 제외할 경우 나폴레옹에 관한 초상과 조각은 과거 그 어떤 인물에 지지 않을 정도로 많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나 로마 제1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나아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 정도가 경쟁자로 나설 수 있을 뿐이다.

루브르 최대의 작품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의 세부도.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면류관을 하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진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시대의 해방자다. 1804년 스스로가 황제가 되면서 그 같은 환상이 깨어지지만, 왕정과 귀족사회의 해체에 이어 종교적 부패를 척결한 ‘유럽의 메시아’ 같은 것이 220여 년 전 나폴레옹의 모습이다. 영웅을 기다린 유럽인들은 마치 메시아를 대하듯 수많은 초상화와 조각을 남긴다. 레닌과 마르크스의 초상이 사회주의의 대부(代父)로 20세기 전역을 풍미했듯이, 나폴레옹 초상화나 조각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유럽의 최고 인기 상징물로 정착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 초상화 제작에 나선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스트리아 공격을 위해 말을 타고 알프스 산을 넘어서는 유화를 비롯해, 필자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15개의 초상화를 그렸다. 나폴레옹만이 아니라 부인인 조세핀과 나폴레옹의 동생과 친척을 포함하면 전부 30여 개에 이른다.

인연은 1797년부터 시작된다. 나폴레옹이 사실상 프랑스의 최고 실력자로 떠오를 당시 다비드가 대면해서 얼굴 스케치를 그린다. 이후 나폴레옹 전속 화가로, 유럽을 무대로 한 새로운 영웅의 우상화에 나선다. 나폴레옹 문화 홍위병으로서,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독일 나치 아돌프 히틀러의 선전상 괴벨스에 해당되는 인물이 다비드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75호실은 나폴레옹과 다비드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75호실은 루브르 관람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유명한 그림 하나가 걸려있다. 루브르에서 가장 큰 그림으로 알려진, 가로 10m 세로 6m에 달하는 초대형 작품이다. 유명한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성당에서 이뤄진 대관식 장면이다. 언뜻 보면 나폴레옹이 부인인 조세핀에게 면류관을 하사하는 식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들고 있는 면류관은 나폴레옹에 의해 스스로의 머리에 얹혀진다. 하늘이 내린 해방자에게 ‘감히’ 면류관을 하사할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있을 수 없다.

면류관 이벤트에 동원된, 대관식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무려 150명에 달한다. 나폴레옹 부부를 비롯해 로마 교황 피우 7세, 나폴레옹의 동생과 친척, 새 왕조를 지지하는 수많은 실력자의 모습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엄청 큰 그림이 주는 절대적 권위 탓이기도 하겠지만, 신비하고 장엄하며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프랑스 미술사의 걸작 중 하나다. 이 같은 초대형 작품을 만들어낸 인물은 다비드다. 그림 속 중간 상단 구석을 보면 대관식을 지켜보는 다비드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원래 다비드는 대관식 참석이 아니라 멀리서 지켜보는 수준에서 상황을 파악했다고 한다.

필자가 75호실에 들른 것은 나폴레옹의 대관식 때문만이 아니다. 항상 강조하지만 스토리텔링이 있는 명작은 그 자체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방팔방을 훑어보면서 파악해나가는 것이 좋다. 산 마르코 광장의 의미와 가치는 반대편인 산 조르지오를 통해 한층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은 대관식 맞은 편에 걸린 그림들이다. 워낙 큰 그림이기에 정면 반대편에는 세 개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있다. 큰 소파에 앉은 여성이 중간에 있고, 오른쪽에는 성직자가, 왼쪽에는 평범한 남성 한 명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나폴레옹과 혼외정사를 거부한 레카미에의 몰락


▎다비드의 1800년도 작품 <레카미에 자화상>이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그림의 정반대편에 걸려 있다.
대관식 쪽에서 보면 세 사람이 나폴레옹을 응시하는 식으로 느껴진다. 세 사람의 눈길에는 묘하게도 뭔가 공통적인 부분이 흐른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고 있는 손오공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대형 이벤트를 대하면서 탄성을 지르고 경외감을 느끼면서 박수를 보내는 자세가 아니다. 면류관을 집어 들어 자신의 머리에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말로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관조(觀照)의 모습들이다.

“19세기 초 무신론 시대를 틈타 메시아처럼 등장했지만, 당신 역시 이전의 권력자들과 다를 바 없다. 세속적 욕심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바꿔 팔고 있는 또 하나의 거짓 우상에 불과하다”라는 것이 세 사람 초상화에서 퍼져나오는 울림 같았다.

루브르 정도의 특급 박물관 큐레이터라면 작품 배치나 주변 장식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게 된다. 대관식을 마주하는 세 사람은 나폴레옹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사람이다. 가운데 여인부터 살펴보자. 줄리엣 레카미에(Juliette Récamier)란 이름의 여성이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등장할 당시 파리 사교계를 뒤흔들던 밤의 여왕이다. 뛰어난 미모와 교양을 겸비한 인물로 15세 연상의 부자 남편 덕분에 보수 왕당파를 중심으로 하는 사교 파티의 중심에 선다.

18세기 말 파리는 좁다. 새롭게 등장한 젊은 군인 나폴레옹 눈에 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구(舊) 이탈리아령인 코르시카 출신 촌놈 나폴레옹은 레카미에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반대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보수 왕당파와의 교류는 있지만, 혁명 이전의 부르봉이 아닌 나폴레옹 왕정으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를 부정했다. 물론, 수준 미달인 촌놈 군인에 대한 비호감도 반대의 이유 중 하나다.

황제는 곧 법이다. 자신에게 거부하는 것을 못 참는다. 측근을 보내 레카미에에게 자신의 정부(情婦)가 되라고 요구한다. 18세기 유럽에서의 혼외정사는 낭만적 요소를 지닌 공공연한 비밀이다. 부부관계는 유지하되 서로간의 불륜은 묵시적으로 허용됐다. 루브르에 걸린 레카미에 초상화는 황제의 요구와 함께 내려진 선물용 그림이다. 정부를 조건으로 한 선물용 초상화가 대관식 반대편 한가운데에 걸려 있다.

레카미에는 촌놈 군인의 요구를 거부한다. 나폴레옹은 잔인하게 복수한다. 남편의 재산을 몰수하고 레카미에를 파리에서 추방한다. 결국 유럽 전역을 떠돌다가 후에 수도원에서 쓸쓸히 숨진다. 나폴레옹 실각 소식을 듣지만 파리로 다시 돌아갈 정도의 돈·미모·젊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나폴레옹이 가장 몸이 달아 있고, 레카미에가 가장 나폴레옹을 싫어하던 시기의 그림이 대관식 반대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대관식을 바라보는 레카미에의 심정은 어떨까? 나폴레옹의 절정은 레카미에 추락의 서막이다. 레카미에는 그리스풍 옷을 즐겨 입고, 당시로는 드물게 짧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한 19세기 초 파리 패션계의 셀러브리티였다. 조세핀에게 면류관을 올리는 듯한 ‘쇼’를 벌이는 나폴레옹에게 과연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을까?

조세핀의 오른쪽에 들어선 초상화는 역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교황 피우(Piu) 7세다. 대관식 그림을 보면 나폴레옹 바로 뒤에도 나타난다. 흰옷 차림에다 큰 지휘봉을 갖고 있는 인물이 피우 7세다. 대관식이 끝난 지 1년 뒤인 1805년에 그려진 초상화다.

부패한 기득권인 바티칸의 권위를 무너뜨리다


▎다비드가 45세 때 그린 <마라의 죽음> 앞에 선 필자. 마라는 프랑스혁명을 이끈 3대 주역 중 한 명으로 다비드의 친구다.
나폴레옹은 1805년부터 엘바섬에 유배되기 직전인 1814년까지 이탈리아 왕도 겸했다. 프랑스 황제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왕으로서 교황의 권위에 맞선다. 기본적으로 나폴레옹은 가톨릭을 적대시한다. 가톨릭 세력이 정치화하는 점에 반대한다.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점령할 당시 유럽 시민 대부분은 가톨릭 집단을 부패한 기득권자로 봤다. 유럽 시민의 생각을 반영하면서 바티칸의 권위를 무너뜨린 인물이 해방자 나폴레옹이다.

교황의 바티칸 땅과 재산을 몰수하고 수많은 성직자를 로마에서 추방하거나 아예 감금한다. 1797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할 당시의 교황 피우 6세는 이후 프랑스로 끌려가 연금 상태에서 사망한다. 그 같은 공포상황에서 교황에 오른 인물이 바로 피우 7세다. 연금 상태로 바티칸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럽을 떠돌던 중 나폴레옹 대관식에 불려간 것이다.

피우 7세는 나폴레옹과의 정치적 타협에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나폴레옹을 무시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탄압을 받은 교황 피우 6세와 다르다. 가능하면 달래고 설득하는 식의 전략으로 대응했다. 대관식에도 적극 참가하고, 프랑스의 영국해협 봉쇄도 찬성하면서 나폴레옹을 달랜다. 편지를 통해 나폴레옹을 ‘나의 자식(My son)’이라 부르면서 항상 기도를 올린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09년 바티칸 재산을 전부 몰수하고 피우 7세를 프랑스로 불러들여 교황의 권위를 전면 부정한다. 피우 7세가 바티칸으로 돌아간 것은 1814년 5월 나폴레옹 실각 직후다. 가톨릭을 적대시하던 로마 시민들은 의외로 피우 7세를 적극 환영한다. 오만한 나폴레옹에게 수난을 당한, ‘박해받은 교황’이란 이미지와 함께 실추된 교권회복에 성공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성공은 바티칸의 추락이지만, 나폴레옹의 몰락은 교권과 바티칸의 부활에 해당된다. 그 같은 정(政)과 교(敎)의 갈등사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인물이 바로 피우 7세다. 겸손하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은 인물로, 이후 교회는 물론 교회 밖으로부터도 존경을 받게 된다. 속(俗)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황제 대관식에 나선 나폴레옹에게 성(聖)을 대표하는 피우 7세는 무슨 말을 전하고 있을까? 교황과 바티칸을 탄압한 이상 나폴레옹이 천국에 갔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이다. 저세상에서 다시 만났다면 나폴레옹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있을까? 아니 지옥에 머물지도 모를 황제로부터 어떤 얘기를 듣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대관식 그림 반대편 왼쪽에 있는 그림을 보자. 대관식 그림은 물론, 레카미에와 교황 피우 7세의 초상화, 나아가 본인 스스로를 포함해 전부 네 개의 그림을 그린, 화가 다비드가 주인공이다. 1794년 46세 때 제작된 다비드 자화상이다. 세련된 헤어 스타일에 호감을 주는 얼굴이다. 흰 스카프에다 흰 상의 위에 고동색 외투를 걸치고 있다. 화가임을 나타내는 듯, 오일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다. 응시하는 눈빛을 보면 20대에서나 볼 수 있는 순수함이 와 닿는다.

황제 버금가는 꿈과 세계관으로 그린 초상화


▎1794년 45세의 다비드. 실제보다 젊게 그려진 그림으로 머리 회전이 빠른 지략가로서의 이미지가 와 닿는다.
반대편의 대관식에 선 나폴레옹의 얼굴을 포함해 네 명 모두의 모습에서 속(俗)을 찾기는 어렵다. 다비드는 속을 빼고 성(聖)을 전면에 내세운 화가다. 18세기 말 불어닥친, 이른바 네오클래식 화풍의 선두주자가 다비드다. 신과 신화의 세계와 르네상스 당시의 모습을 부정한 것이 18세기 중반의 로코코다. 다비드는 15세기로 되돌아가 당시의 주제와 화풍을 담자고 주장한다.

르네상스는 인간성 회복에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당시의 문화적 풍조를 재현한, 인간의 아름다운 부분을 믿고 강조하는 문화 시류다. 더럽고 사악하며 어두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을 일깨우면서 밝고 품격 있게 살자는 것이 15세기 르네상스와 18세기 말 네오클래식의 공통점이다.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와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대관식, 그리스·로마의 조각에서나 느낄 수 있는 비너스 스타일의 레카미에 초상화는 바로 그 같은 네오클래식의 전형적인 본보기다.

그러나 인간과 세상은 모순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네오클래식이 다비드의 예술세계이지만, 그가 보여준 세상사는 르네상스 정신의 정반대편에 선, 살벌하고도 참혹한 속(俗)으로 얼룩져 있다.

다비드는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미화한 인물이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가진 가장 어둡고도 차가운 부분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 자체를 부각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추함을 없앨 경우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다. 나폴레옹이 가진 단점과 약점을 없애는 과정에서 모두가 동경하는 황제다운 모습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의미다.

프로파간다 초상화에 불과하지만 내면의 울림과 영혼의 빛깔까지 느낄 수 있다. 단순히 크고 화려하며, 용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선전용 초상화가 아니다. 그림 하나하나에 나폴레옹의 세계관, 꿈 나아가 좌절, 불안까지 확인해 볼 수 있다. 다비드는 어떻게 해서 그 같은 세계를 창조해 낼 수 있었을까? 이유는 다비드 그 자신이 나폴레옹에 비견될 만한 큰 꿈과 뜨거운 세계관으로 살아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1748년에 태어나 1825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1769년생 나폴레옹은 1821년 아프리카 헬레나섬에 유배되면서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황제보다 21년 일찍 태어났으며, 나폴레옹이 죽은 뒤 4년을 더 산 인물이 다비드다.

인생의 길이가 인생의 폭과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비드의 인생을 보면 결코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더 파란만장한 삶으로 얼룩져 있다. 나폴레옹 등장의 명분이 되기도한 프랑스혁명과 이후의 공포정치를 직접 겪고, 나아가 혁명의 최고봉에서 살아간 사람이 다비드다. 다비드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문화 총책임자에 오른 인물이다. 마라, 당통, 로베스 피에르로 이어지는 혁명의 3역과 어깨를 나란히 한, 혁명의 핵이 다비드의 정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단두대 처형에 관한 국민회의에서 ‘기꺼이’ 찬성표를 던진 냉혈한이기도 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인 루이 17세를 굶어 죽게 만들 당시에는, 현장을 직접 관장한 책임자로 일했다.

르네상스 인간성 회복에 나선 인물이 어떻게 피를 부르고 적과 동지를 확연히 나누는 혁명의 대열에 참가하게 됐을까?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예술가적인 뜨거운 정열이 배경에 있을 것이라 해석된다. 네오클래식을 통한 인간성 회복은 앙시앵레짐(Ancien Régime) 즉, 구세력의 완전한 척결에서부터 온다는 것이 다비드의 신념이었을지 모른다.

“당신을 존경한다(I salute you)”라는 유명한 일화

1789년 혁명 직전 다비드는 공화국의 이념에 충실한 국민화가로 통했다. 언젠가 영화로도 나올 듯하지만 마라, 로베스피에르와의 개인적인 우정을 통해 혁명 최전선에 초대되면서 앙시앵레짐 개조를 위한 잔인한 공격에 나선다. 피는 피를 부른다. 혁명에 대한 피로감이 공포로 변해가면서 다비드의 피도 얼음처럼 변해간다.

루브르에 걸린 자화상은 혁명이 끝나고 반혁명재판에 회부된 뒤의 장면이다. 감옥에 들어가 있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친구인 로베스피에르조차 단두대에서 처형된 상태에서 다비드는 운 좋게 살아남는다. 감옥에 있는 동안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삶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순간을 자화상으로 남긴 것이다. 삶에 대한 애착도 있었겠지만, 모든 동지가 사라지고 세상이 변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이 다비드 자화상의 실체다. 순진한 눈빛은 체념의 극단에 선 인간이 보여주는 징표일지 모른다.

나폴레옹 대관식은 자화상 이후 8년 뒤에 탄생된다. 뛰어난 그림 솜씨 때문에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남고, 결국 나폴레옹을 위한 전속화가로 부활한다. 혁명전사에서 어용화가로 변한 것이다. 대관식 그림은 나폴레옹이 직접 찾아와 관심을 보이고 수차례 수정을 지시한 작품이다. 한 시간 이상 묵묵히 보던 나폴레옹이 다비드에게 던진 “당신을 존경한다(I salute you)”란 말 한마디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등장과 영광 나아가 좌절과 추락을 전부 지켜본 인물이다. 나폴레옹이란 인물 자체가 아니라, 나폴레옹을 통한 당시의 유럽 상황을 한눈에 지켜본 화가다. 다비드 그 자신도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10년 전부터 그 같은 극과 극의 세계를 전부 체험한다. 혁명이란 이름으로 왕과 왕비를 처형한 다비드와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 나폴레옹은 자기모순에 빠진 대표적인 본보기다.

유럽 정치사에서 보면 나폴레옹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듯하다. 그러나 인간 대(對) 인간이란 차원에서 본다면 나폴레옹보다 길고도 넓게 산 인물이 다비드다. 그런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 감옥에 있을 때 모습으로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지켜보고 있다. 나폴레옹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고, 알려주는 객관적 자아발견의 나침반이 바로 다비드 자화상의 의미일 듯하다.

루브르 75호실은 황제와 화가, 황제의 정부가 될 뻔한 밤의 여왕, 성(聖)의 화신 교황이 공존하는 곳이다. 성을 통해 속을 보고, 속을 통해 성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일 듯하다. 내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과연 어디로 가는지, 신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그 같은 자아탐구에 빠진 사람이라면 루브르 75호실을 명상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듯하다. 속을 성으로, 성을 속으로 해석하며 살아간 화가가 다비드다. 모순 투성이 세상에 살면서, 한층 더 큰 모순을 만들어내는 인간 모두의 자화상이 다비드의 삶을 통해 재발견된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605호 (2016.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