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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7)] 조선의 ‘바보왕자’ 제안대군 

예종 승하 후 왕위계승 1순위 원자였으나 사촌형인 자을산군에게 밀려 왕자로 격하돼… 성 불능 탓에 부인과 합방할 수 없게 되자 이혼-재혼-이혼-재혼 반복하는 불운도 겪어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내려다본 창경궁의 야경. 가운데 자리한 ‘홍화문’은 창경궁이 창건되던 해인 1484년(성종 15)에 처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16년(광해군8)에 재건됐다. / 사진·중앙포토
자고로 음식과 남녀의 성은 인간의 욕망 중에서도 가장 큰 욕망이다. 인간은 음식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고 남녀관계가 없으면 번식할 수 없다. 그래서 고대의 어떤 철학자는 식욕과 색욕 그 자체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갈파(喝破)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은 색욕에 무관심하기도 하다. 호기심 많은 역사가에게 이런 인간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그랬다면 더더욱 연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성현이 1504년(연산군 10)에 쓴 <용재총화>에는 그 당시 색욕에 무관심해 유명인사가 된 남자 3명이 등장한다. 제안대군, 한경지 그리고 김자고의 아들이 그 주인공이다.

예종의 원자로서 수많은 미인을 거느렸던 제안대군은 늘 부인은 더러워서 가까이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부인과 마주앉지도 않았고, 한명회의 손자인 한경지 역시 부인은 물론 여종과 상종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열 살 무렵에 김수말의 여식과 혼례


▎<조선왕조실록>의 ‘성종실록’에는 예종의 독살설과 관련한 내용이 실려 있다. / 사진·중앙포토
마지막으로 김자고의 아들은 남녀의 일도 모르고 숙맥도 구분 못하는 바보였다고 한다. 이를 걱정한 김자고가 어느 날 남녀의 일을 잘 아는 여자종을 곱게 단장해 아들에게 들였다. 그러자 깜짝 놀란 아들은 침상 밑으로 도망해 들어갔고, 이후로는 곱게 단장한 여자만 봐도 울며 도망쳤다고 한다.

요컨대 제안대군, 한경지 그리고 김자고의 아들 3명은 남녀의 일도 모르는 바보 중의 ‘상바보’로 당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셈이다. 그들 3명의 남자가 왜 그리 됐는지는 각자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필자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단연 제안대군이다. 그는 예종의 원자로서 왕이 될 뻔했던 인물이다. 그런 제안대군이 어쩌다가 색욕에 무관심하게 돼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더 나아가 <용재총화>에까지 실리게 됐을까?

1469년(예종 1) 11월 28일,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원자였던 제안대군은 겨우 4세였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왕위계승의 서열 1순위는 당연히 원자였다. 그러나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 윤씨는 원자를 너무 어리다고 하며 그 대신 13세의 자을산군을 후계 왕으로 지명했다. 사촌형인 자을산군이 성종이 됨으로써 제안대군은 원자에서 왕자로 격하됐다.

4세의 제안대군은 아직 어렸기에 궁에서 생모인 안순대비 한씨와 함께 살았다. 그렇지만 어린 제안대군을 키운 사람은 유모 금음물(今音勿)이라는 여성이었다. 제안대군의 성품과 기질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이 유모였다. 그래서 제안대군에게 유모는 명실상부 제2의 어머니라 할만 했다.

당시의 궁중 관행대로 제안대군은 10세 전후로 혼인해 궁중을 나갔다. 부인은 김수말의 딸이었고 비슷한 또래였다. 살림 집은 한양 동부의 성균관 부근이었다. 그때 유모 금음물 역시 제안대군을 따라 나갔다. 제안대군이나 부인 김씨는 아직 어렸기에 살림살이는 유모가 주관했다.

그런데 제안대군의 유모가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안대군이 어리다는 사실 이외에 안순왕후 한씨의 신임이 더 컸다. 당시 궁궐의 유모는 대비가 뽑는 것이 관행이었고, 대비는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여성을 유모로 들여 자녀를 키웠다. 그러다가 자녀가 혼인해 나가면 유모를 딸려 내보내 살림살이를 돌보게 하는 한편 어떻게 사는지도 수시로 보고하게 했다.

제안대군의 유모 금음물은 보통 여성이 아니었다. 제안대군이 태어났을 때는 예종의 원자로서 차기 왕위가 보장된 처지였다. 그래서 정희대비는 유능한 여성을 유모로 들이기 위해 널리 물색했다.

그 결과 세종의 사위인 윤사로가 특별히 금음물을 유모로 뽑아 올렸다. 분명 지성과 성품 모든 면에서 차기 왕의 유모로 손색이 없었기에 선택됐을 것이다. 이런 금음물은 혼인한 제안대군에게 제2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무서운 감독자이기도 했다.

합방 앞두고 부인과 이혼하는 왕자


▎종묘 정전에서 봉행된 세계무형유산 종묘제례에서 종묘제례악 악장과 일무(佾舞)가 연행(演行)되고 있다. 왕과 왕비에게 지내던 제사인 종묘제례는조선왕조의 매우 중요한 행사로 ‘종 묘대제’라고도 한다. / 사진·중앙포토
제안대군이 13세 되던 해 여름, 부인 김씨는 피서차 외가로 갔다가 더위 병에 들었다. 외할아버지가 지극 정성으로 치료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다리를 저는 후유증이 남았다. 제안대군이 14세 되던 해에도 부인 김씨의 후유증은 완쾌되지 않았다.

그런데 왕실의 관행상 부인들은 15세쯤에 성인식을 치르고 합방을 했다. 제안대군은 비록 10세 전후로 혼인하기는 했지만 14세가 될 때까지 합방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왕실 어른들은 제안대군이 15세 가까이 되자 부인 김씨의 성인식을 준비하는 한편 합방 준비도 했다.

특히 제안대군의 생모인 안순대비 한씨는 하루라도 속히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자주 궁녀를 보내 며느리 김씨 즉 제안대군 부인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때 며느리 김씨의 상태를 궁녀에게 전하는 역할은 당연히 제안대군의 유모가 맡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제안대군의 유모는 김씨의 후유증이 심해 걷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자주 기절한다고 과장해 알렸다. 요컨대 며느리 김씨가 사람구실을 할 수 없어 성인식도 불가능하고 합방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즈음 제안대군은 부인을 심각하게 미워했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제안대군은 누군가의 부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부인 김씨는 언제나 죽을 것인가?”라며 몹시 부러워했다고 한다.

제안대군에게 미움 받는 며느리 김씨가 사람구실까지 못하는 상태라고 전해들은 정희대왕대비는 즉시 이혼을 명령했다. 조선시대 칠거지악 중의 하나가 악질(惡疾) 즉 심각한 병이었는데 그것을 핑계로 김씨를 쫓아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씨의 외할아버지는 중간에서 유모가 거짓말을 해서 그렇지 후유증은 다 치료됐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에 따라 제안대군은 합방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이혼하게 됐다. 그렇다면 제안대군은 왜 그토록 부인을 미워했을까? 또 유모는 왜 중간에서 거짓말을 했으며, 정희대왕대비는 왜 그 말을 듣자마자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곧바로 이혼시켰을까?

우선 합방에 대한 제안대군의 두려움이 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합방을 앞둔 14세의 제안대군은 호기심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을 듯도 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그 이유는 말 못할 사정 때문이었다. 여러 기록을 두루 살펴보면, 제안대군은 어려서부터 “부인은 더러워서 가까이할 수 없다”고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자신의 병 때문이었음이 확실하다.

제안대군의 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여러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성 불능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성 불능에 시달리던 제안대군은 자신의 병을 공개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합방할 수도 없었다. 그런 갈등 속에서 부인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음직하다.

한편 이 같은 상황을 잘 아는 유모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제안대군이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했음이 분명하다. 더위 병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김씨는 그렇지 않아도 여자에 관심이 없는 제안대군에게 더더욱 매력이 없어 보였을 듯하다. 이런 김씨와는 도저히 합방도 되지 않고 자녀 생산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유모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좀 더 매력적인 여성을 제안대군의 부인으로 맞게 하려고 했음직하다.

어쩌면 제안대군의 생모인 안순대비 한씨는 유모를 통해 대군의 상태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유모를 통해 김씨와는 합방도 어렵고 자녀 생산도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야기를 정희대왕대비에게 했을 듯하다.

이렇게 보면 안순대비 한씨와 정희대왕대비는 유모와 마찬가지로 하루라도 속히 손자를 보고 싶은 욕심에서 김씨를 쫓아냈다고 생각된다. 성종 10년(1479) 12월 21일자의 실록기사에 의하면 성종은 김씨의 외할아버지에게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곧 대왕대비의 명령이다. 경이 처음 혼인할 때 오래 묵은 병이 있다고 알렸다면 좋았을 텐데 말을 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경의 실수”라고 해 이혼 책임을 김씨의 외할아버지에게 돌렸지만, 실제 이혼 책임은 제안대군에게 있었다.

재혼 1년여 만에 전처와 재결합 추진하고


▎인기리에 방영됐던 JTBC 사극 <인수대비>. 조선 초기인 세조~연산군 대의 이야기를 사실(史實)에 근거해 재미있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사진·중앙포토
어쨌든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제안대군이 이혼한다고 하자 양반 관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나라의 모범이 돼야 할 대군이 분명한 이유 없이 이혼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성종은 정희대비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제안대군은 장안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후 이혼함으로써 합방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재혼을 막지는 못했다. 생모 안순대비 한씨는 하루라도 빨리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재혼을 서둘렀다. 그 결과 박씨라고 하는 여성이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왔다. 그 시점은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할 때 제안대군이 15세 되던 해 가을이나 아니면 16세 되던 해 봄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혼한 제안대군은 여전히 박씨와도 합방하지 않았다. 손자를 기다리는 안순대비 한씨는 수시로 며느리 박씨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아이를 재촉하는 시어머니 앞에서 며느리 박씨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아이를 갖고 싶어도 하늘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자신만 채근하는 시어머니에게 며느리 박 씨는 점점 정이 떨어졌고, 정이 떨어지는 만큼 말투나 행동도 거칠어졌다.

하지만 시어머니에게 어찌 부부 사이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으랴? 며느리 박씨는 아이를 갖기 위해 제안대군을 몰아붙였을 터인데 이것이 제안대군의 분노를 불러왔다. 미움이 치솟은 제안대군은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부인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본다면 제안대군은 분명 타고난 바보이거나 아니면 위장된 바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안대군은 17세 되던 해 봄부터 갑자기 이혼한 부인을 찾기 시작했다. 재혼한 지 겨우 1년여 지난 시점인데 아마도 부인 박씨로부터 모진 채근을 당하다 그렇게 됐을 듯하다. 제안대군이 전처 김씨를 돌파구로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는 편안함이다.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와 10세에 혼인해 14세까지 4년을 부부로 살았다. 비록 합방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여성이 전처 김씨였다.

둘째는 미안함이다. 제안대군은 자신의 말 못할 사정으로 김씨가 쫓겨났음을 내심 미안해 했을 것이다. 자신의 상태를 잘 아는 김씨가 만약 자신을 받아준다면 제안대군은 합방의 공포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성종 13년(1482) 1월 14일,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씨는 친정으로 돌아가 살고 있었다. 침방으로 들어간 제안대군은 전처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제안대군은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이야기하고 그런 자신을 받아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김씨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을 듯하다.

김씨의 입장에서는 성 불능인 제안대군과 다시 합치는 것이 분명 비극이기는 하나, 이혼당하고 친정집에서 홀로 살다 죽는 것보다는 낫을 것이라 판단했을 듯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제안대군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어서 사람을 보내 김씨를 맞이해 갔다. 이 결과 제안대군은 졸지에 부인 2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비록 후처인 박씨에게 이 사실을 숨겼지만 소문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소문이 퍼지고 퍼져 사헌부에까지 알려졌다.

성종 13년(1482) 5월 6일, 사헌부에서는 제안대군 사건을 조사하라 요구했다. 성종은 제안대군이 이혼한 전처와 재결합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조선시대에 한 남성이 처첩을 거느리는 것은 용인됐지만, 부인 2명을 거느리는 것은 분명 불법이었다.

제안대군이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면 먼저 성종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처와 결합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제안대군은 그런 절차도 없었다. 성종의 명령에 따라 조사가 진행됐고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뒤이어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전처 김 씨는 다시 친정으로 쫓겨났다. 그때가 5월 19일이었다.

그러자 제안대군은 불같이 화를 냈다. 아마도 제안대군은 자신이 전처와 재결합한 일을 부인 박씨가 밀고했다고 의심했던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애가 닳은 사람은 생모 안순대비 한씨가 아니라 오히려 유모 금음물이었다. 유모는 제안대군의 상태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이었다. 냉정히 따지면 아이를 갖지 못하는 책임은 제안대군에게 있었다.

그러나 제안대군을 자기자식처럼 사랑하는 유모는 철저하게 대군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부인 박씨가 조금만 더 여성스럽게 군다면 대군의 사랑을 받아 아이를 가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부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유모는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를 쫓아내기 위해 끔찍한 음모를 꾸몄다.

성종 13년 6월 11일, 유모 금음물은 성종에게 밀서를 올렸다.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가 수많은 여종과 동침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동성애를 부정한 행위이자 끔찍한 범죄로 간주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제안대군의 부인이 동성애를 벌였다는 밀서가 들어오자 성종은 깜짝 놀랐다.

후처 박씨, 동성애자로 몰려 조사받는데


▎창경궁에 있는 성종태실비. 조선시대에는 왕자의 탯줄을 도자기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묻었다. 일제가 성종태실을 궁으로 옮긴 뒤 창경궁으로 격하시켰다. / 사진·중앙포토
성종의 명령에 따라 승정원의 형방승지가 사건을 조사하게 됐다. 먼저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 그리고 부인과 동성애를 벌인 것으로 의심되는 여종들이 체포되었다. 형방승지는 먼저 내은금이라는 여종을 조사했는데 내은금은 “부인과 5월부터 동침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뒤이어 금음덕이라는 여종도 부인과 동침했다고 진술했을 뿐만 아니라 동침 현장을 유모 금음물과 다른 여종들에게 들키기까지 했다고 진술했다.

제안대군 부인 박씨가 동성애를 벌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성종은 정희대왕대비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정희대왕대비는 자세하게 조사해 보고할 것을 명령했다. 성종은 승전색 환관에게 사건을 조사하게 했다. 제일 먼저 부인 박씨를 조사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느 날 밤, 제가 자려고 하는데 둔가미라는 여종이 갑자기 들어와 동침하자고 졸랐지만, 저는 ‘내가 비록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명색이 주인인데 네가 어떻게 동침하자고 한단 말이냐?’ 하며 거절하자 둔가미는 물러가서 금음덕이하고 잤습니다. 또 어느 날 밤, 내은금이라고 하는 여종이 들어와 저와 같이 자자고 하므로 이 또한 제가 꾸짖어 물리쳤더니 물러가서 평상 밑에 앉았다가 제가 잠들기를 기다려 몰래 제 이불 속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유모 금음물이 녹덕이라는 여종을 데리고 등불을 밝히고 들어와서는 ‘양반이 저 모양인가? 더럽다, 더러워’ 했습니다. 그때 저는 날이 이미 새벽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꾸중하는 줄로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성종실록>13년 6월 16일)

위의 내용에 의하면 부인 박씨는 주체적으로 동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종들에게 동침당했다. 만약 박씨의 주장이 옳다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여종들을 들여보내 동침하게 하고 그 현장을 덮친 것이 분명했다. 사건이 의심스럽다고 생각된 성종은 의금부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게 했다.

여종들을 조사한 결과 배후자는 유모 금음물로 밝혀졌다. 마침내 금음물을 조사하자 그녀는 “제안대군이 전처 김씨와 다시 합하고자 하므로 제가 내은금 등으로 하여금 부인과 동침하게 하여 그 악행을 들추고자 그랬습니다”라고 실토했다. 요컨대 부인 박씨를 쫓아내기 위해 동성애자로 조작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제안대군 유모의 자작극으로 결론이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모가 부인을 모함했다는 사건 자체가 한양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나아가 이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제안대군의 유모 금음물은 생각하기에 따라 충신이기도 하고 역적이기도 했다. 즉 제안대군을 위해 이런 악역까지 자행했다고 하면 금음물은 충신이었다. 반면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는 유모에게도 주인인데 그런 주인을 모함하고 고발까지 했다는 것은 크나큰 반역이었다. 금음물을 충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로 역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처와 재결합하는 것으로 ‘사건’ 마무리돼

그런데 문제는 제안대군의 개입 여부였다. 만약 제안대군이 시켜서 그렇게 했다면 금음물은 충신일뿐더러 무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음물은 시켜서 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했는지에 대해여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면 금음물 스스로 알아서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종은 이런저런 정상을 참작해 금음물을 변방의 관비로 보내버렸다. 또한 유모의 지시를 받고 박씨의 방으로 들어갔던 여종들은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에 유배하도록 했다. 비록 지시를 받고 한 짓이기는 해도 주인을 모함에 빠뜨린 것은 크나큰 반역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문제는 부인 박씨였다. 박씨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제안대군은 부인 박씨와 살아야 하고 전처인 김씨와는 헤어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판결은 그렇게 나지 않았다. 부인 박씨는 시어머니인 안순대비 한씨에게 불순종했다는 죄목으로 이혼당했다. 사실 이것은 핑계이고 제안대군이 죽어도 박씨와는 살지 않겠다고 해서 이렇게 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부인 박씨만 억울하게 이혼당한 셈이었다.

이어서 성종은 제안대군에게 다시 장가들 것을 명령하고 부인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안대군은 “지금 듣건대 신을 위하여 여자를 고른다고 하시니 실망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전처인 김씨와 재결합하겠다고 했다. 만약 들어주지 않으면 “평생토록 홀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같은 제안대군의 고집에 결국 성종도 굴복했다. 이 결과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와 다시 살게 됐고, 그와 관련된 모든 내용이 실록에 실렸다.

돌아보면 제안대군 사건이 그토록 커지고 나아가 역사화되기까지 한 이유는 대군의 어리석음에 더해 유모의 어리석음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유모 금음물은 제안대군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얼핏 충성으로 보이는 그런 행동이 결국에는 제안대군을 조선시대 최고의 바보왕자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대학연의> ‘섬사망상지정(憸邪罔上之情)’에는 간신이 윗사람을 어떻게 망치는지가 언급돼 있다. 이에 의하면 간신의 공통점은 윗사람의 뜻을 무조건 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간신은 처음에는 충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간신은 끝내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하지 않음으로써 윗사람을 영원한 바보나 영원한 악당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면에서 간신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대로만 하고 싶어하는 윗사람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605호 (20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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