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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인터뷰] ‘참여정부 외교 전략가’ 문정인 연세대 교수 

“오바마 대통령 대북정책 실패… 북한이 주는 시그널 이해 못해” 

글 유지혜·박지현 기자 wisepen@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 노무현 대통령, 국방 예산 9%씩 증액… 중국과 일본의 지역패권 경합 우려
◇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균형자론’, 현 정부 ‘동북아평화협력구상’과 같은 의미
◇ DJ는 ‘절제된, 사려 깊은’ 사람,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 자연적’인 사람


2000년 6월 13일 평양에서 분단 55년 만에 남북 정상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뤄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한반도 화해·협력의 시대’를 선포한 ‘6·15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북한의 빗장을 여는 순간이었다.

2007년 10월 2일에는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이번엔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의 손을 잡았다. ‘10·4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한 남북 정상은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며 다시 한번 통일을 향한 미래를 약속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후 북한은 두 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해 남북관계를 냉각상태로 몰아넣었다. 두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의 유화적인 대북정책도 함께 묻혔다. 지난 1월 6일, 4차 핵실험을 한 북한은 역대 가장 강력한 국제사회의 제재에 직면했다. 남북 화합의 상징으로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왔던 개성공단도 전면중단됐다.

이 모든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증인이 있다. ‘바로 옆에서’라는 수식은 결코 레토릭이 아니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 회담에서 민간인 신분으로선 유일하게 특별수행원으로 함께 한 문정인(65)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다. 참여정부에서 동북아시대위원장을 역임한 문 교수는 박근혜 정부에서 통일준비위원회(외교·안보 분야 민간위원)에도 참여해왔다.

문 교수는 10년 진보정부 개각 때마다 외교안보 분야 주요 요직의 하마평에 올랐다. 실제 국정원장과 대통령 안보실장 등을 제안받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문 교수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이를 고사했다.

왕성한 대외활동 중에도 강단을 떠나지 않았던 그가 대학에 몸담은 지 35년 만에 정년 퇴임한다. 6월 7일 그의 고별강연에는 제자들을 포함한 150여 명이 강의실을 채웠다. 그의 고별강연에서 못 다한 말을 듣기 위해 이틀 뒤인 6월 9일 김대중도서관 관장실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남북간 경색국면이 고착화하고 있다. 책임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우선 국제정세의 유동성이라는 변수가 있다. 우리 정부가 덜 경직돼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박 대통령의 원칙론으론 불가능”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에 민간인으로는 유일하게 특별수행원으로 참석한 문정인 연세대 교수. 왼쪽부터 김정일 북한 전 국방위원장, 노무현 전 대통령, 문 교수.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북한을 제재하고 있는데, 북한이 변화할 것이라고 보나?

“제재만으로 북한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해 더 강성으로 나올 것이다. 이럴 때 만나는 게 훨씬 좋다. 대화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만나서 우리가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북이 원하는 것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이 남북군사회담을 제안하는데,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부는 자꾸 안 한다고 하니 답답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는 북한과 공식회담 외에는 안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생각을 알기 힘들다. 공식회담은 언론에서 집중하는데 누가 마음 터놓고 서로 수용 가능한 타결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지난해 5, 6월부터 통일준비위원회(이하 통준위)에서도 북한 붕괴론(흡수통일론)에 대한 가정이 많이 나왔다. 그 배경이 뭔가?

“그해 7월 청와대 통일준비위원회 집중 토의 때 박근혜 대통령이 ‘고위급인사가 탈북하고 있다’, ‘북한이 심상치 않다’, ‘내년에라도 통일이 올 수 있으니 여러분은 잘 준비하라’고 발언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지난해 5월 정찰국 대좌가 탈북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대통령께서 고위급 인사 탈북 사태가 북한의 동요로 이어질 수 있으니 잘 준비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 아닌가 싶다. 이때쯤부터 통준위의 ‘합의통일론’이 ‘흡수통일론’ 담론으로 전환된 것 아닌가 한다.”

‘김정은의 북한’을 어떻게 보나?

“이번 7차 당대회를 거치며 과거 선군정치를 통해 임시방편으로 통치하는 방식에서 당 중심으로 전환된 걸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2011년 김정일 위원장이 하려고 기초작업을 해둔 것들을 공식화시켰다. 보다 제도화된 통치가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김정은은 과거 정권보다 비교적 예측가능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도적 외형이 그럴싸하다 하더라도 운영 문제가 중요하다. 김정은 리더십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김정은의 리더십을 평가 한다면?

“두 개의 얼굴이 다 있다. 좋은 지도자가 될 자질을 가진 예측 가능한 얼굴과 파행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면이 있다.”

두 얼굴의 지도자에 대한 우리의 대응책은?

“그를 지도자로 인정해줌으로써 국제적 규범에 부합하는 행동을 유도하는 방법과 지도자가 어리고 부적절하다고 배제함으로써 더 예측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나는 전자가 낫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예측 불가능한 모습을 더 중시한 것 아닌가?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대북정책은 실패했다고 본다. 북한이 보내는 시그널과 노이즈 중 노이즈만 캐치한 것 아닌가 한다. 예컨대 오바마 대통령이 김정은과 만났던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맨을 백악관으로 부르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로드맨과 덕담도 하며 김정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직접 알아보려는 관심을 표명했다면 미북 관계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의지도 없었고, (김정은에 대한) 선입견도 나빴다. 김정은도 미국에 계속 (대화하자는) 메시지를 보내긴 했는데, 방식이 틀렸다.”

김정은 체제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보나?

“우선 우리 쪽(박근혜 정부) 임기가 다 돼간다.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론에 따르면 불가능하다.”

새 정부가 들어서야 가능하다는 이야기인가?

“새 정부가 들어서면 출범 초부터 북한을 만나야 한다. 북한이 핵을 보유했다 하더라도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국내정치적으로 상당히 위험도가 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문제를 풀겠나.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의 ‘Three Nos’ 제안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본다. 바꿔 말하면‘핵 폭탄의 추가 생산 금지, 추가 핵실험 및 고도화 금지, 그리고 핵 수출 등 확산 금지’를 전제로 경제·에너지 지원은 물론 북한의 안보 우려를 과감하게 해소해주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려면 북한의 비핵화를 한반도 평화체제와 연관시키고 한미연합군사훈련이나 연습을 잠정적으로 보류하는 방법도 하나의 마중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약속을 어기면 훈련을 재개하면 된다.”

김정일, “스포츠는 정치화하지 맙시다”


▎6·15 남북정상회담 4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리종혁 북한 아태평화위원회부위원장(왼쪽에서 둘째) 일행이 2004년 6월 14일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을 찾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왼쪽부터 원동연 실장, 리 부위원장, 김 전 대통령, 임동원 이사장, 문정인 교수)
문정인 교수를 일러 ‘햇볕정책 전도사’라고 한다. 그는 2012년 영문판으로 <햇볕정책(The Sunshine Policy)>이란 책을 펴냈다. 인터뷰가 이뤄진 날에도 김대중도서관에서는 ‘6·15 공동성명과 햇볕정책’ 기념 포럼 행사가 열렸다.

김대중도서관장도 맡고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DJ)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1차 남북정상회담 전에는 알지 못했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 추천으로 1차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청와대에서 오찬을 하게 됐다. DJ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국제적으로 잘 알리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말씀하시더라.”

1, 2차 남북정상회담 때 만난 김정일 위원장은 어떤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나?

“2000년 1차 정상회담 때 백화원초대소에서 열린 송별오찬에서 내가 당시 특별수행원이었던 박권상 방송협회 회장을 ‘KBS 사장’으로 김정일 위원장에게 소개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난 KBS만 봅니다’라며 박 사장에게 화답했다. 순간 나는 옆에서 취재하던 MBC, SBS 등 타 방송사 기자를 의식해서 ‘위원장님 말씀에 MBC, SBS 측이 섭섭하게 생각하겠습니다’라고 언급했다. 김 위원장 답변이 걸작이었다. ‘나는 국영 텔레비전만 봐서’라고 농을 하면서 대응하더라. 보통이 아니었다.

또 2007년 2차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10·4 정상선언’에 베이징올림픽에 응원단만 단일팀으로 보내고 선수단은 각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두고 송별오찬 때 이러한 결정에 항의하는 김정길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소개했다. 김 회장이 ‘정상선언에 남북 단일 선수단 파견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김 위원장에게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김정일 위원장이 ‘남조선은 올림픽도 개최한 나라 아닙니까. 그쪽 선수들 역량이 뛰어나서 남북 단일팀을 만들면 우리 젊은 선수들이 기회를 못 가질 수 있습니다’며 김 회장 제안을 거부했다. 거기에 김 회장이 ‘쿼터제를 만들어서라도 북측 선수들에게 더 기회를 주겠다’며 물러서지 않자, 김 위원장은 정색을 하며 ‘스포츠를 정치화하지 맙시다’라고 거부하더라. 인상 깊었다.”

현재에 이르러 ‘햇볕정책=퍼주기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당하다고 보나?

“전혀 정당하지 않다. 팩트(사실관계)만 놓고 보자. 딱 하나 때문에 (퍼주기라는) 비판을 받는다고 본다.”

그게 뭔가?

“1차 정상회담 전에 현대를 통해 1억 달러를 북한에 불법 송금한 것이다.(박지원 전 문화부장관이 북한 측 송호경 아태부위원장에게 1차 정상회담 대가로 현대전자를 통해 미화 1억 달러를 북측에 지급하면서 ‘대북송금 의혹사건’으로 불거졌다) 분명 문제가 있었다. 통치권 차원에서 내린 결단이었지만 사법부는 법적 책임을 물었다. 이것 말고 퍼주기 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지원은 전적으로 ‘남북협력기금’에 의존했다. 이 기금은 국회 외통위(외교통일위원회)의 동의가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이다. 진보 정부 10년 동안 남북협력기금 총 8조3000억 중에 4조3000억원가량은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신포 경수로사업에 들어갔다. 2조7000억원은 식량·비료 제공 등 인도적 지원사업에 썼다. 그것도 차관 형식에다 그 돈으로 남한의 잉여 미곡과 비료를 구입해서 줬다. 우리 기업도 도와주는 윈-윈(win-win)이었지 퍼주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7000억원 정도는 개성과 금강산의 도로 및 철도 연결사업에 쓰였고 나머지는 미집행 잔액으로 처리된 바 있다. 정부 차원에서 현금이 북한에 들어간 것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모두 여야 합의에 따라 집행됐다.”

그런데도 왜 ‘퍼주기’라고 할까?

“남북관계에다 경제적 교환관계의 원칙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교환관계는 등가성과 즉시성이 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듯 내가 100원 내고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 경제적 교환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회적 교환도 있다. 사회적 교환에는 교환의 등가성과 즉시성이 적용되지 않는다. 사회적 교환은 ‘선공후득(先供後得: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다)’을 특징으로 한다. 남북관계를 경제적, 기계적 상호주의로만 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회적 교환관계로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 그게 신뢰 구축에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퍼주기’ 논쟁은 실체가 없어 보인다.”

햇볕정책이 성과를 내지 못한 배경엔 북한이 변하지 않았단 이유도 있는 것 아닌가?

“동의하지 않는다. 우선 햇볕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게 2000년 6월부터 11월까지 5개월, 그리고 2007년 10월부터 12월, 합해야 고작 7개월 밖에 안 된다. 미국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북한이 움츠러들었다. 부시의 강경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은 힘들어졌다. 성과를 내기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햇볕정책에 의한 북한 자체의 변화는 컸다고 본다. 남측 내방객들을 통해 북한 주민들은 현금의 중요성을 알게 됐고, 남한에 대한 적대적 의식이 없어진 측면도 있다. 남한이 잘산다는 것도 알게 됐다. 측정할 수 없는 무형의 변화가 상당히 많다고 본다.”

햇볕정책 등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취할 때 미 부시 행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았을 것 같은데?

“김대중 대통령이 노력을 많이 했다. 부시 대통령은 설득할 수 있었지만, 그를 지지하는 네오콘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2006년 10월 경주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을 땐 노무현 대통령이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 문제로 부시 대통령을 몰아세운 일도 있었다. 이처럼 한미가 마찰이 있는 동안에 북한은 웅크리고 지켜만 봤다. 북한의 존재론적 한계이기도 한데, 북한은 미국만 상대하려고 한다. 북미관계가 잘되면 남한은 무시한다.”

노 대통령, “동북아시대위원장과 안보실장 맡아달라” 부탁


▎2008년 가을 신촌에서 제자들과 함께.
참여정부시절 동북아시대위원장을 맡았다. 노 대통령과 자주 만났나?

“많이 뵌 편이다. 노 대통령이 직접 내게 ‘동북아시대위원장과 안보실장 직을 겸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위원장 일도 힘든데 안보실장까지 하면서 나라 망칠 일 있습니까’라며 고사한 적이 있다. 그 이후에 더 자주 (관저에) 갔던 것으로 안다. 위원장직을 그만두고 난 뒤에도 두세 달에 한 번씩은 뵌 것 같다.”

참여정부의 ‘동북아균형자론’에 대해 왜곡된 시각이 있다는 입장인데?

“동북아균형자론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이 있었다. 노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구상했던 균형자론은 국방력 증강을 바탕으로 하는 하드파워 밸런싱(Hard power balancing)이었다. ‘하드파워 밸런싱’은 중·장기적으로 미국이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에서 철수하면 중국과 일본 간에 지역 패권경쟁이 심화될 텐데, 이때 한국이 중·일 양국 간에 군사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동북아시대 위원회 중심으로 공식 표방한 ‘화합적 균형자론’, 즉 소프트파워 밸런싱(Soft power balancing)이었다. 한중일 FTA, 다자안보협력체제, 그리고 6자회담과 같은 지역협력 구도를 강화해 새로운 지역질서를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참여정부의 ‘동북아균형자론’은 후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화합적 균형자론’은 엄격한 의미에서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동북아평화협력구상’과 같은 의미라 하겠다.”

그럼 하드파워 밸런싱(Hard power balancing)은 포기한 것인가?

“노 대통령이 이상주의자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 현실주의자였다. 노 정부 때 국방 예산은 9%씩 증액했다. 미래지향적으로 동북아 구도를 해석한 결과였다. 언젠가 미군은 한반도를 떠날 텐데 이후 중국과 일본이 지역패권 경합이 붙으면 한반도가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대비하는 게 동북아시대위원회의 과제였다. 선제타격은 못해도 우리가 반격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야 한다는 전제 아래 상당한 수준의 방위력을 가져서 어느 한쪽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국방 개혁 2020도 그런 미래를 생각한 것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이 중국의 굴기를 예측한 것 아니었나?

“중국의 굴기는 이미 이뤄지고 있었다. 6자회담에서 한중이 협력해 미국을 설득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노 대통령은 구체적인 친중책을 쓰진 않았다. 오히려 노 대통령은 당시 후진타오 전 중국주석에 대해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사석에서 말한 적이 있다. 10·4 정상선언에서 ‘3자 또는 4자’(10·4 정상선언 4조항에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는 문구가 등장한다)라는 애매한 문구가 나오는데 후 주석 때문에 이런 표현이 탄생한 것으로 안다. 2차 남북 정상회담 한달 전인 9월 초 호주 시드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때 부시 대통령은 한반도 종전선언을 통한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에 동의를 표명했으나 후 주석은 아무런 답변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3자 또는 4자’ 라는 표현이 나온 것으로 안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적 실책으로 한미동맹을 위태롭게 한 것을 꼽는 이들이 많다.

“(노 대통령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우리도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원칙 말이다. 평택기지 반환 문제를 봐도 알 수 있다. 평통사 등 시민사회의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평택기지 건설 건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뿐이 아니다. 53개 주한 미군 기지 반환 건만 해도 환경부와 시민단체 등에서는 환경 오염 등을 이유로 반환 거부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쓰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면서 적당한 수준에서 받아들이자는 입장을 취했다. 이라크 파병만 해도 노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반대했던 사안이다. 하지만 북핵 문제에서 미국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파병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MB 정부는 나를 적대시해, 정부 참여 못하고 안 했다”


▎미국 켄터키 대학교수 시절의 젊은 문정인 교수.
전작권(전시작전통제권) 환수 결정은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졌나?

“전작권 환수는 노 대통령 개인의 소신이 크게 작용한 사안이었다. 노 대통령은 북한이 우리를 무시한 채 미국과의 평화 협정을 고집하는 것은 전작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인식했던 것으로 안다. 노 대통령은 우리가 전작권을 갖고 필요할 때 북한에 대해 군사적 응징을 가할 수 있어야 북한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우리와 대화하려 나올 것으로 보았다. 그가 주장한 자주국방론의 핵심이기도 했다.”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6자회담은 여전히 유효한 틀인가?

“다른 (대안) 틀이 없다. 북미간 직접 대화는 한국이 수용을 못한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아이디어와 프로세스가 6자회담의 결과물인 9·19 공동성명에 들어 있다.(※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 북미관계 정상화, 한·미·중·일·러의 북한에 대한 에너지 원조, 별도 포럼을 통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 등을 골자로 한다) 6자 회담 무용론을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지속가능 하려면?

“북한의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체제, 그리고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와 불가분의 고리로 연계되어 있다. 이걸 규정해 놓은 것이 9·19 공동성명이고, 그 실천적 합의가 2·13 합의다. 그대로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이 읽어보지도 않고 6자회담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 같다. 잘 만들어진 걸 왜 버리려고 하는 지 알 수 없다.”

2005년 9·19 공동성명(6자회담)이 나온 배경은 무엇인가?

“한중간의 협력이 크게 작용했다. 미국의 걱정은 한국이 한미동맹에서 벗어나 친중 정책을 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걱정이 오히려 우리에게 레버리지를 줬다. 당시엔 우리가 북한과도 대화했다. 남북이 통하고 있단 점 역시 우리의 레버리지로 작용했다. 지금은 한국이나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고 중국에 ‘아웃소싱(out-sourcing)’을 하는 형국인데 불행히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극히 제약적이다. 6자회담이 무주공산인 이유다.”

정치인으로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평가한다면?

“DJ는 식견이 상당히 높은 분이다. 항상 ‘망원경같이 보고, 현미경같이 보자’고 말씀하셨는데 안목이 탁월하신 분이다. 특히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DJ는 말을 하기보단 듣는 편이었다. 지극히 ‘절제되고 사려 깊은’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땠나?

“노무현 대통령은 식사자리나 회의 석상에서 상대방들을 참으로 편안하게 대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는 상대와는 막장토론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비전과 열정이 있는 대통령으로 평하고 싶다. DJ가 ‘절제된,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고 하면 노무현은 ‘열린, 자연적’인 사람이었다.”

노무현 정부 이후로는 정부에서 일하지 않았다. 안 한 건가, 못한 건가?

“못하고 안 했다. MB정부는 나를 적대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구상에 기대를 했기 때문에 통일준비위원회에 들어갔다. 그런데 요즘은 아닌 것 같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비선에서 움직이려고 한다면 참여할 의사가 있나?

“당연하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처음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대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원칙을 지킨다면 정치적으로는 어렵더라도 민간부문 교류나 인도적 지원은 계속해야 한다. 일단 만나야 북한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다.”

정년퇴임이 실감 나나?

“잘 모르겠다. 35년이 참 빨리도 지나가더라. 지나간 시간이 허망하기도 하고,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운 시작이라고 본다.”

“정년퇴임은 또 다른 시작”

고별 강연 중 ‘나는 실패한 교수다’라고 언급했다. 몇 점의 점수를 줄 수 있나?

“50점 정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데 능동적으로 한 게 아니라 사회적 수요, 대세에 따라 흘러왔다. 선택과 집중을 못한 게 가장 아쉽다.”

평소 살인적 일정을 소화하는데 체력과 스케줄 관리는 어떻게 하나?

“수첩에 뭐든 30분 단위로 적어놓는다. 느리게 사는 게 미덕이라고 하지만 세속적 의미의 성공여부는 시간관리다. 스스로에게 하루에 두세 시간만 효과적으로 써도 성공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올빼미형에 가깝다. 보통 새벽 3~4시까지 작업한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학자였나?

“아니다. 그냥 되는대로 살다 보니 학자가 돼 있었다.(웃음)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고등학교 졸업할 때 유도 대학 갈 생각도 했는데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라고 어머니께서 반대하셨다.”(웃음)

퇴임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로 송도캠퍼스에서 신입생 대상으로 두 학기 중 가을학기에 가르치게 됐다. 내년 1~3월에는 U.C.SAN DIAGO 크라우스 석좌연구원으로 가 있고, 겨울학기에는 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면서 연구하게 된다. 1년에 한 권씩 새 책을 쓸 예정인데 <불확실성 시대의 한반도 대전략>을 구상 중이다. 독자들을 위한 것도 있지만 스스로 성찰하며 쓸 저서가 될 듯싶다.”

- 글 유지혜·박지현 기자 wisepen@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문정인 교수는? - 1951년 3월 제주 출생. 1977년 연세대 철학과 졸업 후 미국 메릴랜드 대학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미국 켄터키 대학, 윌리엄스 대학,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이고 분교 등에서 12년간 교수를 지냈고, 1994년 모교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미국 국제정치학회(ISA) 부회장 및 세계국제정치학회(WISC) 공동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과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직을 역임했다.

그는 학계에서 가장 많은 분야의 포럼을 기획하고 참가하는 학자로 꼽힌다.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94년에는 국가정보연구원(현 국가정보학회)을 만들었다. 민간 국제안보포럼 ‘항공우주력 국제학술회의’를 기획해 20년째 이어온다. 2001년엔 ‘제주평화포럼’을 시작, 2007년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선포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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