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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통신] 뉴요커의 ‘주거 문제’ 해결법 

집‘이 아니라 사람을 가져야 승리 한다’ 

글·사진 김해완 뉴욕 통신원 godhks1210@gmail.com
세계적인 도시에 숨겨진 뉴요커의 눈물… 높은 집값 때문에 ‘먹이사슬’로 전락한 부동산 문제를 공동체 소통으로 이겨내기까지

▎뉴욕 맨해튼의 스카이라인. 이 세계적인 도시에서 적당한 값에 살 만한 집을 구하는 건 하늘에 별 따기다. 필연적으로 잦은 이사를 택할 수밖에 없는 젊은 뉴요커는 ‘유목민’이라 불린다.
뉴욕에는 유목민이 산다. 이 세계적인 도시에서 적당한 값에 살 만한 집을 구하는 건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이다. 단기적으로 이곳저곳 이사를 다녀야 할 운명인 것이다. 잦은 이사를 택할 수밖에 없는 젊은 뉴요커를 지칭한 말이 바로 ‘유목민’이다.

이 유목민의 이사 시기에는 딱히 정해진 패턴이 없다. 계절과 상관없이 움직이며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이 패턴이라면 패턴이다. 이들 모두 그 어떤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돼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더 나은 주거지를 쟁취하기 위해서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기도 한다. 좋은 집을 구하기 위해 타인과 무리짓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나홀로 주거환경을 구축하는 이도 있지만 가족이나 타인과 일시적인 연대를 이뤄 한집에 사는 걸 택하는 이가 더 많다.

집을 향한 열망이 역설적으로 이들로 하여금 쉬지 않고 이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내 집은 없지만 집의 그림자에 영원히 사로잡힌 채로 오늘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사 다니는 뉴욕의 젊은이들.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현지에서 살펴보면 흔하고 흔한 평범한 뉴욕 사람일 뿐이다. 단지 이사를 자주 다닐 뿐인데 왜 이들을 ‘유목민’라고 부르는 것일까?

뉴욕에는 기묘한 거주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특이한 시스템을 처음 접한 외지인은 충격에 휩싸이곤 한다. 뉴욕에 막 도착한 ‘초짜’는 집을 구하기 시작하자마자 직감적으로 안다. 뉴욕 부동산이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다단계 부동산의 천국


▎1. 맨해튼의 한 아파트. 방 한 칸 월세가 약 200만원에 달하는 뉴욕에서 돈 없는 젊은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위태로운 공동주거다. / 2.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뉴요커의 모습. 도시가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사람이 필요하다. 뉴욕이 명성을 획득한 것도 이 다양성 때문이다.
2년 전 나는 뉴욕에 막 도착한 한국 유학생이었다. 처음 연락한 집은 맨해튼의 한인 타운 옆에 있었던 월세 1000달러에 달하는 아파트였다. 당시 환율로 한화 110만원 수준의 비싼 가격이었다.

순진하게도 맨해튼에서 이 정도 가격이 시세라고 믿었던 나는 상상 이상의 현실을 마주하고 깜짝 놀랐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장소는 아파트가 아니라 거실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거실의 절반에 해당하는 구역이었다.

내가 방문한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는 이미 한국 학생 다섯 명이 살고 있었다. 각 방에는 두 명씩 싱글 침대를 놓고 비좁게 생활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거실에 뒤엉켜 있는 이불과 어지러운 책상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거실의 다른 구석에는 빈 매트리스가 여섯 번째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주인은 선심 쓰듯 말했다. “거실을 혼자서 쓰고 싶다면 깎아서 1900달러(한화 약 200만원)에 해줄 수도 있다.” 입이 쩍 벌어졌다. 거실만 사용할 뿐인데 월세가 200만원이라니 내 생애에 듣도 보도 못한 신세계였다.

집세만 비현실적인 게 아니었다. 집 상태는 뉴욕이라는 명성이 창피할 정도로 괴기스러웠다. 뉴욕은 굉장히 낡은 도시다. 어느 건물이나 가스, 상수도, 난방 중에서 최소 하나는 문제가 있다.

쥐와 바퀴벌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세탁기 놓을 공간조차 없어서 공용세탁소가 얼마나 가까운지가 월세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정도다. 집에 세탁기가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부를 뜻한다. 평범한 수준의 집에서 살기 위해 과반수에 이르는 뉴요커가 월급의 약 40%를 월세로 지출하고 있다.

비싸고 비좁고 허름한 공간. 이 최악의 조합에서 돈 없는 젊은이가 살아남는 방식은 하나뿐이다. 바로 위태로운 공동주거다. 그나마 거주할 만한 집은 터무니없이 비싸니 이 공간을 쪼개서 월세를 나눠 내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거실 월세 200만원’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 공동주거 형태는 수평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수직적인 먹이사슬이다. 꼭대기에는 집주인이 있다. 그 밑으로 직장(신용 기록)이 있는 사람이 집을 빌린다. 그러나 웬만한 월급으로 월세를 오롯이 감당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직장인 임차인은 공간을 쪼개서 비공식적으로 세를 준다.

직장 혹은 신용이 없는 사람은 이런 2차 분양(?)을 노린다.이들 2차 분양자도 세를 놓는다. 장기로 집을 비워야 할 때 관광객에게 단기간 임차를 놓는 것이다. 이렇게 공간 한 곳에 다단계 부동산이 형성된다.

유목과 이사의 차이는 간단하다. 이사가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면 유목은 그 어느 집에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떠나야 할 이유가 시시각각 계속 생기기 때문이다.

집에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경우도 태반인데다 생활 태도가 나쁜 룸메이트가 걸리기도 하며 나보다 주거의 먹이사슬 위쪽에 있는 사람이 갑작스레 월세를 올리기도 한다. 자연히 집은 한 계절 동안 몸을 뉘일 수 있는 ‘임시 텐트’ 정도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 통계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뉴욕 주민 중 40%가 이사를 갔다(2014년 기준). 뉴욕커의 절반 가까운 수가 이사를 다닌다는 결과도 그렇지만 이 통계에 비공식적인 세입자는 빠져 있어서 더 놀랍다.

이 통계에 합산되지 않은 2차 분양자, 즉 먹이사슬 아래쪽에 있는 무리는 소리 없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일례로 2년 동안 4번, 3년 동안 7번, 7년 동안 10번 이상 집을 바꿨다는 이야기는 뉴욕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와 관련 미국의 NGO사이트<아이들을 위한 뉴욕 시민 연대>는 뉴욕에서 빈 집 비율이 약 2.4%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2014년 기준). 이 말인 즉 누군가 이사하기 무섭게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운다는 얘기다.

최근 사진작가 브랜든 스탠턴은 ‘뉴욕의 인간들(Humans of New York)’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주목 받았다. 그는 뉴욕 길거리에서 무작위로 사람을 만나서 사진을 찍고 인터뷰도 나누는 형식으로 뉴요커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일례로 한 뉴요커는 이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제 유목생활에는 불행이 따라다니는 것 같았어요. 지난 3년 동안 7번이나 아파트를 바꿨어요. 첫 번째로 살았던 장소는 반투명 플라스틱 조각으로 벽을 세운 창고였어요. 애초에 이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집주인이 대기자가 세 명이나 있다고 해서 당황했던 거죠.”

그의 고충은 이어졌다. “당시 룸메이트는 80세 작가였는데 하루 종일 속옷만 입고 폭력적인 포르노나 전쟁 영화만 봤어요. 다행히 계약이 끝났지만 온수와 히터가 안 나오는 집으로 이사해야만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집주인이 근처 가로수의 전깃줄을 끌어다 몰래 전기를 쓰다가 체포됐어요.”

아, 눈물 없이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사연이다. ‘헬(hell·지옥) 뉴욕’이라는 말이 안 나온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렇듯 뉴욕의 모든 조건이 ‘어서 이곳을 떠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떠나도 갈 곳이 없다.

이미 문제의 ‘다단계 부동산’이 뉴욕의 맨해튼, 퀸즈, 브루클린, 뉴저지 등 모든 틈새공간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새집도 결국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어쩌겠는가? 몇 주, 몇 달, 몇 년 버티다가 또 다른 집을 찾아 떠날 수밖에. 이것이 뉴욕의 유목생활이다.

물론 부동산 업계의 논리를 따르면 뉴욕의 유목생활은 그저 ‘저소득층’의 사정일 뿐이다. 집값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면 불편을 겪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현재 뉴욕은 2008년 금융위기 전보다 집값이 더 올랐다)

이런 사고방식은 어디에나 만연하다. 실제로 뉴욕의 월세 대란을 비판하는 기사가 나갈 때마다 ‘세계적인 도시에서 살기 위한 대가’라는 내용의 글이 수도 없이 달린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함정이 있다. ‘저소득-고소득’의 이분법은 기본적인 진실을 놓치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도시를 만드는 힘 ‘다양성’


▎1. 뉴욕에서 집에 세탁기가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부를 뜻한다. 평범한 수준의 집에서 살기 위해 과반수에 이르는 뉴요커가 월급의 약 40%를 월세로 지출하고 있다. / 2. 맨해튼의 한 아파트. 파티션으로 거실이 나눠져 있다. 월세가 비싸다 보니 거실을 쪼개서 두 명이 월세를 공동 부담하는 경우가 많다. / 3. 이민자는 여전히 뉴욕이 ‘자유의 땅’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집값이 비싸더라도 이 섬 어딘가에는 외부인을 품어줄 환상적 공간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 것이다
도시는 소유물이기 이전에 하나의 세계다. 이 시공간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사람이 필요하다. 다양한 노동력, 기술력, 사고방식, 욕망 등이 도시를 좀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뉴욕이 명성을 획득한 것도 이 다양성 때문이다. 도시학자 제인 제이콥스는 도시가 번창하는 방법과 자연을 살리는 방법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유전자 풀이 근본을 이루는 보물이다. 도시 생태계에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근본을 이루는 보물이다.”(<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제인 제이콥스, 12쪽)

부동산 업계의 논리대로 뉴욕에 부자만 산다면 뉴욕은 더 이상 뉴욕일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본의 논리는 다양성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 이윤이라는 한 가지 목적만 좇아갈 뿐이다. 재개발, 슬럼청소, 주택담보, 무슨 길을 통해서든 집값은 계속 올라야만 한다. 이런 움직임은 17세기 맨해튼 다운타운에서 시작해 현재 뉴저지까지 이르렀다.

다양한 사람이 극도로 천편일률적인 주거 환경에 살면 어떻게 될까? 집의 소유를 포기하게 된다. 실제로 뉴욕에서 집 없는 사람의 스펙트럼은 넓다. 흔히 유추할 수 있는 노숙자, 유학생, 불법이민자뿐만 아니라 예술가, 샐러리맨, 주부 등 수많은 일반 시민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미국 언론매체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유목생활을 선택하는 사람 중에 부유층도 있다. 이를테면 월세 280만원을 감당해왔던 한 40대 남성이 룸메이트를 들이기로 결심한다. 월세를 절약해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다.

기회와 풍요의 땅 ‘마나하타 섬’


▎뉴욕 맨해튼의 한 부동산 광고. 뉴욕 부동산 시장이 계속 팽창할 수 있었던 까닭은 외부인이 쉴 새 없이 유입됐기 때문이다.
어디 이뿐이랴? 자기 소유의 집은 세를 주고 정작 자신은 맨해튼 곳곳으로 이사 다니는 30대 여성도 있다. 그녀는 “내 집은 있지만 진짜 ‘집’은 가지지 못한 처지”라고 말했다. “뉴욕에서 집다운 집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더 좋은 풍경, 더 넓은 공간의 집이 더 나은 가격으로 시장에 나오면 곧바로 렌트한다.”(<뉴욕타임스>, 2014년 3월 28일자)

이쯤 되면 ‘저소득층만 잦은 이사를 한다’고 단정짓기도 무안하다. 결국 뉴욕의 유목생활은 가난의 상징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삶의 재배치’인 것이다.

모든 물질에는 한계점이 있다. 한계점에 다다르면 고체는 액체로 질적 변환한다. 뉴욕의 부동산업계 역시 이미 한계 점을 넘어섰다. ‘거실 평균 월세 1700달러(한화 200만원)’, ‘방 한칸 평균 월세 3380달러(한화 400만원)’라는 통계는 더 이상 양적인 숫자가 아니다. 이것은 도시 생태계에서 질적 변환이 일어났다는 표지판이다.

과거 몽고인이 유목생활을 시작한 것은 사막이라는 환경 때문이었다. 사막에서는 모래가 파도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한 장소에 고정된 채로 살 수 없었다. 불행히 21세기 뉴욕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여전히 뉴욕은 세계적인 도시지만 주거지만은 ‘사막’인 것이다.

자본이라는 모래폭풍은 사람을 끊임없이 다음 집, 그 다음 집으로 내몰고 있다. 불가피한 이사를 재촉하는 ‘열기’에 내 집 마련의 꿈이 흔적도 없이 증발되고 있다. 미래의 인류학계가 ‘유목’이라는 항목 아래 21세기 뉴욕을 몽고의 초원과 나란히 놓고 비교연구할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이 든다. 뉴욕은 풍요와 기회의 땅이 아닌가? 각국에서 추방된 자를 받아들여 시작할 기회를 주는 도시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는 그간 우리가 꿈꿔왔던 뉴욕에서의 ‘스위트 홈’은 온 데 간 데 없고 떠돌이 생활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뉴욕의 탄생 신화를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뉴욕은 사람을 속인 적은 없다. 바로 ‘기회와 풍요의 땅’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뉴욕의 부동산 신화에서 탄생됐기 때문이다. 이 신화는 약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인디언 부족 레나피(Lenape)는 대서양의 구석진 섬에 살고 있었다. 이 섬은 레나피족으로부터 ‘언덕이 많다’는 뜻의 ‘마나하타(Mannahata)’라고 불렸다.

마나하타 섬은 참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레나피족은 사냥과 수렵을 하면서 살았지만 동식물의 다양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한계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16세기 무렵 유럽인이 우연히 이 섬을 발견하자마자 마음을 홀딱 빼앗긴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를 두고 <고담, 1898년까지의 뉴욕 역사>의 저자 에드윈 버로우와 마이크 왈라스는 마나하타 섬이 결코 ‘발견된 신세계’가 아니었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유럽인을 경탄에 빠뜨린 마나하타 섬의 풍요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섬은 레나피족의 문화이자 지질학이라는 공예품이었기 때문이다.”

레나피족의 훌륭한 문화는 기어코 유럽인을 끌어들이고 말았다. 1609년 첫 유럽 이민자가 이 섬에 발을 디뎠다. 바로 네덜란드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나하타 섬은 아직 뉴욕이 아니었다.

오늘날 뉴욕이 탄생하게 된 신화는 1626년 네덜란드인이 단돈 24달러에 마나하타 섬 전체를 인디언에게서 구매하면서부터다. 오늘날 명칭인 맨해튼 섬이 되는 과정에서 지불된 돈을 현재 물가로 환산해보면 약 670달러(한화 약 79만원)에 불과하다.

뉴욕, 부동산 신화에서 탄생되다


▎1.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그래피티 작품. 다양한 인종을 표현했다. 뉴욕은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의 삼각 무역을 책임지는 연결 고리였다. / 2. 도시학자 제이콥스는 뉴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소통이라고 강조한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비싼 집이 아니라 따뜻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문제의 교환이 이뤄지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나하타 섬의 동식물은 ‘무상자원’이 됐다. 눈부신 해변은 ‘노예시장’으로 변모했으며 레나피족은 ‘불법거주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섬의 다양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던 레나피 족의 자연철학은 환경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는 유럽인의 무지로 파괴됐다.

이 신화에 따르면 유럽인이 마나하타 섬에서 어떤 풍요를 봤으며 이 섬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 마나하타 섬의 풍요를 생각하면 24달러라는 가격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유럽인은 마나하타 섬의 풍요로운 자연 생태계에 감탄했고 누구도 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싼 부동산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공짜 부동산’. 그동안 뉴욕에 투사되어온 풍요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이 땅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환상 말이다. 누구나 이 섬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부는 자연히 신분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여기서 자유에 대한 감각이 탄생했다. 가난한 유럽인이 속박이 가득한 기존 사회에서 벗어나 이 공짜(Free) 땅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Free)를 얻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 400년 전 탄생한 부동산 신화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일례로 이민자는 여전히 뉴욕이 ‘자유의 땅’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집값이 비싸더라도 이 섬 어딘가에는 외부인을 품어줄 환상적 공간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 것이다. 과거 마하나타 섬의 아름다운 이미지는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섬의 실제 역사를 알고 보면 전혀 아름답지 않다. ‘거의 공짜’에서 출발한 부동산 시장은 순식간에 착취 모드로 전환됐다. 먼저 와서 땅을 차지한 자는 늦게 도착한 자를 세입자로 삼았고 세입자는 그 다음 세입자를 맞을 준비를 했던 것이다.

미학자 이와사부로 코소는 이 ‘수직적 먹이사슬’이 뉴욕의 핵심이라고 요약했다. “뉴욕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영토’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로 귀결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민중이 살아갈 터전은 잔혹성이 내포된 시장(market)으로 변해버렸다.”

이 밖에도 뉴욕의 부동산 시장이 계속 팽창할 수 있었던 까닭은 외부인이 쉴 새 없이 유입됐기 때문이다. 뉴욕은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의 삼각 무역을 책임지는 연결 고리였다. 노예, 하인, 상인, 귀족과 같은 다양한 계층 구성은 이곳의 먹이사슬에 곧바로 녹아 들었다.

19세기 말 근대 건축기술이 등장하면서 뉴욕의 부동산 시장은 또 다시 눈부시게 도약했다. 일례로 뉴욕은 세계 최초로 고층 빌딩이 빼곡히 들어찬 땅이 됐다. 건축을 위해 낡은 집은 모조리 철거돼야 했다. 신축된 빌딩은 웬만한 세입자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싸졌다. 임대인과 임차인의 재정적 거리 역시 마천루의 높이만큼이나 벌어졌다.

2016년 미국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미국인은 사회 최상층에 올라선 ‘임대인의 후손’을 지켜보고 있다. 바로 부동산 사업가이자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그 주인공이다.

트럼프는 뉴욕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던 집안에서 ‘금수저’로 태어났다. 그 역시 가업에 뛰어들었고 맨해튼의 한가운데에 당당히 트럼프타워도 세웠다. 이제 그는 미국대통령 후보로서 전국의 ‘임차인’에게 태초의 신화를 다시 불어넣고 있다.

“아메리카를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ian)!” 이 문구는 뉴요커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마나하타 섬’의 이미지를 자극했고 실제로 적잖은 호응을 얻었다. 다시 한 번만 이 섬을 찾을 수 있다면 미국의 아름다운 영광도 다시 찾아오리라.

이 순진한 낭만주의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장면과 닮았다. 극중에서 주인공 개츠비는 바다 건너 초록색 불빛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태초의 뉴욕을 상상한다. 네덜란드인이 마나하타 섬에서 푸르른 나무를 처음 발견했던 그 순간을 떠올린 것이다.

오늘날의 뉴요커도 맨해튼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비슷한 상상을 하고 있다. 과거 이 섬에는 키 큰 나무가 빌딩만큼 들어차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를 거닐었던 유럽인은 이 땅에 어떤 세상을 건설하고 싶어했을까? 그들이 꿈꾸던 미래는 지금처럼 ‘콘크리트 정글’이었을까?

‘콘크리트 정글’에서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이것만은 확실하다. 마나하타 섬에 유럽인이 발을 디딘 순간부터 이 땅의 사막화는 진행됐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트럼프가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되든 안되든 이미 진행된 도시의 사막화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시의 사막화를 해소할 방법은 없을까? 우선 부동산의 꿈에서 깨어나는 게 급선무다. 이제는 레나피족처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할 수도 없고 네덜란드인처럼 파격적인 부동산 ‘대박’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집을 갖는다 해서 주거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유인 즉 내 집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삶은 비싼 집이 아니라 풍성한 인간관계가 보장한다. 미국의 디트로이트처럼 완전히 죽어버린 도시에 집 한 채 갖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백인 상류층만 모여사는 부자 동네도 오히려 범죄율이 더 높다. 이웃끼리 소통하지 않아서다.

도시학자 제이콥스 역시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소통이라고 강조한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집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막화가 진행 중인 도시에서 이런 곳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발달한 상황에서는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우정의 네트워크를 펼칠 수 있다. 근거리 공략도 가능하다. 옆집 사람과 이웃사촌이 되는 것이다.

일단 성공하면 이만큼 의지하기 좋은 사람이 또 없다. 친구 중 누군가 거실을 갖고 있다면 그 공간을 적극 활용해 정기적으로 홈파티를 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제로 뉴욕의 지인 중에 우정으로 똘똘 뭉친 룸메이트 세 명이 있었다. 이 삼형제는 할렘가 고시원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건넛방에 사는 여자 세 명이 히스테리를 부리는 바람에 함께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이들이 돈을 합쳐 집을 얻자마자 주변 친구를 몽땅 초대해 정기적으로 파티를 열었다. 이 파티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다양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최근 이 삼형제는 각자의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아마도 가는 곳마다 이런 공동체는 또 생길 것이다. 레나피족처럼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시킬 줄 아는 능력자이기에.

자본 권력에 맞서 싸우는 것도 목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드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 사이에 서 있자.

유목은 파괴와 생성의 힘을 모두 갖고 있다. 진정한 뉴요커는 알고 있다. 집을 가진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진 자가 이긴다는 것을.

김해완 - 고등학교 재학 중 학교를 나와 공부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서 생활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가방끈은 짧지만 공부복은 많다. 2년 전에는 예상치 못하게 ‘세계의 수도’ 뉴욕 한복판에 떨어졌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배움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는 중이다. 쓴 책으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그린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북드라 망),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작은길)이 있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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